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8월 13일
- 5분 분량
시목여진
<안개 [Fog]; 안개는 지면에 붙어있는 구름을 말한다.>
연팡 (트위터 @alreadyGreentd)
"우리는 지금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숲을 걸어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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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의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검찰과 경찰은 그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리고 생명의 존엄성과 법의 엄중함을 해친 가해자는 처벌하고 피해자는 보호하는 일련의 과정을 따르게 된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비인간적인 사건들은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찌르는 시대'라는 말로 현 시대의 일면을 보여준다. 수많은 관계와 시답지 않은 이유들로 범벅이 된 사건들은 정의를 수호하려는 사람들을 지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여진은 항상 나아갔다. 힘없는 약자들,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했고 맥없이 침범당하는 정의를 지키고 바로 세우고자 항상 노력해왔다. 그런 여진의 모습은 거의 감정이 남지 않은 시목에게도 가서 닿았다.
황시목은 특임에서 박무성으로부터 민정수석이었던 이창준과 한조그룹의 회장까지 찾아냈다. 이 과정에서 황시목은 옅어져 잘 느끼지도 못하는 제 감정에 많은 손상을 입었다. 자신의 문제가 미디어를 타고 전국에 퍼졌고 모두 그의 상처를 알게 되었다. 감정을 알지 못하는 검사. 누군가는 철두철미한 검사를 떠올리며 열광했을 수도 있으나 그 말 자체는 황시목에게 알게 모르게 손상을 입혔다. 그리고 영은수의 사진 앞에서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다. 감정이 한계를 넘어서 터져 나온 것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 범인은 윤세형이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쓰러진 이창준까지. 이렇게 대한민국을 흔들었던 사건은 결국 지나갔다. 하지만 이후에도 수없이 많은 형사사건을 거치면서 황시목도 잠깐의 틈도 없이 지쳐갔다. 한여진을 만나 트였던 약간의 숨통은 그가 가지고 있던 조금의 감정들이 서서히 눈에 뜨게 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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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안개는 지면에 붙어있는 구름을 말한다. 이 말뜻은 사람을 더욱 오묘하게 한다. 옛 고전시가들을 살펴보면 군주 주위에 있는 구름은 간신으로 해석되어왔다. 황시목과 한여진은 지금 안개가 잔뜩 낀, 표면에 보이지 않는 비리들로 가득한 비밀의 숲을 걸어가고 있다.
두 사람이 해야 할 것은 단 하나. 비밀의 숲에서 안개를 걷어내고 비밀을 찾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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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경 수사권 조정 건에 대한 모든 활동이 끝나고 한여진과 황시목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돌아가서 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수개월이 흘렀다. 수개월 동안 이전처럼 사건들을 많이 일어났고 둘은 여기저기에 깎이면서 정의에 대한 소임을 다했다. 그렇게 살아가던 중 한여진은 몇 개월 만에 황시목의 문자를 받았다.
'경감님, 잘 지내십니까. 한 번 보고 싶습니다.'
성격대로 군더더기 없이 보낸 문자에 여진은 반가웠다.
'검사님, 웬일이에요? 먼저 문자를 다하고.'
'언제 볼까요?'
여진은 황시목이 먼저 연락을 걸어왔다는 생각에 왠지 약간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해서 자신도 모르게 입술 끝이 올라갔다. 오 천하의 황시목이 먼저 연락도 하고. 황시목 사람 만드는 데 자기 공이 제일 큰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도 잠시, 시목의 답장은 여진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오늘 밤에 시간 괜찮으십니까? 바다가 보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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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시목은 여진의 옥탑방으로 여진을 데리러 갔다. 연락을 받고 나온 여진은 옥탑방 아래서 손을 잠깐 들어 인사하는 시목을 보았다. 최대한 편안하게 옷을 입고 왔음에도 눈에 띄게 피곤해 보이는 행색의 시목이었다. 여진은 약간 두꺼운 가디건을 감싸고 밑으로 빠르게 내려왔다.
"아니, 검사님. 괜찮은 거 맞아요? 얼굴이 너무 상했는데?"
한결같은 여진의 모습에 시목은 살짝 웃어보였다.
"갑자기 연락했는데 나와 줘서 고맙습니다."
"에이 우리 사이에 뭘. 어차피 내일은 출근하는 날도 아니고 시간도 괜찮거든요. 나도 보고싶었어. 바다."
능청스러웠던 인사와는 다르게 바다로 가는 차 안에서는 정적만이 흘렀다. 조수석에 탄 여진은 지친 시목의 모습이 낯설게도 느껴졌고 걱정되기도 했다. 한결같이 자기표현 안하는 사람이 온몸으로 나는 지쳤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고속도로 위에서 밖만 쳐다보다 잠시 고개를 돌려 시목을 관찰했다.
시목은 아무 말도 없이, 여진을 잠깐 쳐다보는 것도 없이 전방만 주시하며 운전하고 있었다. 입은 굳게 닫혀있고 멀리 보고 있는 눈은 뭔가 공허해보였다. 운전대를 잡은 손은 뭔가 간절해 보이기도 했다.
차는 하염없이 달려 동해를 따라 나있는 7번 국도까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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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서 내린 건 어느덧 밤 12시가 넘은 때였다. 가을의 찬 바닷바람이 불고 있었다. 동해를 따라 길게 이어져있는 7번 국도의 한 지점에서 멈춰 둘은 바다를 계속 바라보았다. 어느덧 여진은 보행자 보호를 위해 설치된 난간에 손을 올려두고 있었다.
시목은 여진의 옆에서 바람을 맞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끔은 제가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법에 따라 죄를 가리고 가해자를 찾아서 사회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게 제가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가끔씩 헷갈립니다. 내가 뭘 하는 건지.
여진은 시목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살짝 놀란 듯하면서도 그가 지쳐보이는 이유를 알 수 있어 수긍하는 듯 보였다.
"검사님, 검사님 되게 지쳐보이는 거 알아요?"
여진이 고개를 돌려 시목을 바라보았다.
"검사님, 검사님이 아무리 감정이 옅어서 잘 느끼지 못한다 해도 감정은 있는 거라고 했어요. 그때 그 의사가. 검사님이 사건을 다루면서 자주 마주하는 사람들의 분노, 경멸, 비루함, 서글픔 같은 감정들을 검사님이 직접 자신의 감정으로 경험하지 못하지만 항상 만나게 되는 거잖아요. 아무리 무덤덤해보이고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거 같은 검사님도 계속 상처받는 거겠죠."
여진은 시목의 피곤한 눈을 계속 쳐다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의와 법을 수호한다는 사람들이 부정부패나 비리를 저지르고 있고……. 부당한 명령이 내려와도 들어야 하고 내부 고발자는 피가 진창 튀겨서 언제 퇴출될지 모르니까. 그런 게, 그런 게 검사님을 지치게 하는 거겠죠."
그 말에 시목이 순간 헛웃음을 지었다.
"경감님은 저를 너무 잘 아시는 것 같아요. 이럴 때 보면."
약간은 풀어진 듯한 시목을 보면서 여진은 약간의 안도를 했다.
"그럼요. 나도 경찰이잖아요. 이래저래 사람을 하도 많이 봐서 잘 알죠. 그리고 특히 황시목 검사는 내가 제일 잘 알지."
시목이 웃었다. 웃으면서 여진을 돌아보았다. 금세 무표정으로 돌아왔지만.
시목도 여진처럼 난간에 팔을 걸치고는 몸을 옆으로 틀어 계속 여진을 바라보았다. 여진도 시목처럼 몸을 틀어 둘은 데칼코마니처럼 사이좋게 마주 본 형상을 띠었다.
여진이 고개를 바다 쪽으로 돌려 바닷바람을 맡았다. 그렇게 잠깐을 바닷바람을 느끼다가 시목을 보고 말했다.
"우리는 지금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숲을 걸어가는 거예요."
"어두컴컴한 밤과 새벽에 안개가 자욱한 숲에 있는 거예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아도 달과 별은 보이지 않고 눈앞에 서있는 나무들은 색깔이 보이지 않죠. 그저 새까만 검은색뿐이고. 숲의 끝을 찾아가야 하는데 가는 길도 모르고 길이 나있지도 않고 안개가 또 방해하죠. 그게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에요."
시목이 여진의 말을 듣고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그러고는 한동안 생각에 잠긴다.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난간을 살짝씩 두드리던 손가락도 점점 조용해진다.
그러다 이윽고 시목이 말했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하는 건 그 캄캄한 밤 속에서 안개도, 숲도 헤치고 끝을 찾는 거뿐이겠네요."
여진이 대답했다.
"네.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죠. 우리가."
"검사님"
여진이 부르는 소리에 시목은 바닥에서 시선을 거둬 여진을 바라봤다.
"혼자가 아니에요. '우리'예요. 같이 헤쳐 나갈 일이예요.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하는 것뿐이죠. 나도 있고, 계장님도 있고, 실무관님도 있어요. 그러니까 가끔 지칠 때는 이렇게 기대고 다시 우리가 할 일로 돌아가요."
"......네."
여진은 항상 단단했다. 여진이라고 항상 그렇기만 할까. 하지만 적어도 황시목이 볼 때의 한여진은 단단했다. 황시목에게 한여진은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해서 눈물을 흘려도 단단한 사람이다. 권력을 쥐고 비리를 하는 권력자들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방법을 찾는 단단한 사람이다. 그 누구보다 냉철하고 단단해보이는 황시목은 자신의 속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할 줄도 몰라서 겉모습보다는 쉽게 상처 입었고 여렸다. 자신은 알지 못하지만. 그리고 자신도 이제는 알겠지만 그는 한여진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속을 내비추면서.
여진이 시목을 향해 갑자기 팔을 활짝 펴고 섰다. 시목은 영문을 모르고 멀뚱히 서있다.
"아, 정말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구만 이 검사님은. 이리 와요. 잠깐 안아줄게요."
시목은 여전히 아무것도 안하고 멀뚱히 서서 어색한 표정으로 여진을 쳐다본다. 그런 시목의 모습에 여진은 속으로 아직 사람 만들려면 한참 멀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먼저 시목을 세게 안았다. 여진의 긴 머리칼이 시목에게 닿았다.
"위로예요. 잠깐만 이러고 있어요."
시목이 여진의 품에 안겨있는 꼴이 되었다. 여진은 시목의 어깨에 턱까지 괴어놓고 있는데 시목은 어쩔 줄 몰라 하다 자신도 팔을 들어 어색하게 여진을 안는다. 그러고는 여진처럼 자신도 여진의 머리에 살짝 기댄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따듯한 포옹을 받아본 게 얼마만인지. 그 어떤 동정심도 안타까움도 들어있지 않은, 명백한 위로만이 담긴 따듯한 포옹. 너를 이해하고, 너를 위로하고, 너를 지지한다는 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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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둘은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따듯하게 서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가 자욱한 비밀의 숲 안에서.
안녕하세요 연팡입니다. 먼저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많은 감사를 드리고 합작을 열어주신 총괄분께도 감사를 표합니다. 비밀의 숲 시즌2를 앞두고 합작에 참여할 수 있어 기쁩니다. 합작 즐겁게 감상해주시고 함께 비숲2 재밌게 보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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