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8월 13일
- 10분 분량
여진시목
<여름의 식사시간 上>
황장국 (트위터 @gongdukhaejang)
<유자민트, 아메리카노, 추어튀김>
나와 시목은 친구다. 일로 만났다가 선을 넘어버린 사이다. 시목은 예리한 눈매와 단정한 이마를 가진 남자로 늘 조용하고 바빴다. 나도 바쁘기론 뒤지지 않는다. 일로나 사람으로나 시간이 남아나질 않는데도 시목이 부르면 열에 여덟은 꼬박꼬박 만나줬으니 그도 이 특별 대우를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물론 진심으로 그런 고마움을 기대하진 않았다. 내가 그를 각별히 여기는 것이 들통난다면 시목이 놀란 길고양이처럼 울타리 밑에 숨어버릴 것 같아서 그가 편하게 머무는 거리는 애써 좁히려 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린 제법 자주 서로를 불러내고 서로에게 불려나갔다. 일로 만났다가 마음이 잘 통해서 친구가 된 사이의 거리. 2미터는 안 되지만 1미터보다 긴 정도.
우리는 유동인구가 많은 지하철역 근처 카페에 앉아 친구의 만남 시간을 가지고 있다.
다섯시 경 빠른 퇴근을 하고 밥을 먹기 위해 만났는데 그가 돌연 속이 좋지 않다고 한 것이다. 그럼 집에 일찍 가시겠냐고 물으니 그러기는 싫어해서 카페에 앉았다. 내심 고마웠다. 여름 해도 길어졌고 느긋한 오후를 감상할 여유를 그와 함께 만끽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나는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시목은 유자민트차를 홀짝이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는 커피를 두모금 마시고 목을 가다듬었다.
“검사님, 어제 내 꿈에 용이 나왔거든요.” “용이요?” “어, 용. 드래곤. 검사님도 나왔어.”
어지간해선 나의 말에 동요하지 않는 시목이 뜬금없다는 듯 눈을 찌푸리며 나를 돌아본다. 그 얼굴이 귀여워서 웃을 뻔 했다. 시목은 계속 해보라는 얼굴로 차를 마신다.
“용 엄청 컸어요, 막 비늘도 부리부리하고… 정확한 시간대는 모르겠는데 야밤이었거든요. 내가 혼자 여행을 간건지 혼자 해변가를 걷고 있었는데 바다에서 용 한마리가 천둥소리를 내면서 나오는거야. 번개도 꽈광 치고.” “네.” “난 무서워서 소리도 못지르고 뒷걸음질을 하고 있었어. 놀라서“히익-!!”소리 내고. 근데 해수욕장에 심어놓은 나무들 있잖아 그 사이에서 뜬금없이 검사님이 튀어나오는거야. 나를 지켜줄 것 처럼 용을 엄청 재수없게 노려보면서.” “내가 뭘 또 재수 없게 노려봐요,” “왜요, 검사님 그런거 잘 하잖아. 암튼 그랬거든?” “그래서요.”
황시목은 기도 안 차고 흥미도 완전히 떨어진 듯, 제 머그잔에 걸쳐진 티백을 슬슬 흔들며 창밖을 계속 응시했다.
“별일 안 일어났어. 용이 검사님을 잡아먹었어. 추어튀김같이 아삭바삭하게.”
일부러 아삭바삭에 정확한 발음을 살리고 통쾌한 미소를 지었다. 시목은 한쪽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고 대꾸 없이 차를 마신다. 창문 너머에서는 각자의 핸드폰에 열성적으로 집중하는 여름 옷차림 직장인들이 빠른 걸음으로 제각기 근무지에서 벗어나고 있다. 유행하는 대중가요가 카페 안에 울려퍼진다. 모든 것에 두근두근하고 나는 그저 당신을 숨길 수 없이 좋아한다는 가사가 달큰 쌉쌀한 유자민트와 아메리카노 향에 섞여서 우리 사이를 배회했다. 그러고보니 시목은 나와 함께 있을 땐 핸드폰을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름의 예의가 아닐까? 아무 생각 없는 행동일 수 있지만 시목이 남에게 하지 않는 행동을 나에게 해 주거나 반대의 경우마다 내 마음엔 적립금처럼 포인트가 쌓여갔다. 시목이 입을 열었다.
“추어탕 드실래요?”
나는 놀라서 잔에서 입을 떼고 그를 돌아보았다. 황검사 치고는 너무 웃긴 발상이었다.
“그래요! 그럼 추어튀김도 먹자!”
그는 반응이 없었지만 나와 한동안 눈을 마주치고 살그머니 웃었다.
카페에서 나온 우리는 근처로 가서 추어탕 두개와 추어튀김 하나를 놓고 앉아 날씨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황검사는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귀가했다. 나는 그의 차 뒤꽁무니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 오는 길에 복숭아를 샀다.
황시목과 나는, 친구다. 다른 이는 우리를 이미 친구로 알고 있지만 우리가 서로를 공식적으로 ‘친구’자리에 배치해준 건 최근이었다. 나는 그동안 시목이 날 이유없이 불러내고 먼저 전화와 카톡을 해주는 ‘친구 대우'에 익숙해지다가 계절을 한번씩 써버렸다. 문제도 답도 정확하지 않은 황시목 친구 적성능력평가를 나도 모르게 통과하니 기분은 좋았으나 친구가 무엇인지도 모를 황시목이기에 내심 의문이 많았다. 어찌되었든 그가 나를 친구라고 불러주었으니 나는 그에게로 가서 친구가 되었다. 반년 전 쯤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던 시목이 나를 당신의 친구로 명했다. “내가 친구로 통과된거에요?” “네.” 황당해진 마음으로 연거푸 소주 넉잔을 털어넣자 바람처럼 웃음이 나왔다.“와… 경대 붙었을 때 보다 기쁘다.” 추위가 잦아들은 어느 겨울밤이었다.
그러니 내가 황시목 검사를 좋아한단 걸 깨달은 것도 오래되지 않았다. 소주가 반은 달고 반은 쓸쓸하더니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걸까.
솔직히, 나는 누구나 황시목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정을 붙일 구석이 없는 사람이지만 나름대로 인연을 모으는 힘이 있었고 그 점은 다들 인정하는 바였다. 잘생겼고 틀린 행동을 안하니 늘 사람에 둘러싸여 있는 기묘한 인물. 나만큼이나 좋아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으리라 믿었다. 나보다 그를 더 각별하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기도 했다. 그런데 눈을 씻고 보아도 나 뿐이었다. 내가 유난히 시목을 아끼고 보통보다 조금 많이 그를 생각했다. 사실이 눈 앞에 다가온 순간 맥이 풀리고 더이상 나에게 변명할 수 없어졌다.
“진정해 한여진. 이건 친구를 떠올리는 자세가 아니야,”
엄히 타일러도 들은 척 않는 마음. 낮은 열에 기대어 놓은 마시멜로우처럼 뜨겁고 달콤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복숭아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계단을 오르면서 시목에게도 나눠주자 생각했다.
<복숭아>
유례없이 찾아온 금요일 아침 샤워를 하고 미리 잘라놓은 복숭아 한 입을 베어물었다. 양 볼에서 촉촉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오늘 저녁에도 그제와 같이 황시목을 만난다. 일주일의 반을 황시목과 함께 했다. 자주 만나는 가까운 사람을 짝사랑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로 이한 고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안이 그러하니 나도 잠자코 기대감을 얼려 둘 수 없다.
복숭아를 먹는 아침에 나의 오래된 친구A와 전화를 했다. 상사 얘기 어제 먹은 평양냉면 얘기를 늘어놓던 중 여지없이 시목 이야기가 나왔다. A는 나의 속사정을 아는 사람답게 은근한 질문을 던져서 끝없이 속을 간지럽혔다.
“벌써 세번째야? 그냥 사귀자고 해라. 너 일부러 니가 불러내는거지?” “그렇긴 한데 검사님도 일주일에 두번은 불러내.”
담담하게 서서 복숭아를 주워먹던 나는 문득 억울해졌다.
“와, 야. 이렇게 자주 보는데 정이 안 들고 배겨? 그럼 이쯤 알아서 정들어줄 만도 하잖아. 이미 정 든거 아니야? 황시목 괜히 얼굴까지 반반해가지고,”
에이씨, 나도 나름 한여진인데. 우물거리니 입 근처에 과즙이 한줄기 흘러 손등으로 쓱 훔쳤다. 짝다리를 짚은 채 아직 촉촉한 맨발로 톡톡 바닥을 찬다. 그래, 그래, 반반한 것들 끼리 잘 논다…라고 A가 읊조렸다.
“만나서 뭐해? 밥먹고 커피마시다가 집에 가는게 대부분 아니었나.” “맞아. 그래서 이쯤 되니까 지루해져. 사귀지도 않는데 권태기 온 연인사이같다고.”
비유를 해놓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걸 아는지 친구는 허탈한듯 한심한듯 한숨을 쉬었다. 전화 너머로 A의 고양이가 왜옹 왜옹 울어댄다.
“들이대는건 좋은데 의심하기 시작하면 어떡할거야? 친구사이에 다 이러냐고 물어보면 할 말 없잖아.” “그땐… 우리가 친구예요? 하면 되지!” “말은 쉽지.”
그래, 말은 쉽지. 오늘도 말없이 복숭아만 줄 거면서.
“복숭아만 주지 말고 집까지 들어가서 같이 먹어.” “집 까진 안가.” “이대로만 평생을 맴돌게? 집에도 가. 연애 얘기도 한번 해보고 말야.” “아이 그건 아니다. 상대는 황시목인데?” “아무튼! 잘 관찰하고, 틈이 보이면 파고들어가. 알았어?”
뜸을 들이다 배시시 웃어버렸다. 과즙이 묻은 접시를 씻었다. 손바닥에 고이는 차가운 물도 따끈하게 느껴졌다.
복숭아는 퇴근후 가지고 나올 요량으로 보관해놓고 집을 박차고 나왔다. 오전 내내 손에 잡히지 않는 일을 붙들고 책상머리에 있는 동안 친구와의 대화가 귓전을 때리고 심장을 쿡쿡 찔렀다. 그래 친구의 말대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 집에 가고 연애 이야기를 감히 꺼내고 우리가 정말 친구인지 의심하게 만들고. 선을 넘어 거리를 좁히고 싶은 마음이 없을 수가 없는 나지만 조금이라도 실행하려는 순간 덜컥 말문이 막히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눈을 감고 마음 속의 마시멜로우를 저글링하면서 통-통- 하늘로 튀겼다. 하얗고 작은 것들이 야구공처럼 날아다녔다.
그럭저럭 일하고 여섯시가 되자 몸을 날려 신속히 귀가했다. 샤워를 하고 길다란 데님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올려 묶었다. 복숭아를 미리 접은 박스에 담아 내려와 일곱시 반 경 약속시간에 맞춰 황검사의 아파트 현관 앞에 도착했다. 차를 세우고, 놀이터의 여름 저녁 풍경을 보면서 멀뚱대자 등뒤에서 그가 나타났다.
씻은 과일처럼 그의 얼굴이 청명했다. 무표정의 시목에게 복숭아를 건넨다.
“박스에 담으니 모양새가 뇌물같은데... 현금다발은 없어요. 들어가서 쉬면서 드세요.”
실없는 말로 분위기의 공백을 채우고 진심은 하나도 섞이지 않는 인사를 건넨 뒤 돌아선다.
그런데 등 뒤에서 정말 이 말이 나왔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경감님. 들어오셔서 같이 먹어요.”
문득 사리분간이 안돼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답을 기다리던 시목은 박스를 안은 채 고개를 한번 숙여보이고 문으로 돌아가 현관 번호키를 눌렀다.
자동문이 닫히기 전 재빠르게 따라 들어갔다.
적막한 황검사의 거실에 앉아 꺼진 텔레비전 속 나를 상대로 눈싸움을 한다. 해가 어렴풋하게 져서 밤에 도달한다. 황시목은 부엌에서 전기주전자에 물을 끓이며 부지런히 복숭아를 씻었다.
[황시목이 집에서 복숭아를 썰어주고 있어!]
외마디가 갑자기 머릿속을 울렸다. 이건 지칠 줄 모르고 몇 분에 한번 씩 나를 어지럽게 하고 머리 위로 오색빛깔 조명도 쏟아지는 것 같다. 이제 어떡하면 좋지?
집에 발을 들여놓고 나서부터는 여유로운 척 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도 신이 난 두 눈은 집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허겁지겁 읽어내느라 머리를 포화시켰다. 눈치가 보여 집 구경을 시켜달라는 말도 선뜻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화장실이 어디있는지 간신히 물어보고 비누로 손을 씻다가 거울을 봤을 때, 거울 속 한여진은 집주인 몰래 가지고 들어온 마음 때문에 불안해보였다. 시목이 쓰는 칫솔과 치약, 샴푸와 샤워젤, 셰이빙크림을 그새 스캔한 눈. 꼭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거실로 나와 소파 중간에 덩그러니 앉았다.
책은 잔뜩. 소파 앞 탁자 밑에는 푹신한 카페트. 화분 하나도 없고 벽에 걸린 시계는 멈춰 있는데 벽 아래엔 그럴듯하게 라디오 시계를 놓아두었다. 이전에 비해서 조금 사람이 사는 때가 묻은 것 같지만 과일 자를 칼 한 자루가 있는게 여전히 신기할 지경인 부엌, 그 안에서 능숙하게 복숭아를 등분하고 주전자 물을 따르는 시목.
접시 담긴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내가 그의 인영에 우물쭈물 하자 부쩍 어색해하더니 1미터의 간격을 두고 나란히 소파에 앉는다. 그가 조용히 내 편으로 차가 담긴 컵을 내밀며 시선이 맞았고 가볍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포크를 달그락 거린다.
“잘 먹겠습니다.” “네.”
나는 애써 앞을 보며 복숭아를 먹었다. 속이 고소하게 타들어가면 가끔 그를 돌아보았다. 남색 면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고 하얀 맨발에 베이지색 슬리퍼를 신은 황시목은 복숭아를 베어물며 허공을 응시하다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너무 황급히 피하지 않으려고, 부러 시목과 1초 정도 시선을 맞추다가 흐려버렸다.
“검사님 하얀 셔츠 잘 받길래 잘생겨서 쳐다봤어.” “네.”
변명하면 지는건데 구차하게 들리지 않길 바랐다. 시목은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 나를 본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황시목의 시선이 내 쪽으로 오래 향한다.
“...왜요? 경감님 예뻐요? 닳으니 그만 봐요”
무리수로 떨쳐내는 어색함.
“네.”
용케도 수긍하는 황시목. 나는 머리를 풀어 얼굴을 가리고 베란다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내 속도 모르는 서부지방검찰청은 여름밤에 유유히 빛나고 있었다.
“이야, 검사님. 전망이… 직장뷰네.” “전망 자체는 좋습니다.”
고개를 휙 도니 시목이 야무지게 복숭아를 씹고 있다. 그거 참 집주인이라고 팔이 안으로 굽나보다.
“예, 뭐… 나쁘진 않죠, 여기가 나름 고층이라…”
한없이 가소로워지는 마음을 가라앉히느라 웃음이 난다. 말을 이었다.
“좀 어색하네요, 검사님 서울로 돌아온 이후로 집 온거 처음이라.” “...” “사적으로 온 것도 처음이고… 황시목이 내준 녹차도… 검사님이 과일 써는 것도 처음 보고 이래저래 기념비적인 날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도 집 자체는 변한게 없네요.”
침묵을 깨고 일반적인 분위기로 돌아오려 하니 말이 길어진다. 위태로운 평화를 즐기는 나와 볼을 우물거리는 시목.
“하나는 변했습니다.”
그가 벌떡 일어났다. 놀란 마음에 포크를 들고 유유히 뒷편의 안방으로 들어가는 시목을 따라갔다. 불을 낮게 켠 방의 책상 앞에 선 시목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의 시선 방향대로 눈을 돌린다. 어딜 보는 거지 하는데 나의 시선이 몇초를 헤메자 시목이 친절히 손가락으로 책상 어귀를 가리킨다.
낯익은 그림이 있었다. 찡그린 시목, 웃는 시목, 코가 큰 시목.
“아…! 이거!”
내 옆에서 어깨를 으쓱이는 황시목. 입을 꾹꾹 다무는 폼을 보니 머쓱하다는 건지.
“와, 고맙네… 검사님… 버리지 않고 다 모아뒀구나. 하나도 구겨지지 않았어요.”
중언부언 감탄사를 내뱉는 얼굴이 화끈해진다. 화색이 도는 것도 숨길 수 없고 마음 같아선 꼭 껴안고 싶어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게 되었다. 좋은 김에 어깨에 턱하니 팔을 두르자 시목의 시선이 내 얼굴과 제 어깨 언저리를 맴돈다. 나는 괜스레 감싸본 시목의 어깨를 쓱쓱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우리 검사님 다 컸네! 남의 선물을 곱게 간직해줄 줄도 알고.” “나이가 몇인데 또 그 소리예요. 엎어지면 마흔인데.” “그래도, 나이 헛먹지 않은 건 좋잖아요?” “예에.”
황검사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거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아 미지근해진 녹차를 한입 크게 들이킨다. 집안은 아득히 어두워졌고 마음은 뜨거워져서 조심스레 소파에 등을 기대보았다. 스탠드 불을 켠 시목도 소파위에 깊숙하게 앉아 양반다리를 하고 차를 마신다.
창 밖의 서부지검이 과거처럼 멀어 보이는 건 감정이 바뀌어서일 테다. 좋아하게 된걸 인정한 이후로 어찌나 그가 의식되는지 내 옆에 있을 때 마다 체온 만큼 따뜻하고 촉촉한 기체가 그의 형상으로 빚어지는 것 같았다. 그와 눈을 맞추면 내 비밀을 들키게 될 것이다. 그런데 차를 한 모금씩 마시다보면 작게 서로의 얼굴이 마주쳤다. 시목이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넉넉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흰 얼굴에 얕고 작은 보조개가 패였다. 그 온기에 마음이 녹아 과즙처럼 흐를까봐 포크를 꼭 붙잡는 나. 바깥은 남색과 주황색 석양이 경계없이 섞이면서 여름밤하늘을 만들고 있다.
나도 선을 흐릴 수 있지 않을까.
“검사님은 겁도 없네.” “네?” “이 낭만적인 여름밤에 여자를 방에 데려와서 단둘이 있고 말야.”
한 뼘 거리의 시목.
그는 허공을 보곤 눈을 찌푸린다.
“경감님도 겁 없잖아요.”
나는 귀를 의심하며 돌아보았다. 사실 긴장은 해도 겁이 난 적은 없다. 그런데, 그게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되물으려는데 시목의 두 눈이 나에게 꽂혀온다.
“이런 말 다른 남자친구들한테도 하십니까?”
나는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시계 초침 소리가 환상처럼 지나갔다.
“어…”
당연히 아니지. 저런 한심한 작업 멘트는 말해본 적 없다. 그정도로 하지 않아도 알아서 상황이 굴러가기 때문이다. 당신이 황시목이라서. 이게 다, 당신 때문이라서 그런건데! 그런데 아니라고 하면 왜 자신에게는 이런 말을 하는지 물을 시목이다. 선을 흐리고만 싶었는데 밟아버렸다.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거에요”
나는 차 한 모금도 쉽게 마실 수 없는 분위기 속에 갈급해진 목을 적시려 하고, 시목은 내 답이 나오기 전까진 절대로 시선을 놔줄 것 같지 않다. 내 시선을 묶어놓은 것도 아닌데 저 뭉근하고 끈질긴 시선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다시 시선을 마주해본다.
“그냥… 말하고 싶어서 말했어요. 솔직히 좀 어색하기도 하고. 검사님 집에 단둘이 있으니까… 긴장도 되고… 그래서요, 그래서.”
나는 속에 불이 나서 다 식은 차를 마시고 희끗 웃었다.
“혹시 화났어요? 음… 화났어?”
시목은 다 보고 듣기만 한다. 더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눈을 평소의 크기로 뜨고 있는데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미간에도 눈두덩이에도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그가 궁금해하는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서 심장이 쿵 떨어진다. 이제 진심으로 겁이 나기 시작했다. 평소 우리가 가벼운 다툼을 하면 어떤 식으로 풀었는지를 떠올려보았다. 암담한 것은 따로 있었다. 우리가 한번도 이런 식의 감정싸움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전례가 없다. 그럴싸한 방안이 없었다. 새로운 문제였다.
[아, 큰일났다…]
포크에 힘겹게 매달려 있던 복숭아 조각이 떨어져 굴러간다.
여름밤이 흐려지다 비를 쏟았다. 우산을 빌려서 나오는 동안 집주인은 고개를 한번 숙여 보여줄 뿐이다.
소주를 사서 돌아온 나는 혼자 다른 세상에 있다가 온 것 같아, 한동안 현관에 묶여 서 있었다. 피곤한 걸음으로 들어갔다.
<모카골드 마일드 네 모금>
물을 끓였다.
날이 흐리고 식욕이 떨어지고 의지도 사라지자 요리가 거추장스럽다. 텔레비전만 보다가 비척비척 일어나 감자를 찌고 아침 겸 점심으로 두알을 먹어 치우고 몇 시간 쯤 흘렀다. 물을 끓이는 동안 남은 감자를 정리하는데 동그란 것에 손길이 스쳤다.
“뭐지?”
복숭아였다. 급한 마음에 주워 담다가 놓쳐버린 것 같았다. 썩었는지 살펴보니 멀쩡해 식탁 위에 올렸다.
찬장에서 믹스커피를 꺼내 컵 안에 털어넣고 끓은 물을 붓는다. 세번 정도 젓고 식탁에 앉았다.
연락은 없었다. 네 시간 전까지는.
화난건지 우울한건지 개의치 않는건지 알 길은 없는데도 그가 입을 다물어버린 순간 부터는 하나 확실해진 게 있었다: 내가 사고를 쳤다. 불똥이 어디로 튈지도 예상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화가 난 게 아니라 질문을 던진 것 같기도 했다. 답을 내려주는 신령한 동굴에 힘껏 질문을 던져놓고 그 안으로 파고들어간 사람처럼 고요하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사방을 의심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질문의 답이 어떤 모양이 될지는 미지수다.
나는 죄없는 복숭아를 노려본다.
실은 믿겨지지 않는다. 그날 시목의 건조한 얼굴이. 그 얼굴엔 아무 색도 없고 내가 그의 색을 다 뒤집어써 엉망이 된 것 같았던 순간도. 그간 적당히 숨기고온 것을 조금의 자극에 기어코 들켜버리고야 만 나의 부주의함도. 내가 멈추고 참고 거리를 유지해야 했는데 신이 나서 속도를 내다가 속도위반 딱지가 날아와버린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실온에 놓아둔 물컵처럼 시간을 두고 썩어가는 기분이었다. 텔레비전 영화 채널은 재미라곤 없는 케케묵은 할리우드 영화를 틀어주고 있다. 핸드폰은 어딜 갔는지 모른다. 찾지도 않을 것이다. 네 모금 큼직하게 마시고 소파로 가서 멀찍이 늘어졌다.
흐물거리는 천장에서 물이 새듯 오늘은 종일 비가 내렸다. 입안이 따듯하고, 달고, 텁텁해졌다.
겉이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감자전이 먹고싶다.
지금? 갑자기?
저 멀리 건너편 책상 위의 시계를 보니 다섯시가 넘어간다. 차인 것 같은 와중에도 입에는 뭔가를 넣어줘야만 하지 않을까, 끼니를 부실하게 해결했으니 저녁은 잘 먹어야 한다.
“그래 내가 차였지 인생이 쫑났냐…”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지갑을 찾았다. 핸드폰을 볼까 했지만 고개를 돌려버리고 뚜벅뚜벅 옷장으로 가서 겉옷을 끌어내 입으며 슬리퍼를 찾아 신고 우산과 열쇠를 집어들고 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밖에 누가 있다.
“악-!!” “경감님?”
생목으로 비명이 나왔다. 황시목이 평상에 비를 피해 앉아있었다.
“뭐야!! 뭐에요!!? 왜!?!!”
옷갈아입다 문이 열려버린 사람처럼 옷매무새를 여미며 공격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눈이 왕방울만해지고 얼굴이 달아오르고 뒷걸음도 앞걸음도 못 치고 굳어 섰다. 시목이 황당해 죽겠다는 듯 눈을 크게 굴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핸드폰 확인은 합니까?”
비에 노출되자 어제도 본 것 같은 하얀 셔츠의 어깨가 젖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마치, 어제에서 바로 건너뛰어 이 시간에 도착한 것 같은 시목이 나의 평상에 출몰했다. 신이시여, 이 전개 믿어도 되는 건가?
“응? 왜. 안했는데??”
황당해서 격앙된 말투로 받아쳤지만 일순간 뒷목이 싸해진다. 빗소리에 낯뜨거운 침묵이 흐른다.
“뭐 많이 연락 남겼나봐요…?”
머쓱하게 머리를 쓸어넘기는 나. 젖은 팔의 빗방울을 쓸어내고 나를 다시 마주보며 입술을 깨무는 황검사.
“뭐 하고 계셨는데요”
화를 참는 듯 태연한 얼굴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야 그냥 집에 있었죠, 그러니까 제가 집에서 나오겠죠”
뻔한 말도 말이라고 답해본다. 정신이 조금 들자 나도 비를 맞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내 손에 쥐고 있던 장우산을 위로 추키려 했는데, 그때 시목이 다짜고짜 천천히 우산을 펴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막힘없이 다가서는 시목을 거부할 새도 없이 내 머리는 황검사가 든 우산 밑에 들어섰다.
“이제 뭐하실 건데요.” “어, 비가 와서... 감자전 할건데요,”
그의 집에서 났던 정돈된 향이 피어난다.
“근데 황시목이 와버렸네.”
내 생각을 그대로 전달받은 시목은 나를 보면서 눈썹을 찡그린다. 이렇게 안전거리를 부숴버린 건 처음이다. 우산 하나 속에 들어올 만큼 가까이에서 서로를 마주한 것도.
시선을 돌리려고 하면 온통 황시목의 몸, 얼굴, 시선. 황시목의 향, 비에 젖은 어깨에 닿아버려서 눈을 감고만 싶어졌다. 보기만 하면 속이 읽혀버릴까 눈길 한번 주지 못한 당신의 구석구석을. 이렇게 내 눈 앞에 들이밀고 있는 당신은 과연 제정신인가.
한번 질끈 감았다가 뜬다. 황검사는 고요하다.
“출출하면 같이 먹을래요?” “...” “라면도 끓여줄게요.”
화단 이파리들이 촉촉하게 젖어간다. 시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웃는 듯한 저 눈빛은, 나의 착각일까.
다가온 시즌 2를 원동력으로 합작에 참여했습니다. 그후 막막함에 어찌나 후회를 했는지. 그래도 가장 사랑하는 커플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끌어내서 적어보았습니다.
이 합작은 그야말로 대규모 별들의 잔치입니다. 이제 저도 공개일을 맘 편하게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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