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8월 12일
- 3분 분량
논커플링, 이연재 & 서동재
<재앙은 한 잔부터>
이사계 (트위터 @_BlAck_Tongue)
유독 흐린 날이었다. 꿉꿉한 하늘에서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비는 오지 않았다. 해가 늦게 떠오르고 일찍 저무는 것만 같은 착각만 남았다. 바람을 쐬러 나온 연재는 상복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을 버텨낼 수 없었다. 우느라 불어터진 얼굴로 찬 바람을 맞을까 했더니, 몸만 움츠러들었다. 들어가 몸을 녹일 수도 있었으나 향냄새라면 신물이 났으므로,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몸을 녹일 셈이었다. 부산스러운 사람 냄새를 참아내고 자동차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의 구둣발이 주차장 바닥과 마찰하여 삐그덕거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음을 만들어냈다. 구둣발에 눈이 멀어있을 때 말을 걸었다. 다른 사람들이 수천 번을 불렀을 호칭에 맥빠지게 당황한 것은 처음이었다. 사모님이라고? 연재를 사모로 만든 당신의 상사는 내일 한 줌 재가 될 것이었다. 연재는 입을 꾹 다물 수 없어 주먹을 꾹 쥐었다. 서 검사님... 오셨네요? 창준의 장례식에 검사직의 누구도 방문하지 않았고, 않을 거는 예상이 깨졌다. 예상치 못한 것도 아니었다. 개 버릇 남 못 주는구나. 연재는 억지로라도 웃었다.
황 검사는 창준 씨 조사 때문에 못 오시고, 검사장님은 범죄자 장례식엔 못 간다고 하셨을 텐데 서 검사님은 오셨네요. 기뻐라…
차장 검사 시절부터 알던 식구가 아니냐며 변명하기 급급한 모습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몸이 바르르 떨렸다. 지하 주차장까지 찬 공기가 들어온 걸 보니, 정말 겨울이 오는구나 싶었다. 동재의 급급한 말들을 흘렸다. 듣는 체하다 문장 사이 말이 길어질 때를 파고들었다. 나 추워서 들어온 건데, 차에 들어가서 이야기할래요?
*
야, 너 빨리 들어와서 서 검사 좀 잡아라.
모름지기 벼슬에 오른 인간들은, 하나같이 잡아줄 사람이 없으면 날뛴다 했다. 서동재 검사가 딱 그러한 사람이었다. 목숨 줄 살아났다고 높으신 양반들께 굽신대는 꼴이라니, 서부지검에 서 검사의 패악질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서동재 검사 사무실에 근무하는 김 씨는 이골이 날 지경이었다. 서 검사의 개인적인 비리야 알 바 아니지만, 업무 지시 내용이 문제였다. 김 씨가 정리한 자료는 피고 한 사람만을 표적 삼아 물어뜯는 방식이었다. 이래도 되나? 물음을 스스로 던져봤자 직장 유지를 위한 합리화만 계속될 뿐이었다. 김 씨가 사무실 옆자리 직원에게 서 검사님이요… 하고 운을 뗄 때였다. 빠른 보폭으로 들어와 정장 재킷을 입고 서둘러 나갔다. 나가는 와중에도 어찌나 알뜰히 업무지시를 내리는지 정신이 빨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반복되는 단어는 특검과 한조그룹, 김 씨는 곧장 앉아 정리를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해도 서 검사가 듣고 있을 것만 같은 서늘함에 몸서리쳤다. 아까 무슨 말 하려 했느냐는 말에 아니에요. 말은요… 로맺어졌다.
동재는 보폭 넓게 걸었다.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지금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나 아직 회장 아닌데? 동재 씨가 더 잘 알잖아. 말소리가 들렸다. 동재는 네 사모님,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아무 말도 연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도착해서 전화해요. 전화가 끊겼다. 급할 일도 아닌데 조급해져 사이드브레이크 푸는 것도 까먹었다. 도로 갓길에 비상등을 켜고 멈췄다. 못된 짓을 저지르러 가기 위한 준비가 필요했다.
*
이연재의 회장 취임식이 시작됐다. 그룹 명성답게 성대하다. 샴페인 든 술잔을 손에 끼고 웃는 사람들 사이에 연재는 없었다. 이 자리는 연재를 위한 자리이나 연재를 필요로 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연재는 잠시 얼굴을 비추고 사라지는 존재였다. 연재는 회장실에서 업무를 끼적거렸다. 취임식장에서 가져온 샴페인 잔이 연재의 팔꿈치 옆에서 넘실거렸다. 비서실을 통해 온 연락, 이윽고 그의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축하드린다는 뻔한 인사와 선물, 정말이지 뻔한 사람이었다. 그런 주제에 표정에 불안을 감추지 못한다니… 연재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서 검사님, 내가 이거 받으면 돌이킬 수 없어요. 아시죠?
두려운 얼굴을 하는 주제에 전부 알고 왔다고 말했다. 연재의 옆 팔꿈치로 툭 치면 엎어질 샴페인 잔을 들었다. 여기 온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는 거 아니냐며 샴페인을 삼켰다. 반도 남지 않은 샴페인을 다시 건넸다. 연재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서 검사님이 가져오신 거 와인이죠? 나는 그걸로 해야겠다. … 따라줄래요? 두 모금 남짓한 샴페인이 와인으로 충혈되어갔다. 어떤 지향점을 찾고 있는지, 어떤 곳에 등쳐먹다 돌아왔는지, 왜 공범이 되기로 했는지. 연재는 묻지 않았다. 와인을 삼킬수록 코끝이 아렸다.
동재의 목숨줄을 쥐고 흔들면서, 그가 건넨 술 한 잔을 온전히 삼키지 못했다. 당신은 남몰래 건네받은 술잔의 공범,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다.
어디까지 삼킬래요, 서 검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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