- 2020년 8월 13일
- 20분 분량
창준시목
<죄의 대화>
은백 (트위터 @HoW_dm300)
땅거미 내려앉아 어두운 거리에,
가만히 너에게 나의 죄 들려주네
서부지방검찰청 형사3부 소속의 검사 황시목은 소위 동료들의 표현을 빌자면 ‘또라이’같은 종류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정상과 특이(그러니까 또라이)를 나누는 기준은 수만가지에 이르지만 시목은 그 정상의 기준치를 종류별로 다채롭게 비껴나가는 멋진 스킬을 갖췄다는 말이다. 사회성은커녕 공감대가 없고 말이 통하지 않으며, 때로는 비인간적이기까지 한. 하지만 이렇게 눈으로 볼 수 있고 합리적인 이성에 근거한 판단만으로는, 황시목이라는 인간의 진짜 ‘특이함’의 근원에 도달할 수 없다.
1.
사건의 발단은 터무니없었다.
시목이 이제 막 검사 7년 차로 접어들 무렵, 서부지검으로 재부임 발령이 떨어진다. '재'부임이 된 연유는 단순하게 시목이 이곳에서 수습을 뗀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올 것이란 기대를 한 적은 없었지만 여타 임지를 거쳐 어찌어찌 돌아오게 되자, 시목은 어렴풋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다. 눈처럼 하얗고 각진 외벽, 죄 없이도 주눅 들게 하는 고압적인 분위기, 냉엄한 정의의 칼과 공평의 저울을 들며 비밀에 감싸여있는 법의 요새. 혹자는 이를 마치 유스티티아의 신전과도 같다고 평했지만.
처음 이 곳에 발을 디뎠을 언저리의 시목을 반추해보면, 어수룩하고 병아리의 기색이 완연했던 그 시절과 지금은 뭔가 달라졌을 것이다. 제 딴에는 그대로 같아도 남이 보기에는 그럴 것이다. 재회한 서부지검도 마찬가지다. 외관은 그대로이되 그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은 바뀌었다. 그들은 그대로라고 주장할지 몰라도 시목이 보기에 난 자리와 든 자리의 차이는 상당히 컸다. 더불어, 언제나 건재하리라 여겼던 유스티티아조차 이제는 공석이다.
정의의 상징도 가출 중인 것을 증명하듯이, 이삿짐 정리도 마치지 못한 복귀 첫 출근일부터 차장에게 냉큼 호출을 당한다. 지금의 차장이 제 수습시절 부부장 검사라는 점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서부지검에 머무르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고 저를 기억이나 할까 싶지만 어차피 한번은 거쳐 가야 할 인사. 암튼 불렸으니 까라면 까야지. 문을 두드렸고 허락이 떨어져 진입한 차장실의 주인에게 까딱 고개를 숙여준다. 그리고 별 생각 없이 눈을 든 시목은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 잠시 숨을 멈추고 만다.
"……?"
남자의 뒤에 어둑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오랜만이네 황시목. 차장의 목소리가 시목의 귓바퀴를 스치고 흩어진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같은 의례상의 응대마저 잊었다. 시목은 마지막으로 봤던 남자의 모습을 더듬는다. 지금 눈앞의 차장은 그 시절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 생겨있는 탓이다. 요즘 유행하는 최신 패션인가?, 물론 아니기 때문에 눈을 두어차례 더 깜빡여본다. 검게 아른거리는 차장의 그림자 아닌 그림자. 거무스름하며 불길한 안개가 사무실의 전방위로 드리워 그 주인의 등 뒤와 발아래에서 탐욕스레 날름댔다. 그러므로 탄식한다. 이 모든 광경은 하필이면 오로지 시목에게만 ‘보이고’ 있을 것임을.
그대로 얼어붙은 시목에게 차장이 뭐라고 또 말을 거는 것 같았으나, 시목의 눈은 그의 뒤에 꽂힌 채 움직이지 못했다. 가물가물 형체없는 검은 그림자가 아지랑이마냥 흔들렸다. 차장의 그림자가 아냐. 까맣고 불길한 연기. 차장의 머리 위에서 잡아먹을 듯이 맴도는 그 검은 안개. 에효, 시목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토했다. 누군가가 차장을 저주하고 있었다.
*
그러니까 시목은 이른바 ‘식스센스’라 불리는, 일반인들과 남다른 기질을 하나 더 타고난 부류였다. 여름이면 영화관에 줄줄이 붙여둔 음험한 포스터에서 나오는 형상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의식을 차려도 몸은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하는, 사진을 찍었는데 비어있어야 할 공간에 등장하는 그림자 같은 것들. 요는 시목한테 귀신 혹은 유령 같은 걸 보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얘기가 맞다. 무당이나 엑소시스트처럼 본격적인 이름을 붙이기엔 시목이 성불이나 퇴마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제힘으로 차단도 불가능한지라 그저 보고 들리고 느끼며 그에 따라 몸이 반응을 할 뿐 시목 스스로가 귀안을 닫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 그것이 비극의 싹이었다.
물론 물리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고심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시목의 부모는 때때로 괴로움에 귀를 막고 허공에 소리를 지르는 아들을 위해 미국까지 데려가 수술을 시켰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래도 조금은 달라졌다. 시목은 여전히 영혼이 보였지만 이젠 그들이 말을 걸어도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감정도 같이 날아간 것은 그 대가였나보다. 시목의 발작대는 증상은 잦아들었지만 부모와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되었다.
헌데 이런 비극이 검사가 된 시목에겐, 나름 쓸모가 생기더라는 게 인생살이의 기묘한 희극적 포인트가 된다. 감정이 옅어지고 허무맹랑한 것을 찰지하는 체질이 아이러니하게도 검사로서 사건을 수사할 때 처음으로 도움아닌 도움이 될 줄이야. 현장에 원한으로 남아있는 사념들, 억울함을 호소하는 저세상의 흔적들을 시목이 직간접적으로 제 수사에 반영하기 시작하자, 황프로 걔는 어떻게 저런 결정적 증거를 잘도 찾아내는 거야?, 선임들도 포기한 장기미제사건도 엿가락 바꾸듯 실적으로 돌아온다. 동료들의 질시와 감탄 속에서 귀신도 보고 감정도 없는, 그야말로 슈퍼돌연변이 검사로 자리매김한 시목이 여전히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무렵. 그들이 여전히 말을 거는 듯했지만, 이젠 들을 수 없는 것이 아쉽기까지 할 무렵이 된 지금,
해후한 상관의 그림자에서 '이것'을 조우한다.
2.
시목은 서부지검의 차장검사 '이창준'에 대해서 나름 잘 안다.
물론 알아봤자 그의 측근들만치 신체 사이즈까지 다 안다는 뜻이 아니라 남들이 아는 만큼 안다는 얘기다. 수습을 마치고 수원지검에 첫 발령된 이후에도 뉴스에 종종 나올 만큼의 유명인사를 모를래야 모를 수 없었다. 임지를 돌 때마다 알고 지내던 회사 동료들은 차차 관심거리에서 멀어져가도 이창준의 모습은 꾸준히 기억했다. 시목이 견학했던 재판에서 그를 처음 보았던 그때의 인상까지도 또렷하게.
그렇지만, 그때는 없었어.
'저것'은 사람 사는 어느 곳이든 있었다. 조건, 장소, 때를 가리지 않으므로 사람에게 붙어 있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검찰청만 해도 당장 아까 옆을 지나친 서검사한테도 보일 수 있단 말이다. 따라서 시목이 놀라는 것은 '사람'에게 보여서가 아니고, '이창준'이라는 사람에게 보여서다. 없었다. 수습시절 지켜본 이창준은 이러한 검은 연기가 안보였으니까. 왜지, 뭐가 바뀐 걸까.
“뭐 할 말이 남았나?”
퍼뜩, 저만의 달나라에서 한창 추리의 나래를 펼치던 시목이 원래의 세계로 돌아온다. 실은 지금 당장 차장님 뒤에 큰일 난 거 같습니다, 라고 폭로할까 싶지만 일단 아닙니다.를 덧붙인다. 제 그림자에 뭐가 아른대는지도 모르는 상사가 이만 가서 짐 정리해, 즉 이제 가도 좋다는 사인을 보내는 그 순간에도 시목의 시선은 뿌옇게 번지는 검은 안개를 향했다. 이미 다년간의 귀신체험을 통해 알고 있다. 지박령이나 돈귀신같은 잡귀가 아니야, 그랬으면 놀라지도 않았겠지만. 그것은 사람이라기엔 기괴하고, 짐승이라기엔 악의적이며, 물건이라기엔 감정을 지닌 아지랑이와 같아서. 마치 심장에서 발화한 것처럼 새까맣게 피어나는 연기와 닮은 그것,
그 사람을 향한 타인의 악의, 한마디로 업보이자 저주였다.
특정인에게 축적되는 마이너스한 감정의 결집체. 누군가의 미움 사기가 밥 사기보다 쉬운 요즘 시대에 추상적인 증오만으로는 저렇게 진한 색채가 구현되지 않는다. 보다 구체적이고, 보다 집요하며, 보다 섬뜩하고 광기어린. 이를테면 새끼 잃은 부모가 품을 살의. 그 목숨을 앗는 것도 가리지 않을 만한 분기. 해악하기 위해 기꺼이 그 죄업을 뒤집어 쓰겠다는 절규의 색. 결국 악의다. 무언가의 이유에서 파생된 여러 사람의 저주가 모이고 모인 교집합이다. 시목도 저런 케이스를 한 두 번 본 적이 있다. 각설하고 결론은 악의가 쌓이고 쌓이면 저 형체없는 검은 안개가 사신의 그림자로 형태화되고 결국 그 마지막은….
죽겠네.
죽음뿐.
누가 왜 이렇게까지. 가게 오픈기념 풍선인형마냥 흔들리는 저 안개는 예사로운 레벨을 훌쩍 넘었다. 저토록 강력한 악의를 보자니 차장이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가 의문으로 따라붙는다. 대체 누구에게 이렇게 극심한 원한을 샀는지, 그렇다면 차장이 저지른 짓은 뭔지. 검사님 오셨어요 저기 저 박스는 어떻게 할…, 412호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실무관을 지나쳐 시목은 안쪽 소파에 몸을 묻고 생각의 끈을 잡아당겼다. 새까만 죽음, 담당했던 피의자들의 등 뒤에서 본 적이 있다. 간혹 잘나간다는 재벌 회장의 발발밑에서도보았다. 악의가 꼭 악행의 결과로 생기는 건 아니지만 저만치 가시화되려면 그만큼 상대에게도 추궁할 원인이 있겠노라 수사관의 직감이 속삭인다. 그리고 차장이라면, 이창준이라면 과연 그런 상대가……차고도 넘치겠는데.
검사 짬밥 10여년이면 원한 사기가 식은 국밥 먹기보다도 쉽고, 차장이 쌓은 업보가 있을 테니 생각나는 인사가 한 둘이 아니다. 아효, 시목은 시작부터 난이도가 너무 센 게 들어온다 싶다. 재부임 첫날부터 직장상사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걸 혼자서만 알게 된 셈인데, 제 뒤에 아무도 흉내못낼 악세사리를 달고 있는 차장에게 이제 두어 달 남으셨습니다, 라고 알려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창준 본인은 알지 못할 것이었다. 등 뒤에 시꺼먼 죄악이 호시탐탐 그의 목숨을 갉아먹을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을.
나몰라라 해도 상관없었겠지만, 공교롭게도 시목은 정체되어 있던 뇌에 도파민이 폭증하는 신호를 느낀다. 제가 떠난 사이에 무슨 곡절이 이렇게 자욱한 안개를 만들었고 어떤 비밀이 한 때 강직함의 반석에 섰던 그를 여기까지 추락시켰나. 게다가 사회의 구성원들과 합의된 방식 외에는 그 누구도 타인의 악의에 의해 목숨을 잃어선 안된다는 게 이 나라 형법의 정언명령이라면.
구구절절하지만 그럼에도 왜 시목이 이창준의 업보에 이토록 관심을 가졌는지는 이 모든 사유가 사실 핑계에 불과할 지 모른다. 어쩌면 창준은 죽도록 알지 못할 것이다, 시목이 한 때 품었던 마음을. 창준의 재판을 처음 보았던 그 날에, 그에게는 정의의 수호신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어디에도 보이지 않던 유스티티아가 창준일 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어린 검찰관이 있었음을.
그리고 지금은 이미 그 자리를 떠나갔다고.
3.
"형사부장 자리는 좀 작은데요."
정말 작다고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니다.
상황이란 늘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어서,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차장의 그림자를 파헤치겠다 결정을 실행에 옮기고 얼마후 시목은 매스컴의 폭풍을 맞았다.
싸이코패스 검사로(from 옛 동창들) 실검 1위를 경신 중인 당사자는 휴가 끝난 월요일을 맞이하듯이 청사에 입성한다. 박무성 피살사건에 대해 말하자면, 창준의 뒷사정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 보고 뛰어든 사건이었다. 그게 택배기사 강진섭에서 삐끗해, 함정에 빠졌다. 화제의 사건, 냄새를 맡은 매스컴은 범인보다 수사검사의 정체를 집요하게 누설한다. 시작은 창준의 저 아른대는 저주의 근원을 캐려고 물었던 것이었는데, 도리어 폭로되고 있는 것은 캐려고 하던 저의 쪽이다. 죄없는 죽음이 숫자만 키웠다.
아무튼 실책이 사실이었으므로 차장실로 당장 올라오란 콜을 받는다. 박무성이 차장 이창준과 이런 저런 커넥션이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시목이 거기에 뛰어들었다는 건 명명백백한 반기의 표명. 이 발칙한 반역자를 내치기엔 최적의 상황이었기에 문책을 이유삼아 수사권자 교체만이 아니라 좌천에서 최악의 경우 해임도 내다봤다. 그런데 정작 그가 불러다놓고 한다는 말은 엉뚱했다.
"형사 3부 부장 자리는 어때."
차장이 낮술을 했나? 시목의 예상 답안엔 '앞뒤 안 가리고 날뛰더니 꼴좋네. 가서 짐이나 싸', '너 나 미치는 꼴 보고 싶니', 등등만 있었다. 이런 선택지는 없었다.
"옷 벗으라 하실 줄 알았는데요."
"내가 왜?, 이번 덕분에 너도 사람이란 걸 알았는데."
열심히 하다 보면 그런 일도 있지.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고 말이야. 시목은 벌서듯 세워두고 자신은 다리를 꼰 채 등을 기대고 앉은 창준의 표정은 딱히 그래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왜 지레짐작이야. 어쩌다 실책 한 번 할 때마다 전장의 군인을 내쳐버리면 남는 사람이 있겠어. 아니면 뭐 찔리는 게 있나? 설마 황검사가 내 얼굴에 먹칠을 하려고 일부러 이런 난리를 냈다거나."
하아, 가시를 세워 찌르는 어투에 시목은 마주모은 손을 아주 약간 말아쥔다. 역시 알고 있었나. 이래저래 돌려말하고 있지만 과녁은 정확했다. 시목이 창준의 뒤를 캐려고 박무성 사건을 맡아든 걸 알고 있던 모양이다. 애초에 박무성 사건 자체가 사정을 아는 사람에겐 독이 든 성배다. 다만 이 지검의 차기 수장이 제 목을 노리는 반동분자를 잡았고 그다음은 이쪽 목을 칠 일만 남았을 텐데, 정작 던졌다는 미끼가 승진인 점은 이상했다. 채찍이 아니라 당근을 던지는 저의는 마지막 충성의 요구일까, 떠보려는 함정일까.
"형사부장 자리는 좀 작은데요. 전 여기가 좋은데."
창준의 눈썹이 삐딱하게 움직였다. 이 자리 주시죠. 시목이 가리킨 자리는 말할 것도 없이 창준의 옥좌다. 일순 눈빛이 싸늘해졌다. 입꼬리는 여전히 올리고 있지만 불쾌감에 눈은 웃고 있지 않다는 걸 안다.
"그래도 한 때는 반짝반짝한 줄 알았더니."
시목은 어깨가 긴장으로 굳는 것을 느낀다. 드디어 소파에 뉘인 몸을 사납게 일으켜 시목 앞으로 다가오는 창준의 몸체는 지닌 권력만큼이나 위협적이었다. 경쟁자들을 제치고 서부지검의 차장자리에 앉기까지 수많은 정치적 싸움을 거쳐온 관록은 겨우 평검사 하나쯤 파리쫓듯이 내치기도 쉽다. 그러니 시목도 순전히 도발이 목적이었다. 알아내기 위해서는 접근하고 거슬리고 그의 시야 내에서 알짱대는 게 제일이라 판단해서다. 감추고 싶은 것이 많을 상관은 무언가를 쥐고 있는 부하를 멀리 할 수 없기 마련이니.
황시목, 창준의 표정에서 희미한 웃음조차 사라진 것은 이제 변죽만 두드리던 대화가 본궤도에 올랐다는 신호와 같다.
"내 뒤 털어보려고 냄새맡는 중인 거 알아. 노골적이던데 아주. 목적이 뭐야, 정말로 이 자리 원하는 거 아니잖아."
굳이 보지 않으려 최대한 창준과 시선을 맞추는 중이었지만 여전히 그의 등 뒤에는 어둑한 안개가 날름대며 대기 중이었다. 창밖은 백주대낮에 천장등도 스위치 on이었지만 덕택에 차장실의 분위기는 겨울 초입의 해질녘처럼 가라앉아있다. 시목은 문득 전보다 한층 색이 짙어진 저주의 기색을 솔직하게 말할까, 잠시 고민하지만 내심 고개를 젓는다. 믿어주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알고 계신다면 얘기가 빠르겠네요. 범인 잡으려는 겁니다. 수사 협조해 주십시오."
"그게 날 캐고 다니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나는 범인을 놓아줄 사람이라는 얘긴가?"
2가지의 가능성을 내다봤다. 차장을 저주하는 사람이든지, 혹은 당신이 범인이든지.
"박무성이 피살되기 전에 어느 인물과 협박이 오갔던 정황이 있습니다. 이번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요. 누군지 아실테니 협조해 주신다면 차장님의 무고함도 같이 밝혀지겠죠."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는지 어처구니없다는 듯 창준이 허, 헛웃음을 쳤다.
"이미 결론 내려놓고 시작한 수사, 거기에 날 끼워맞추고 싶은 게 아니고?"
안개가 당신을 삼키려고 하니까. 불쑥 그렇게 던지고 싶은 충동이 대답을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시목은 창준을 직시하던 눈을 들어 허공으로 흩어지다 일렁이는 거무죽죽한 연기를 본다. 진실을 알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저 저주의 근원을 밝혀낸다면, 그리고 그 결과를 나는 감당할 자신이 있는가. 진실이 밝혀진다면-
"좀 더…나쁜 오해는 안받으시겠죠."
"………."
살짝 분위기가 변했다고 느낀 건 그 쯤이었던 것 같다. 창준의 일그러졌던 눈썹이 묘하게 누그러지고 날카롭게 받아치던 빈정거림 대신 내려앉는 침묵. 영하에 에어컨을 튼 양 냉소하던 눈빛에 스며드는 묘한 흔들림. 못들을 말이라도 들었나, 잠시간의 대치가 이어지고 이내 창준이 잠시 물러나는가 싶었다. 그리고 그대로 팔을 뻗어 시목의 두 어깨에 그 큼직한 두 손을 얹어올 때. 이게 무슨 초전개인지 예상치 못한 흐름에 시목은 주춤 발 둘 곳을 헤멘다.
"우리, 황검사"
창준이 잡은 어깨 위로 힘을 주자 속절없이 뒤로 뒤로 뒷걸음질치며 밀려난다. 걸려넘어질 걸 염려한다기보다 무력 동원은 이창준의 방식이 아니라서 당혹스럽다. 뭔가 그의 심기를 건드렸나.
"지킬이 되기 위해서 하이드는 어떻게 했어, 죽였어?"
쏟아지는 위압. 맹수의 으르렁거림. 그대로 잡고 의자에 내리꽂는다. 산제물처럼 밀려나 앉혀진 곳은 이창준의 옥좌 위다.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사뭇 짙어 표정이 잘 읽히지 않았다. 등 뒤에서 아니, 이제 창준과 시목을 휘돌아 감싸는 새까만 업보. 갑작스러운 태세전환에 밀려 창준이 던진 그 말이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어제의 방송내용을 뜻한다는 걸 시목은 뒤늦게 알아챘다. 방송 다 봤나보네. 너의 본색을 이만 드러내라는 듯 창준의 고개가 지나치게 가깝다. 몸에 불씨를 품고 다니는 것처럼 연기가 자욱했다.
'안보여.'
시목은 이 일련의 제스쳐로 창준이 제 수사협조 요청에 응낙하기로 했음을 알았다. 가까워지는 기색에 그대로 잠시 눈을 감았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그렇지만 지금의 적은 가까이에 있음에도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4.
귀찮은 일은 늘 간격을 두지 않고 몰아친다.
가고 싶지 않은 회식 자리에 강제 소환되는 것도 그렇다. 술자리도 무 자르듯 거절하는 게 일상이요, 혹여 장난처럼 건네는 맥주 한 캔도 내민 사람이 무안해지는 분위기 킬러. 황시목을 향한 형사3부 내의 인식이 그렇다. 그런데도 굳이 시목을 불렀고 이번만큼은 시목도 거절하지 못한다. 매스컴을 탄 일로 내려졌던 기수열외를 이 회식으로 철회하겠노라, 이러한 부장의 어심을 캐치 못할만큼 눈치가 멸종하진 않아서다. 지금까지 누려온 기수열외의 특혜가 대단히 아깝지만, 이를테면 간섭받지 않는 점심메뉴 선정같은, 부장의 뜻이 그러할진대 받들지 않을 수 없는 게 조직문화의 숙명이다.
물론 참여했다고 내리는 술잔마다 받들겠다는 뜻은 아닌지라 술자리 분위기가 싸해지는 것까진 시목이 고려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 시목의 태도를 형사3부야 얼추 알았지만, 타 부서 사람들이 알겠는가. 그냥 형사 3부끼리였어도 불편했을 자리, 하필이면 형사부 전체 회식 자리가 되면서 더 악재가 되었다.
"자 건배!!!"
시목은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투명한 액체로 차있는 제 술잔을 내려다본다. 왁자지껄한 잡담소리, 기름진 음식냄새가 진한 알콜향과 함께 훅 끼치자 머리가 지끈댔다. 미약하게 느껴지는 오한,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가락, 간헐적인 편두통. 이것만 추려봐도 제 컨디션이 최악임을 알겠다. 매스컴 일이 터지고 나서 신경을 곤두세울 일이 어디 한 둘이었나. 누적된 피로감이 이런 데서 한꺼번에 몰려왔다. 모인 인원이 많으니 귓가에 울리는 소음도 과하게 요란하고, 구석에서 안주나 뒤적대다 빠질 요량이었는데, 왠지 분위기가 그런 느슨함을 허용하지 않을 모양새다. 기수열외는 끝났어도 여전히 진행 중인 매스컴의 여파가 이런 지점에서 발목을 잡았다. 황프로 술잔이 아직 그대로네. 시목이 고개를 든다. 쏘아지는 시선이 따갑다.
-대대적으로 티비도 나오고 스타 다됐던데.
-사인도 해주고 그래?
-그렇게 카메라빨 받고 싶으면 연예인을 하지 왜 검사해?
웅성웅성, 노이즈로 가득차 뭉개진 소리가 쏟아졌다. 잠깐 어지럽다 싶더니 저를 둘러싼 인영들이 흐릿하게 번지고 곧 천지가 새까맣다. 연기. 거무죽죽한 안개. 이건 또 뭐…, 시목은 지금 제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 세상이 아닌 것처럼 캄캄했다. 내 앞에 앉은 게 누구였지. 있어야 할 사람들은 어디가고 눈코입만 뚫린 검은 마네킹이 앞뒤 좌우를 메운 채 웃고 있다. 이 새끼 완전 고문관이네.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늘어진 테이프 위를 긁어내듯이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고. 싸이코라며? 그런 새끼가 무슨 검사를 해. 척추 위로 끼쳐오는 소름에 시목은 그대로 거동이 굳고 만다. 너울대는 그림자의 환영. 이런, '그것'이었다. 악의가 형상화한 그림, 오로지 시목의 눈에만 보이는 저주의 아지랑이.
하필 지금 이게 또…, 아니 갑자기가 아닐 거다. 악의가 있는 곳이라면 그것은 얼마든지 따라붙고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이런 망령들은 더 기승을 부리니까. 이중에 이걸 달고 왔을 몇몇이 어딘가 있는 모양이다. 주변을 돌아보려던 시목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젓는다. 물먹은 솜처럼 팔이 무겁다. 지금 문제는 으슬으슬 떨리는 몸과 수월하지 않은 호흡에, 한없이 조여들고 있는 시야였다. 그런 걸 신경쓰기엔 지금은 너무 피곤했다. 황프로 뭐하고 있어.
파고드는 말소리에 시목은 퍼뜩 의식이 돌아왔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이가 소주병을 든 채 시목의 잔을 가리키고 있었다. 잔 비워, 나 팔 떨어져. 어느새 안개의 장막은 사라지고 다시 멀쩡한 세계에 앉아 있었다. 졸다 깨자 이상한 나라에서 돌아오게 된 앨리스처럼. 깨달으니 이미 잔이 한차례 돌았는지 다들 다음 차례인 시목만을 주시한다. 관자놀이가 띵하게 저려와 눈가를 구긴다. 어안이 벙벙할 일이지만 이를 터놓을 수도, 내색도 할 수 없다. 환상과 현실의 괴리에 혼자 오락가락할 바에야, 지금은 자리에서 일어나자고 판단할 뿐이다. 죄송합니다. 이 컨디션으론 잔을 드는 흉내조차 어려웠지만, 문제는 술기운이 잔뜩 올라 잔을 권하던 이의 심기는 크게 상했다는 점.
"이 새끼 은근히 사람 엿먹이네? 여기 팔 안보여?"
"아아, 얘가 원래 술을 잘 못해요, 흥분 가라앉히시고. 야 황프로 너 처음부터 못한다고 말씀드려야지."
이제서야 알았는데 시목의 옆에는 동재가 앉아있었다. 평소엔 고까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어도 이런 자리에서 소란이 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일단 수습을 하려들었다. 하지만 시목은 그런 상황 따위 안중에 두기엔 지금의 자리가 너무도 숨이 막힌다. 귓가에 째깍째깍대는 초침 소리가 분이 넘치게 울렸다. 이명의 전조증상인가. 황시목, 너 왜 그래. 건너편에서 강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자리는 안 돼, 나가야 해. 앞뒤를 잴 수가 없었다. 수근수근하던 자리가 이쪽을 돌아보며 떠들썩해졌다. 그리고,
"형사부를 여기서 다 보네."
거짓말처럼 상황을 종식시키는 음성이 들려왔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동재부터 벌떡 일어섰다. 몸이 무거운 시목은 눈보다 귀가 먼저 일했다. 동재만이 아니고 테이블 전체가 정신없이 기립했다. 보지 않고도 그 이유를 알았다. 제3의 인물이 나타났다. 요란하던 고함의 파도도 잠잠하게 만드는, 권력의 주인. 차장의 목소리.
보아하니 여의도로 갈 준비 중이라는 검사장을 위해 차장도 여기 안쪽에서 식사중이었던 모양이었다. 시목은 사람들을 따라 비틀대며 따라 일어났다. 회사 사람들 다니는 회식장소 거기서 거기라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었던 모양.
"미안하지만, 여기 술 안마신 사람 있나."
차장이, 창준이 마치 강당에 불러들인 부하들을 사찰하듯이 이 자리에 둘러싼 검사 일체를 훑어본다. 회식자리, 그것도 한창 달아오르고 있을 술자리에 술을 마시지 않았을 한 손에 꼽힐 정도고. 머리회전이 빠른 동재가, 마치 이때를 기다린 것처럼 제대로 서있기도 버거운 시목의 어깨를 잡아끈다. 여기요 차장님, 황프로는 술 안마셨습니다. 창준과 시목이 눈이 마주쳤다. 검은 안개의 주인. 한기가 몸을 덮친다.
"와서 운전 좀 부탁하지."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시목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우렁찬 배웅을 받는 창준의 뒤를 쫓았다. 회식 자리의 좋은 분위기를 냉각시키던 1등공신은 겨우겨우, 내일 뵙겠습니다, 인사를 두어번 주억거린 후에야 제 옷가지를 들고 자리를 빠져나간다. 뒤에서 혀차는 소리가 났지만 뒤돌아보지 않는다. 운전하기에는 간당간당하긴 해도 아무튼 이곳을 뜨는 것이 더 다행이었다. 운전하다가 사고가 난대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다. 바깥의 으슬한 공기가 뺨을 스치자마자 이마의 미열이 빠르게 식어내렸다. 혼곤했던 정신도 그나마 다시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따라나간 시목은 관용차 옆에 선 창준을 보고 눈을 깜박인다. 운전석에 이미 누군가 있었다.
"운전은 됐어, 타."
"예…?"
"어차피 가던 길이야."
여기서 입씨름 시키지 말고. 평소에 기사를 대동하던 창준이 어쩐 일인지 운전할 부하가 필요했을까, 그저 불러낼 구실에 불과했음을. 깨닫고 보니 까만 연기가 창준의 등 뒤에서 허공으로 구름처럼 날아올랐다. 아까 자신이 왜 속절없이 허상을 보았는지 시목은 얼추 납득한다. 창준이 같은 장소에 있었을 줄은. 그 망령들을 불러들인 목동은 차장이었나. 보통 상태라면 괜찮다고 입씨름 했겠지만, 지금은 이런 의심스러운 친절도 달가워져 순순히 창준의 차에 올라탔다. 야경의 불빛들이 창문으로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시목은 눈을 감고 호흡을 정돈한다. 어느 쪽도 말은 없었다.
구해준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은 조금 더 나중의 일이다.
*
겉으로는 한껏 원수의 모양새를 취했으나 뒤에서는 은밀한 내부자의 포지션을 갖췄다. 회사 동료들은 대개 시목과 창준의 사이에 대해 두가지 관점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영은수같은 경우엔 이 둘이 대적하는 사이라고 확신하고, 강부장같은 경우엔 시목이 혹여 창준의 라인을 타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이도저도 아닌, 제3의 관점을 지닌 서동재만이 이 둘의 심상치 않은 기류를 눈치챘다. 눈치도 빠르고 감도 좋은 동재는 이 상황이 제게 썩 좋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바라. 그가 상황의 타개를 위해 발품을 팔며 쿡쿡 찔러본 불쏘시개는 운 좋게 시목에게 불똥이 튀었다. 권민아 납치감금 및 상해사건에 대한 용의자로 황시목의 이름이 그 리스트에 오른 날, 창준은 벼락같이 시목의 사무실로 들이쳤다.
"칼 니가 휘둘렀니, 니가 여자 찔렀어?"
기세만으로는 따귀라도 내리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창준은 시목의 역추궁에 주춤대며 뒷걸음 쳤다. 한성설악리조트 1018호, 이것도 모르는 걸로 해드릴까요. 같은 엘레베이터에 올랐던, 슬릿이 들어간 까만 자켓을 망토처럼 걸쳤던 여성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좁고 가녀린 어깨와 매혹적인 굴곡의 다리. 닳고 닳은 남자라면 쉽게 혹할만한 외모. 박무성과 이창준, 이창준과 권민아, 권민아과 박무성. 돈-권력-여자. 어쩌면 창준의 등 뒤에서 아른대는 검은 연기의 근원일지도 모르는, 그림같은 부정부패의 3요소. 그러나 그보다도 시목 앞에서 신경질적으로, 전에 없이 사적인 감정을 터뜨리는 듯한 창준이 시목은 낯설다.
"아무 일 없었어."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어."
저 말이 사실일까?
이상하게 오르락 내리락대는 기분, 가슴 속의 벌레들이 움틀대는 것 같았다. 정말로 그가 결백하려면 애초에 문을 두드린 그녀를 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방에 들였지만 바로 내보냈다는 말을 믿어도 되는가? 시목은 제가 하고 있는 의심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바닥으로 푹푹 꺼지는 듯한 제 마음이 전례없어 혼란스럽다. 정말 창준이 화를 내는 이유는 제 위치가 흔들리는 걸 염려해서인가? 혹은 의심당하는 것이 불쾌해서인가. 아니면-,
제 여자가 찔린 일에 분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스멀스멀 시목의 뇌리를 비집고 들어온 의혹은 어느새 가슴에 뿌리를 내려 시목으로 하여금 창준을 몰아붙이게 한다. 감정이 격화되고, 서류더미들이 성대하게 시목의 뺨을 치고 흩날렸다.
"안죽였어."
잘라맺듯이 내려진 창준의 대답. 실례 범했습니다, 사죄드립니다. 시목이 허리를 숙였다. 조금만 더 캐면 닿을 것 같은 진실, 잡힐 듯한 아슬아슬함이 초조해져 '다소' 선을 넘었던 모양이다. 낯이 따갑긴 했으나 아프지는 않다. 김경사의 방문으로 둘의 면대는 끝이 났고, 창준은 그 방문을 예상한 바였는지 평소라면 들을 수 없을, 더 확실한 카드를 가져와 내 사람 데려가려면, 감동의 내 식구 감싸는 말을 남긴 뒤 자리를 떠났다. 폭풍 같은 해프닝이 소화되고 시목이 숨을 돌린다. 그러나, 창준이 '내가 그랬다'라고 대답했다면 더 세게 맞아도 기분은 나았을 거라는, 시목은 그런 알 수 없는 생각을 했다.
차장의 검은 안개를 잡기 위해 시작한 사건이 지지부진하게 생각지 않은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어긋난 것은 시목 자신의 동요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던 창준에게 왜 심장이 저릿하게 달아올랐다 내려앉았는지. 정말로 차장을 저주하는 상대를 알게 되면, 그 때 나는 무얼 하고 싶은 걸까.
5.
조짐은 서부지검 수장의 공석에 새 명패가 들어섰던 그날부터였다.
"축하드립니다, 이창준 검사장님!"
복도에 들이찬 긴장된 공기가 중앙에 선 한 남자에게로 집중되고 있었다. 요직에 오르기가 기상청 날씨맞추기보다 어렵다는 형사부 10년 만의 최대 아웃풋, 차장 이창준이 검사장에 오른 순간. 복도에 모인 모두가 허리를 90도로 숙이는 그 때에도 시목은 놓칠세라 끝까지 고개를 들어 망막 위에 새긴다. 검은 안개가 큰 날개의 형태가 되어 창준의 등 위로 펼쳐지는 광경은 경악스럽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했으므로.
정의, 야망, 탐욕, 죄악.
죄악이 또다시 짙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쯤되면 더 이상 제가 지금 매달린 이 수사가 소용이 있나 싶다. 날이 갈수록 크고 화려해지는 거무튀튀한 악의와 업보를 막을 수는 있나, 저 형태가 언젠가 정말로 그림 리퍼(Grim Reaper)의 모습이 되고 만다면 그 때는 정말 손 쓸 수가 없을 텐데. 선거 유세를 하듯 손을 내민 이들과 악수를 건네며 원을 도는 창준의 끝에 시목이 있었다. 평소 속내야 어떻건 창준이 의례상의 악수를 위해 내민 손에 끌려가듯이 시목의 손이 교차점을 찾아 합쳐진다. 시목의 어깨 위에 얹고 의자 위에 내리 눌렀던 그 손. 당시 창준이 무게를 담아 시목에게 억누른 것처럼 새하얗게 질릴만큼 시목의 거센 악력이 화답으로 돌아왔다. 반경 외 행동에 창준이 시목을 쏘아보듯 내려보면서 둘은 퍽 오래 시선을 마주친다. 아주 잠깐 동안 세계가 멈췄다고 생각할 만큼, 그 순간 눈과 눈으로 주고 받은 것에 대해 시목은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가 어려워 머리가 복잡해졌다.
"축하드립니다, 검사장님."
또다른 축하인사가 밀집한 인파를 뚫고, 그들의 세계를 갈랐다. 맞잡은 손을 향해 윤과장의 시선이 머무를 즈음에 창준이 불에 덴 것처럼 손을 놓았다. 강부장에게 윤과장의 소개를 듣느라 고개를 돌린 창준을 시목은 그가 사람들을 해산시키고 그 침침한 날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악수하고 떨어진 손이 타는 것 같아 제 손을 매만지던 시목은 뒤늦게 확인한 휴대폰 문자에 창준의 문자가 와있음을 확인했다.
[퇴근 전에 내 방으로 와]
더이상 '그의 방'은 차장실이 아니다. 창준이 자신을 부르는 이유를 대강은 알 것 같았다. 그날 밤 창준의 방으로 올라간 시목은 꽤 오랫동안 그곳에서 나오지 않는다.
*
그어둔 선을 넘기는 어렵지만, 한 번 넘어간 후부터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시목은 그 후로 꽤 빈번하게 창준의 방을 드나들게 된다. 단순히 업무 결재를 위해서도 있지만 불온한 사유도 분명히 존재했다. 창준의 그림자를 감시한다는 명목이 어느새 뒤집히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시목 자신도 스스로의 감정에 답을 내리지 못한다. 사건 수사는 진척 대신 여전히 제자리걸음이고 안개는 나날이 농도와 밀도를 채워가고 있는데, 단 둘이 있을 때만큼은 묘하게 온기 있게 구는 창준에게 시목은 파도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모래성의 기분을 체험했다.
밤늦게까지 일하는 시목이 책상에 엎드려 눈 붙였다 뜨자 정체불명의 자켓이 등 위에 걸쳐져 있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자켓에서 나는 향수 냄새에 안도하는 자신이라든지. 회사로 출근하다 우연히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치면 괜히 손끝이 차가워진다든지. 간혹 걸어서도 퇴근할 수 있는 길을 태워다 주겠다며 차문을 열어줄 때면. 진심으로 그걸 진심이길 바라는 제 자신이 초라해지는 감상도 익숙하지 않다.
그 즈음에는 유독 기한이 얼마 남지 않는 사건들이 줄줄이 사탕이었다. 집에 옷만 갈아입으러 들렀다 다시 출근하기를 1주일 넘게 반복하고 있었다. 사건이라는 게 사정을 봐주고 일정한 간격을 지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보니 시목의 주변 동료들도 대개 사정은 비슷했다. 박무성으로 촉발된 사건은 나아갈 듯 말듯 애매한 원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거에만 매달리려고 다른 일거리들을 내팽개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창준은 며칠동안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는데 주말이 지나면 복귀라고 하기에 시목은 대면보고해야 할 서류들을 정리한다. 창준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이 영 효율이 나빴다. 혹시 나는, 만남을 기다리고 있나. 정신 차리려고 마셨던 여러 잔 들이켰던 커피가 좋지 않은 곳을 스쳤는지 헛구역질을 했다.
'제대로 먹고는 다니는 거야?'
시목이 술을 먹지 않는 걸 알면서도 해장국이나 하라며 답잖게 2만원을 꺼내 주머니에 찔러넣던 남자가 쓸데없이 다시 떠오르고 말았다. 의도가 뭐였든 언행이 권위적이고 밥맛없는 바람에 좋은 일 하고도 진정성을 의심받을 타입이었다. 이창준. 생각만으로 무력해져. 이래선 안되는 거였다. 그 때, 접었다고 생각한 마음이 다시 고개를 들지 않아야 했는데. 다시 헛구역질이 났다. 전에 고질병으로 병원에 들렀을 때 역류성 식도염 기운이 있으니 카페인을 먹지 말라 했던 게 기어이 몸이 고단해져야 떠오른다. 토하더라도 직장보단 집이 낫겠지. 보던 서류를 싸서 퇴근을 준비했다.
부랴부랴 주차장으로 내려왔는데, 차키를 쥐려던 손으로 다시 욱하고 올라는 헛구역질을 막는다. 생각보다 상태가 좋지 않았던 모양인데, 머리도 어지럼증이 도는 것이 그저 역류성 질환 이상으로 뭐가 더 얹힌 게 아닌가 싶어졌다. 혹시 이명이 오는 중인가?, 반갑지 않은 추론을 하는 순간에 뒤에서 빠앙-하는 클랙션이 울렸다. 뒤에 헤드라이트를 킨 차체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땐 이미 늦었다.
"황시목!!"
날아갈 듯 밀쳐졌다. 아니 정확히는 어깨를 끌어당겨졌다. 외부의 힘에 의해 거세게 끌려간 곳은 누군가의 품 안이었다. 하아, 하아…하…하아. 바닥을 향해 숨을 몰아쉬며 드라마틱하게 안착한 품 속에 정신없이 머리를 묻는다. 거기가 누구의 품인지, 누구의 손에 끌려 안겼는지 같은 건 생각할 겨를 없이 그저 어깨를 잡은 손이 안정감을 주더라는 것과 그 품이 안락하더라는 것, 그것 하나에 숨을 가다듬었다. 호흡이 진정될 때까지 등을 두드리던 상대를 향해서 뒤늦게 눈을 들자, 원래라면 출장 가서 이곳에 없어야 할 인물이라는 것도 머리가 하얘져서 바로 인지하지 못했다.
"검사장…니ㅁ?, 오늘…여기…어떻게?"
"황시목, 자기 발밑을 조심해야지. 처음도 아닌데."
평소라면 막힘없이 나왔을 문장이 놀란 마음에 띄엄띄엄 잘라먹혀 나왔다. 그 넘긴 앞머리 어디에 감지안테나라도 있나? 어떻게 저도 예상할 수 없는 위기마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나타나서. 평소보다도 엄격한 목소리의 창준이 감싸안은 시목의 어깨를 더 품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너, 피곤하면 아파서 쓰러질 때 있잖아."
그 말이, 이미 사라진 뇌섬엽 어디에선가 도난방지경보를 시끄럽게 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제게 이명이 있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단 한 번도 회사사람들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수술의 후유증으로 겪는 고질병이 이따금 몸에 과부하가 걸릴 때 폭탄처럼 터져버린다는 걸. 시목은 이상하게도 아파트 융자빚이 남산타워만한 것보다 이명에 쓰러진다는 걸 들킨 것이, 더 깊고 내밀한 치부가 폭로당한 기분이 된다. 이렇게까지 파악당했다면야 검은 안개가 나날이 그의 숨통을 조여오고 그가 그런 꼴을 당해 마땅한 작자라 해도 타인의 품에 보호 하에서 아예 몸을 맡기고 싶은 마음을 감히 희구해도 되는 것인지.
창준이 시목을 내려다본다. 역광이 안경 속 눈동자를 가렸지만, 이대로 까무룩 잠든다 해도 창준이 이 냉골에 저를 내치지 않을 거란 좁쌀만한 확신을 가졌다. 창준의 시선이 시목을 통과한 그 너머를 관통하는 감각 아래 가라앉는 눈꺼풀에 굴복하며 문득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해본다. 검사장님…, 혹시 정말 헛된 가정이지만,
이 사람도 보이는 게 아닐까.
나처럼. 웅얼대는 말을 끝으로 퓨즈가 꺼지듯 의식이 가라앉았다.
6.
알아내기 위해서 다가섰다. 이창준이 죽을 죄를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법에 심판받아야 한다. 그가 죽기를 원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잘 모른다. 하루가 다르게 더 짙어져만 가는 안개를 걷어내고 싶었던 것은 그냥 그렇게 두면 안 될 거 같아서. 검사라면 마땅히. 동백아가씨 노래가 울려퍼지는 법정에서의 그라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거라고.
근 2개월 동안 연거푸 이어진 사건의 실마리를 쫓고 엮은 끝에야 도달한 진실을, 그 정체를, 겨우 무너져가는 폐공사장에서 마주하게 될 줄이야.
*
"시목아."
"볼 수 있었습니까?, 다 알고 있었던 겁니까?"
창준이 묘하게 측은한 표정을 짓는다. 가엾은 짐승을 보는 듯한 시선, 그걸로 시목은 제 혼자만의 심증이 사실이 되었음을 알았다.
"그래, 알았어."
"언제부터였습니까?"
"…네가 서부지검에 왔을 때부터."
너는 몰랐겠지만. 원래 남에 건 잘 보여도 자기 뒤에 있는 그림자는 제 눈에 안보여. 원래 그런 거야.
잠시 말을 잃은 시목 앞에서 창준은 제 몸을 둘러싼 안개를 명백히 보고 인식하고 있었다. 더구나 시목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죽음의 그림자가 창준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도.
"나도 어릴 때부터 이런 것들이 보였지. 머리 크고부터는 안보이는 척 하고 살았지만."
사랑하는 사람 뒤에 어린 강렬한 악의를 보고부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결혼하기 전부터 연재에게 그런 것이 어른대는 것을 보았고 그대로 냅둘 수 없었기에 알면서 결혼했다.
"그러다 알았지, 연재를 구할 수 있는 방법. 그건…나한테 옮기는 거였어. 아예 없던 걸로 만들진 못하지만 옮기는 건 가능하더군."
내 실착은 연재를 향해진 악의를 걷어내려고 시작한 일이, 인과를 건드려 영장관님에게 해를 끼치는 방향으로 틀어지게 됐다는 거였다. 그 분이 그렇게 무너지게 만든 나를 용서할 수가 없어서 그 저주를 나 자신한테 옮기기로 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저 안개의 근원인 이 부패한 시스템에 칼을 대고 가야겠다고. 몇가지 계획을 세워서 박무성의 피해자였던 윤과장이 협력해주는 대신 윤과장의 죄값을 내가 짊어졌지. 마지막으로 진상을 파헤쳐줄 사람은 네가 적임이라고 판단해서 불렀던 거야. 그런데 너를 다시 만난 날에.
"네 뒤에서도 똑같이 널 삼키려는 검은 안개를 봤어."
시목은 그제서야 언뜻언뜻 그러려니하고 지나쳤던 연결고리가 이어졌음을 알았다. 뜬금없이 운전을 하라고 불러냈던 그 날의 회식 때도 이명의 전조를 느낀 이유는, 창준이 아닌 제 자신 뒤에 있는 안개에 휩쓸리고 있었던 거였다. 퇴근하려다 주차장에서 피로에 지쳐 쓰러졌을 때도 그는 예측하고 찾아왔으며 그게 보였던 것이다, 시목의 목을 조르려하는 그림자를. 왜 남에게 있는 것이라면 나한테도 있을 수 있단 걸 깨닫지 못했지. '자기 발밑을 조심하라'는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이제서야. 누구나 사람은, 특히 검사라면 누군가의 저주 정도야 숙명이지. 하지만 너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하고. 그래서 내 맘대로 결정했어.
"어차피 지고 갈 업보라면 네 거 하나쯤 더 가져가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고."
창준이 개운하게 내뱉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극악한 만행을 저지하기까지 시목은 너무나 시간이 촉박했다. 어떤 마법으로 창준이 시목의 안개를 제 그림자 속에 품어안았는지 모르겠다. 다만 그 순간 거짓말처럼 안개의 형태가 전례없이 흉폭하고 잔인한 모양으로 바뀌는 것으로 그 최악의 상황이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잠깐만요, 선배님. 시목은 세상의 모든 어둠을 끌어안은 안개가 사신의 형상이 되어 천천히 낫을 휘두르는 것을 보았다. 너는 살아야지.
"더 좋은 세상을 위해서."
안 돼. 그때 창준은 웃고 있었을까. 웃고 있었던 기분이 든다. 시목은 가슴에서 풍선 같은 것이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 소리가 풍선이 되어 터졌던가. 목에서 끓어오르는 피맛이 눈가에서 떨어지는 것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자리로 내달려 옷깃이라도 붙잡았지만, 그가 원하고 계획했던 예정대로.
이창준은 죽었다.
7.
죄라는 것은 덜어진다고 덜어지는 것인가. 누가 대신 지고 간다고 없어지는 것인가. 그렇다면 내 마음은 덜어진 만큼 가벼워야 맞지 않나. 당신의 설계대로라면 그래야 했는데.
시목은 창준의 장례식이 진행되는 먼발치에서 창백한 얼굴로 무너지는 이연재의 모습을 본다. 정반대의 기로에 있었지만 그 부부는 서로에게 진심이었던 것 같다. 이창준이 이 광경을 보고 있다면 응당 대답을 돌려줬으면 한다. 그녀가 지금 당신이 대신 가져간 업보대신 행복을 누리는 걸로 보입니까?
자신을 향한 악의를 가져간 자리에 터무니없는 부채감이 들이찼다. 이미 대출이자만으로도 허리가 휘어지는데 죄책감은 이미 한도초과였다. 그에 대한 상실감과 배신감은 계산의 영역을 넘어섰다. 기대를 알고 믿음을 알고 설레임을 알고, 그리고 한순간에 잃고 나니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감정이 존재했었음을 알겠다. 혼자 채워가고 있던 마음이 방향을 잃고 갈 곳을 잃어 내 자신의 죄의 무게로 돌아온다. 어차피 내 죄를 영원히 대신 질 수 없다면, 결국 다시 생겨날 죄업이라면. 이렇게 얄팍하게 덜어가버릴 거라면 차라리 아예 가져가지나 말았어야 하는 것을.
무게가 가벼워지기는커녕 곱절로 불어나는 고통이 시목의 숨통을 내리누른다. 숨이, 막혀. 인지하자마자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화이트 아웃. 황시목이 쓰러진다.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그가 대신 지고 간 죄의 대가를 헛되이 쓰지 않기 위해 새로운 생에 감사하며 바르고 성실한 하루에 매진하는 것이 맞는가. 앞으로 주어진 나날들에 충실하게 임하는 것이 그가 원하는 모습인가?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 모르겠으나 시목은 납득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 모든 것을 없었던 것처럼 잊고 새시작을 하기엔 그 부담감이 너무나 잔인한 탓이다. 내 죄의 한줌 더해 그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라면. 그가 가벼운 동정심으로 내 죄를 덜기를 원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제 큰 청사진을 그리려던 설계의 일부였는지 짐작하기엔 과분하고 묻기에는 대답을 들을 수 없음에.
'천국의 자리에게 돌아간 제 형제에게
영원한 빛과 평화를 내려주시고
남아있는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소서'
창준의 장례식에서 그를 위해 읊어진 기도문이었다.
이중엔 그 어느 것도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었기에, 참으로 얄궂은 기도문이었다.
8.
남해로 달리는 도로는 한적했다. 서부지검을 떠나고 싶어 신청한 전근 신청이 1달이나 걸려 받아들여진 게 바로 어제다. 아쉬워하는 실무관 일행을 뒤로 하고 시목은 간단한 짐만 얹어 운전대를 잡았다. 그 기간동안 세간은 한조 그룹의 사위, 서부지검의 검사장이던 이창준의 죽음을 두고 한동안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저주와 악령 따위 볼 수 있는 사람은 창준과 시목 뿐이었으니 창준이 무엇에 의해 어떤 경위로 사망했는지 법의학팀에서도 수수께끼로 남았다. 그 자리에서 죽음을 지켜본 사람은 시목 뿐이라 수사검사이면서 동시에 참고인으로 시목은 여러차례 소환될 수밖에 없었다. 혹은 시목이 용의자가 아니냐는 시선도 있었지만 시목에게서도 어떤 살해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시목이 달리는 도로 어딘가에도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희끗한 형체들은 토템처럼 곳곳에 보였다. 그러고보니 문득 처음으로 그와 나눈 이야기 중에 귀신을 보는 경험만은 나누어보지 못한 게 아쉽다는 생각을 한다. 오랫동안 비정상으로 취급당할까 삼키고 있었던 말들, 창준 역시 시목과 같은 체질이었음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창준과의 짧고 굵은 시간들 사이에 보다 공감대를 가질 만 한게 있었을 거라고. 하지만 이젠 무용해져버린 바람이었다. 묵직해지는 눈꺼풀에 열이 몰리는 거 같아 시목은 가만히 손을 들어 눈두덩이를 누른다. 그 때에 일어난 일이다.
깊고 둥글게 휘는 분기점에서 코너로 꺾어드는 즉시 커다란 덤프트럭이 시야에 담기기도 전에 시목의 눈앞으로 우직하게 쏟아졌다.
꽈과아ㅏㅏㅏ앙
들이받힌 대로 시목의 차는 솟구쳐 올랐다 공중제비를 돌며 처참하게 추락한다.
은박지처럼 구겨져있었다. 5톤 트럭과 일반 승용차의 충돌에서 승용차의 운전석이 무사하기란 신념 하나만으로 세상과 싸워 이기기보다 어려운 법이다. 이마 위와 눈가까지 덮은 피가 하릴없이 바닥으로 흐르는 것을, 시목은 멍하니 바닥에 뒹군 채 응시하고 있다. 고이고 고인 핏물이 모여 웅덩이를 이룰 때쯤 구급차 소리대신 한조건설의 트럭인 걸 알게 해선 안된다는, 먼 곳에서의 말소리가 축음기에 흐르는 음악처럼 토막토막 들려온다. 구조는커녕 운명이 멀지 않은 걸 안 시목의 초점이 흐릿해졌다. 찌그러진 차체가 시목을 짓누르고 신체의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빠르게 잃어가는 의식은 그럼에도 꿋꿋하게, 제 마지막 힘을 다해 제 앞으로 걸어오는 검은 형체를 기어이 포착하고 만다. 어쩌면 시목이 가장 기대했을 그 순간을. 정말로,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습니까? 시목은 들리지 않을 소리를 내어 묻는다.
저를 구한다면서 냉큼 가버렸는데 결국 보람도 없이 사망하는 시목을 데리러 오는 창준의 표정이란. 너무나 유쾌해서 시목은 활짝 웃었다.
나는 이렇게 될 줄 알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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