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8월 13일
- 15분 분량
시목은수
<사라지기 위해 태어나는 것들 上>
심은 (트위터 @eunsuyauu)
*사망 소재 및 극단적인 선택을 암시하는 묘사가 포함되어 있으니 열람 시 주의해주세요.
사건과 제사
그러니까, 군의동 분신자살 사건에 사이비 종교가 관련되어 있다?
네, 충분히 신뢰할 만한 제보였어요. 동봉된 자료에는 아직 보도된 적 없는 내용까지 담겨 있었고요.
제보자 신원은 파악 됐어?
확인이 어려워요. 봉투에 적힌 주소지도 가짜였고…. 아무래도 신원 밝히기를 꺼려하는 것 같아요. 굳이 익명으로 제보한 것도 같은 이유겠죠. 암튼, 그 사건이 중천교와 연관되어 있다는 건 확실해요. 선배만 괜찮다고 하시면 바로 파보려고요.
나 요즘 바쁘다.
아, 선배.
거짓말 아니야.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가 터지는데. 그렇게 신경 쓰이면 영은수 너 혼자 파봐.
저 혼자서는 힘들어요. 아시잖아요.
내가 보기엔 그렇게 큰 건 아니야. 정 힘들면 연락하고.
1.
툭. 툭툭.
빗방울이 차창을 때리는 소리가 적막한 공기를 가른다. 은수는 차창에서부터 올라오는 서늘함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자정을 넘긴 새벽녘. 기도원 간판만이 번쩍이며 사위를 밝히고 있다.
어떻게 한 명도 안 보일 수가 있지. 은수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차창에 얼굴을 가져다댔다. 기도원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기다린지 벌써 반나절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온종일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니, 안에 사람이 있는 건 분명한데…. 은수는 남은 빵조각을 우물대며 비닐봉투를 구겼다. 슬쩍 눈길을 돌리자, 반대편 구석에 주차된 차량이 눈에 들어온다. 기도원과 고급 세단이라. 은수는 은근한 눈길로 바깥을 응시했다.
‘신용불량자부터 벼락부자까지. 신자들은 생각보다 다양합니다.’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은수의 머릿속을 스쳤다. ‘성별과 나이는 물론이고, 출신까지 전부 다.’ 서동재의 목소리였다. 본인을 능력 있는 정보원이라 소개한 그는 취재의 물꼬를 트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한 이후, 은수는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씩 반복해 들었다.
‘중천교는 매년 장마 때마다 중요한 행사를 치뤄요. 신자들은 그걸 제사라고 부르고, 그 행사는 대개 기도원이나 신자들의 집에서 이루어지죠.’
‘제사 때는 주로 어떤 일을 하나요?’
‘..저도 거기까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제사에는 당사자, 그러니까 제물만 참여할 수 있거든요. 듣기로는 당사자가 헌금을 불태우면서, 마지막에는 자기도…. 뭐, 네. 기자님이 아시는 그대롭니다. 섬뜩하죠.’
설핏 인상을 찌푸리던 동재의 얼굴이 차창 위에 떠올랐다가 스르르 사라진다. 기도원 입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수는 수첩을 펼치고 펜을 꺼내들었다. ‘기도원’이라고 적힌 메모 옆으로 ‘분신자살’과 ‘제사’라는 글씨가 보였다. 은수는 무심코 펜을 들어 수첩 위를 톡톡, 두드리다 맨 아래에 ‘다시 확인해볼 것’이라고 메모했다.
어느 새 시간은 새벽 5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밀려오는 졸음에 습관적으로 눈꺼풀을 비비는데, 순간 캘린더 알림과 함께 휴대폰 화면이 반짝거린다. ‘7시 스타벅스’. 휴대폰을 내려둔 은수는 얼마 남지 않은 우유를 모조리 입 안에 털어넣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빈 우유갑은 대충 구겨 조수석에 던져놓는다.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하려면 지금 출발해도 빠듯했다.
“..어어?”
꿈쩍을 않는 차체에 은수의 눈이 조금 커진다. 재차 시동을 걸어도 헛수고였다. 진흙탕 속에서 자동차 바퀴만이 세차게 헛돌 뿐이다. 제자리에서 한참을 씨름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마에 핏줄이 솟고, 두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네.”
은수는 고개를 숙인 채 연달아 헛숨을 내쉬었다. 종일 혹사를 당한 두 눈이 피로를 호소하고 있었다. 손톱을 세워 감은 눈 위를 꾸욱 내리누르던 은수는 휴대폰을 찾아 조수석을 더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은수는 불현듯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
슬쩍 눈동자를 굴리자 전조등으로 인해 밝아졌던 주위가 조금 어두워진 것이 보였다. 망설이는 찰나, 은수는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똑똑. 낯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 누군가 가까이 서있는 것이 보인다. 우산을 들고 선 반팔 와이셔츠 차림의 남자.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철렁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짧은 눈맞춤 뒤, 남자는 옆으로 건너와 운전석 차창을 두드렸다.
누구지?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놀란 심장이 쿵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었다. 대답이 없자, 남자는 조금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춰왔다. 굳게 다물린 입매와 까만 눈동자. 은수는 순간 등골이 섬짓해지는 것을 느낀다.
중천교의 신자일까?
은수는 슬그머니 휴대폰을 주워들며 허리를 꼿꼿이 폈다.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는 말없이 조금 뒤로 물러설 뿐이다. 조심스레 차창을 내리자, 빗소리가 고요했던 차 안을 가득 메웠다. 둘 사이의 짧은 정적. 남자는 천천히 눈꺼풀을 깜박이다 입을 떼었다. 도와드릴까요. 남자는 정적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둘의 첫 만남이었다.
사라지기 위해 태어나는 것들 上
중천교와 신주마을
중천교의 신자들 중 일부는 마을에 모여 삽니다. 신주라고, 경기도 외곽에 있는 산골 마을인데…. 첫 기도원이 거기에 있었다네요. 그곳에 머물던 교주를 중심으로 신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기도원이 ‘있었다’는 건, 지금은 그곳이 없어졌다는 얘기인가요?
예, 제사 중 화재로 건물이 송두리째 타 버렸답니다. 교주가 갑자기 자취를 감춘 것도 그 때부터고요.
그 후 교주의 행방은요?
모릅니다. 신자들도 아예 모르는 눈치예요. 다만 확실한 건, 교주가 사라진 후에 천자가 나타났다는 거예요.
천자요?
네. 때마침 나타난 천자가 신자들을 결속시켰답니다. 실제로 천자가 등장한 이후, 중천교의 세력이 더 커졌다고 해요.
천자에 대해 더 알 수 있을까요?
글쎄요. 한참 파봤는데 별로 나오는 게 없어요. 워낙 철두철미한 인간이라. 아마 신자들 중에서도 천자를 직접 만나본 사람은 손에 꼽을 겁니다.
흥미롭네요. 대면 없이 신자들을 결속시키다니.
잘 아시네요? 그 점이 제일 독특해요. 이 천자는 얼굴을 제대로 드러낸 적도 없답니다. 다른 종교의 교주들과 가장 극명하게 대비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예요. 덕분에 신자들 사이에서도 소문만 무성하다네요. 교주의 자식이다 뭐다… 해서.
2.
“왜 아무런 지적도 안 하세요? 우리 저번에 본 적 있잖아요, 서울 기도원 앞에서.”
“지적할 필요를 못 느껴서요.”
시목의 어투는 늘 조용조용했다. 그가 입을 열자 고즈넉한 목소리가 진료실 안을 울린다. 은수는 소매를 걷어 올리던 것을 멈추고 시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목은 머리꼭지에 꽂히는 강렬한 시선을 느끼고도 그것을 모른 척 태연하게 군다.
“전 선생님이 무심하신 건지, 아님 그냥 뻔뻔하신 건지 분간이 잘 안 가요.”
시목은 아랑곳 않고 탈지면에 소독약을 듬뿍 적셨다. 상처 부위를 소독하는 손길이 유독 정갈하다. 단정한 손 끝을 내려다보던 은수는 선선히 부는 선풍기 바람을 느끼고는 가볍게 두 눈을 감았다 떴다.
“거짓말한 게 뻔하잖아요. 제가 기자라는 것도 아실테고. 무엇보다 보통 직업을 속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수상히 여기기 마련이죠.”
“제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써야합니까?”
은수는 말없이 눈동자를 굴린다. 평소와 같은 반응에 시목은 눈썹을 한번 까닥이고는 팔꿈치 위에 연고를 발랐다. 무심한 말투에 어울리지 않게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손길로. 두 사람이 입을 다물자 진료실은 금세 조용해진다. 은수는 고물 선풍기가 작게 털럭대는 소리를 들으며 시목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표정. 은수는 무심코 생각한다. 이 사람의 머릿속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다고.
지난 6월, 은수는 조촐한 짐을 싸들고 신주마을에 내려왔다. 중천교에 관한 취재를 위해서였다. 새로운 이웃에게 관심을 보이던 주민들에게 은수는 자신의 명함을 내미는 대신, 거짓말을 택했다. 은수는 그렇게 작가의 꿈을 품은 채 용감히 사표를 던진 청년이 되었다.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기자임을 솔직히 밝혔다가는 발도 제대로 못 붙이고 쫓겨날 판이었으니까.
중천교의 신자들은 무척이나 친절했다. 교주가 그렇게 베품과 나눔을 강조한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건가 싶었다. 앞집 아주머니의 등쌀에 못 이겨 마을회관에 인사를 간 이후로, 은수는 매일 삶은 옥수수나 감자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귀가하게 됐다. 이웃의 손에 이끌려 집집마다 인사를 돌았고, 은수는 곧 마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앞집 아주머니가 ‘예의 바르고 싹싹한 처자’라며 은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덕분이다.
그러던 중, 은수는 시목과 재회했다. 그것도 마을 외곽에 위치한 보건소에서. 흰 가운을 걸친 시목은 은수를 단번에 알아보았지만, 그 사실을 함구했다. 굳어진 은수의 표정을 보고도 공연스레 모른 척 굴었던 것이다. 앞집 아주머니가 ‘새로 이사 온 작가 지망생 처자’라며 은수를 소개할 때도 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이후로도 시목은 한참 동안 기도원에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마냥 행동했다. 은수는 찰나 스치는 시선에서 명백한 그날의 흔적을 보았지만, 침묵을 유지했다. 은수가 기도원에서의 만남을 입에 올린 것은 그로부터 한달 뒤의 일이다.
함구에 대한 고마움은 찰나였다. 시목의 무관심과 계속된 침묵이 의심의 싹을 틔운 것이다. 남자는 왜 자신의 거짓말을 알고도 그것을 모른 척 구는걸까. 신자라면 이 사실을 어서 주위에 알려야 하는 게 아닌가? 은수는 그의 마음 속에 어떤 꿍꿍이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자신이 시목을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은수의 촉은 제법 정확했고, 기자로서의 촉은 시목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했다.
그러나 은수는 시목을 피하는 대신, 그의 곁에 다가서기를 택했다. 가까이서 보아도 흐릿한 그의 속을 멀리서 읽어낼 자신이 없어서다. 은수는 그를 마주칠 때마다 은근한 의심이 섞인 질문을 던졌고, 그 내용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날카로워졌다.
‘선생님, 그날 저는 왜 모른 척하셨어요?’
‘왜 저한테 아무것도 안 물어보세요?’
‘그쪽은 웬 기자가 온 마을을 들쑤시고 다녀도 아무렇지 않은가 봐요.’
시목은 그런 은수가 줄곧 불편하다는 듯 굴면서도 그녀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말없이 곁을 내주는 식이었다. 함께 저녁을 먹고, 발 맞춰 걷는 일이 점차 늘어나면서 두 사람의 뒤로 의아한 시선이 따라붙기도 했지만, 은수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침묵을 유지하되 자신을 피하지는 않는 시목의 모습에서 작은 가능성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중천교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은 은수를 계속 움직이게 만들었다.
“앗.”
순간적인 따가움에 몸을 움찔대자, 시목이 기민하게 움직여 팔뚝을 잡아왔다. 움직이지 마세요. 동시에 연고를 덧바르는 손길이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시목은 연고가 고루 발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그 위에 반창고를 붙였다.
그 때까지도 팔을 고정한 손은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맞닿은 부위에서부터 느껴지는 손바닥의 뜨거운 온도. 그에게서 풍겨오는 옅은 소독약 냄새와 미약한 두근거림. 은수는 영문도 모른 채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여름의 뜨거운 공기에 목구멍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3.
한봉주, 58세. 분신자살로 사망한 그는 생전에 군의동 땅부자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이다. 서울의 한 저택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리며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유서 한 장 없는 죽음은 타살 의혹을 불러왔으나, 경찰은 ‘여러 가지 상황 증거로 미루어 볼 때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그 가능성을 일축했다.
해당 사건의 가장 기이한 점은 사망 전 한봉주의 행적이었다. 사고 발생 전날, 그는 지인들에게 각종 상품권과 명품 브랜드 제품 등을 선물했다. 그의 주변인들은 입을 모아 사망 전날 그의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고 진술했다.
‘정말 이상했어요. 원래도 주위에 잘 베푸는 분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거든요.’
‘오래도록 바라왔던 일이 드디어 성사됐다면서 좋아하셨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은수는 그가 언급했던 ‘오래도록 바라왔던 일’이 제사일 것이라 추측했다. 취재 내용에 따르면 제사는 중천교에서 단순한 연례 행사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 어렵사리 얻은 중천교의 교리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진리를 깨우치는 자만이 내세에서 참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원죄를 씻고 진리를 얻기 위해선 오랜 수행을 통해 덕을 쌓아야 하며, 제사를 통해 숭고한 희생을 치뤄야 한다. 죽음은 결코 두렵거나 슬픈 것이 아니며, 그것은 내세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통로일 뿐이다’.
한 신자의 가족은 원철과의 인터뷰에서 제물이 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답했다. 제물의 선정 기준이 굉장히 모호할 뿐만 아니라, 그 조건이 매우 까다롭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천교의 모든 신자는 제사로의 참여를 원했고, 그것은 한봉주도 마찬가지였다.
‘한봉주 외에 확인된 피해자는 더 없어?’
‘신원이 확실한 건 한 사람 밖에 없어요. 박진숙, 10년 전쯤 신주마을 기도원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됐어요. 옆에 시체 한 구가 더 있었다는데, 그 시체는 아직까지 신원 확인이 안 됐고요.’
‘신주마을이면.. 신자들이 모여 산다던 거기?’
‘네.’
‘그러면 그 시체가 교주일 가능성도 있겠네. 그 놈 제사 이후로 사라졌다며.’
수첩을 뒤적이던 은수는 ‘제사’라고 적힌 글씨 위에 크게 동그라미를 쳤다. 사선으로 이어진 ‘교주’라는 메모 위에는 연달아 물음표를 그린다. 교주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 시체가 정말 교주였을까? 종이를 노려보는 은수의 미간이 점차 깊게 패인다.
은수는 수첩을 안주머니에 밀어 넣고,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찰칵. 짧은 셔터 소리와 함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다. 강렬한 빛에 순간적으로 시야가 깜깜해졌다. 눈꺼풀을 길게 감았다 뜨자 금세 어두워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처참하네. 겨우 골격만 남은 기도원은 도저히 건물처럼 보이질 않았다.
이런 흉물스러운 건물을 지금까지 남겨둔 건 무슨 이유일까.
은수는 새삼스러운 섬뜩함에 몸을 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 가구들은 모두 까맣게 그을려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다. 그날의 잔혹함이 눈 앞에 되살아나는 것만 같은 기분. 여름밤의 더위에도 몸이 오싹 움츠러들었다.
“거기서 뭐하십니까.”
“악!”
순간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너무 놀라서 엉겁결에 비명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행색의 남자가 보였다. 와이셔츠 차림의 시목은 조금쯤 얼떨떨해 보이는 얼굴로 이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쪽이야말로 지금 이 시간에 왜….”
“진료가 늦게 끝나서요.”
은수는 말없이 얼굴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이 새벽에?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서자 시목이 빤한 눈빛으로 눈을 맞춰온다. 짧은 침묵에 한결 거세어진 바람소리만이 공백을 메웠다.
“응급환자라도 있었나 봐요. 이 늦은 시간까지 일을 다 보시고.”
툭. 그 때 은수의 뺨 위로 무언가 가벼운 것이 떨구어졌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쓱 훔치자 그대로 물기가 묻어난다. 어둠 속에서 고개를 드니, 온통 먹구름으로 덮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또 비다. 한 점 두 점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은 얼마 가지 않아 차츰차츰 굵어지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파우치에 집어넣기 무섭게 어둠 속으로 빗소리가 쏟아져 들어온다.
바람 섞인 빗소리 속에서도 은수는 그의 발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몇 걸음 다가오는 듯하던 시목은 돌연 걸음을 멈춘다. 거기 계속 서 계실 겁니까? 늘 그렇듯 정적이고 단정한 목소리였다. 우산을 펼쳐든 시목은 덤덤한 눈으로 은수를 바라보았다.
4.
거세게 몰아치던 빗줄기는 가늘어지고, 나뭇가지를 때리던 바람소리는 어느샌가 희미해졌다. 그의 셔츠에 배인 소독약 냄새가 바람결을 타고 은수의 코끝을 간지럽힌다. 은수는 우산 아래서 어깨가 조금씩 스칠 때마다 말없이 눈동자를 굴렸다. 빗물에 젖은 한쪽 어깨가 시렸지만, 얼굴에 슬슬 열이 올라 그쯤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넘길 수 있게 되었다. 여름감기인가. 은수는 남은 손으로 붉게 익은 제 뺨을 어루만진다.
마을로 가는 내내 시목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혹시라도 무언가를 추궁하지는 않을까, 하고 마음을 졸였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덕분에 은수는 한시름 덜 수 있었지만, 시목을 향한 의구심은 오히려 몸집을 불려갔다. 기도원에서 자신을 마주하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그가 더욱 의심스러워졌던 것이다.
왜 나를 막지 않는 거지?
취재를 방관하는 이유는 뭘까.
좀처럼 속을 드러내질 않는 시목이 영영 풀리지 않을 실타래처럼 느껴졌다. 은수는 느릿느릿 걸으며 시목을 흘금거린다. 가로등 불빛에 비추인 그의 얼굴은 평소와 같이 무심하기만 했다. 단정한 눈매와 선이 굵은 콧대, 색이 희미한 입술. 순간 불어온 바람에 그의 앞머리가 가볍게 살랑인다.
아. 또 시작이다.
아무런 까닭도 없이 손끝에 열이 올랐다. 영문 모를 열병에 심장이 멋대로 뛴다. 은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제 뺨을 연거푸 쓸어내렸다. 옷깃을 당겨 붉어진 목덜미를 가려보지만 소용이 없다. 길 잃은 시선은 곧장 시목을 향하지 못하고 허공을 헤맸다. 또 왜 이러는 거지. 은수는 저도 모르게 깊은 상념에 잠긴다.
시목은 묵묵히 발길을 내딛다 말고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순간 우산살 끝에 매달려 있던 빗방울이 은수의 눈꺼풀 위로 떨어진다. 차가운 감촉에 놀라 고개를 드니, 익숙한 풍경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그럼 들어가세요.”
“아, 네.”
은수는 조금 머쓱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짧은 인사와 함께 슬쩍 고개를 숙이자, 시목은 곧바로 골목을 돌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빗소리조차 속살거리는 고요한 새벽. 물기로 젖은 땅 위를 걷는 발소리가 길목에 조용히 울려퍼진다.
무심결에 귀를 기울이던 은수는 빈 자리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뒤늦게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가림막 삼았던 손등은 어느새 빗물로 흠씬 젖어있다. 화분을 털어내 열쇠를 찾는 순간까지도 은수는 머릿속으로 그의 흔적을 쫓고 있었다.
신자가 아닌 마을의 외부인일까?
그렇다면 그의 수상한 행동이 일정 부분 설명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지점이 있었다. 신자가 아니라면 서울의 기도원에는 왜 갔단 말인가? 계속된 의심과 질문으로 은수의 머릿속은 혼란하고 어수선했다.
“뭔가 이상해.”
열린 현관문 사이로 깜깜한 방안이 은수를 반긴다. 자물쇠를 걸어 잠근 은수는 현관에 선 채로 제 발끝을 멀거니 내려다봤다. 소매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손등을 차갑게 적신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은수는 한참만에야 결심한 듯 집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5.
“아직 안 주무셨네요.”
급작스러운 방문에 시목은 조금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봉투에 감싸인 소주병을 들어 보이자 슬쩍 미간을 좁히기까지 한다. 은수는 뻔뻔스러운 얼굴을 가장한 채 현관문 앞에 버티고 섰다. 시목이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 한, 되도록 자리를 지킬 셈이었다.
“술이 좀 남아서요.”
“….”
“마침 같이 마실 사람도 없고.”
대치는 예상보다 길고 지루했다. 처마에서부터 토도독 떨어진 빗방울이 돋아난 풀잎 사이로 스며든다. 말없이 그 광경을 눈으로만 쫓던 은수는 화단에 놓인 삽을 발견하고는 두 눈을 게슴츠레 떴다. 꽃 한송이 없는 화단에 웬 삽? 미간을 슬쩍 좁히는데, 가까이서 낮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오래는 안됩니다.”
나지막한 한숨을 뱉은 시목은 결국 빗장을 빼어 주었다.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였다. 은은한 불빛만이 감도는 집안. 문이 절커덕 닫히자 주위는 금세 고요해진다. 그럼 실례 좀 할게요. 안으로 들어서자 서늘한 바람과 함께 옅은 나무 향이 느껴졌다. 집이 꼭 주인을 닮았네. 은수는 맘속으로만 생각하며 천천히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탐색
황시목, 서른 다섯. S대 졸업 후 종합 병원에서 5년간 근무. 현재는 신주마을 보건의로 재직 중. 외동에, 부모님 두 분 다 멀쩡히 살아계시고…. 별 거 없는데?
교단과의 연관성은요? 행사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를 했다거나, 가족 중에 신자가 있다거나.
적어도 서류상으론 없어. 네 말대로 서울 기도원에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게 다야. 그마저도 한두 번이 끝이고.
애매하네요. 만일 기도원을 방문한 게 정말 한두 번 뿐이라면…, 본인이 신자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나야 모르지. 그런 건 가까이 있는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그렇죠.
그 놈이 어떤 부류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조심은 해둬. 요즘엔 겉과 속이 따로 노는 놈들 많아.
….
정 모르겠으면 슬쩍 떠보든지. 네 전문이잖아.
몇 번 시도해봤는데 별 소득이 없어요. 좀처럼 대답을 듣기 힘들기도 하고.
취재하겠답시고 거처까지 옮긴 판에 무슨 방법을 가려. 그냥 밀어붙여. 그 놈도 사람인 이상 뭔가 반응이 있을 거 아냐.
6.
“취재는 어디까지 진행됐습니까?”
“이젠 모른 척도 관두시려고요?”
술잔을 비운 은수가 설핏 웃었다. 술기운에 붉어진 두 뺨이 선명하다. 시목은 대답 없이 그 모습을 빤히 건너다보았다. 은수는 이제 그런 반응쯤은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한다.
“이 일에 이렇게 관심을 갖고 계신 줄은 몰랐네요. 생각도 못했어요, 워낙 무심하셔서.”
“….”
“지금 당장은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달리 진행된 게 없기도 하고.”
“..예, 알겠습니다.”
“더 묻지도 않으시네요. 얼추 예상은 했지만.”
“말하길 꺼려하시는 것 같아서요.”
순간 안주를 뒤적이던 손길이 멈춘다. 눈꺼풀을 연거푸 껌벅거리던 은수는 시목을 물끄러미 응시할 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시목은 예의 그 무심한 얼굴로 은근한 시선을 받아낸다. 또 저 뻔뻔한 얼굴. 은수는 그 말을 차마 뱉을 수 없어 속으로만 씹어 삼켰다.
“보는 눈이 꽤 정확하시네요.”
“그렇습니까.”
“남의 속마음까지 다 읽으시고.”
슬며시 벌어진 입술에선 미약한 한숨과도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은수는 가물거리는 눈을 애써 올려 뜨는 동시에 술병을 집어들었다. 병을 기울여 술을 가득히 붓는 손짓에는 힘이 없다.
“그래서 전 그쪽이 조금 그래요.”
“….”
“그런 거 있잖아요. 내 속은 낱낱이 까발려지는 것 같은데, 정작 내가 읽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는 기분.”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이후 이어지는 짧은 침묵. 옅은 불빛에 비추인 술잔이 은은하게 반짝인다. 그 모양을 빤히 내려다보던 은수는 말없이 술잔을 죽 비웠다.
“제가 생각을 좀 해봤어요. 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애초에 신자가 맞기는 할까..”
시목은 눈주위를 슬슬 문지르며 은수의 얼굴을 흘긋 바라보았다. 은수는 제법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술잔을 만지작대는 손끝이 금방이라도 움직임을 멈출 듯 서서히 속도를 늦춘다.
“그런데 도저히 답이 안 나오더라고요.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의심할 거리만 늘어나요.”
은수는 턱을 괴었던 손을 꺼내어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믿고는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요. 모든 게 불확실하니까. 은수의 움직임을 따라 시목의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간다. 희게 질린 손끝과 맥없이 꺾이는 손목. 그럼에도 빛이 선명한 눈동자.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세요? 사람 부담스럽게. 은수는 낮은 소리로 말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골몰히 생각에 잠긴 시목은 은수의 목소리를 아예 듣지 못한 사람처럼 굴었다. 길어진 침묵에 은수의 눈이 조금 가늘어진다. 또 무슨 생각을 저렇게…. 벌겋게 열이 오른 뺨을 괴어 고개를 기울이는데, 순간 두 시선이 맞부딪힌다. 은수는 찰나 마주친 그의 눈빛에서 망설임을 읽어냈다. 뭘 주저하는 거지. 은수의 생각을 읽은 듯, 시목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평소보다 더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정확히 뭘 취재하시는 겁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의 은수의 얼굴이 굳어진다. 은수는 순간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잠시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시목을 응시하는 시선에 의아한 빛이 섞인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과 상반된 어투. 은수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기회임을 알아차렸다.
“그게 무슨 뜻이예요?”
“군의동 사건에 관한 취재인지, 아니면 중천교에 관한 취재인지. 그걸 물은 겁니다.”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손끝이 야릇하게 저려온다. 온몸의 피가 빠르게 도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건 변환점이다. 이 기회를 놓쳐선 안된다. 은수는 자신이 다신 돌아오지 않을 순간에 직면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은수는 최대한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자신의 말이 의도와 다르게 왜곡되어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입을 여는 순간, 두 사람의 각기 다른 시선이 허공에서 마구 얽힌다.
변환점
그러니까 최소한, 내부인은 맞다는 얘기네요. 이곳 보건의로 내려온 것도 중천교 때문이고.
내 말이 사실이라고 어떻게 확신합니까? 제가 거짓말을 한 걸지도 모르는데요.
확신하지 못할 이유가 없죠.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그동안 속으로 켕기는 게 있으셨던 거 아녜요?
….
내부인도 종류가 있어요. 도움이 될 만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전 그쪽이 전자라고 생각하고요.
….
물론 검증 절차는 다 거칠 예정이에요.
예.
갑자기 생각을 바꾼 이유가 뭐예요? 지금까지 줄곧 침묵하다가 입을 연 이유요.
목표가 같다는 걸 확인했으니까요.
7.
“그럼 가볼게요. 마지막으로 이것만 마시고.”
술잔을 꺾자 머리 위로 술기운이 지르르하게 퍼진다. 쓰긴 엄청 쓰네…. 한숨 같이 토해진 말에 옅은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꺼풀을 깜박이던 시목은 느릿하게 입을 뗐다.
“더 있다 가세요.”
찬찬히 고개를 든 은수는 조금쯤 얼이 빠진 얼굴로 시목을 바라보았다. 더 있다 가라고요? 의구심 섞인 목소리로 되물어 보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다. 술잔을 마저 비운 시목은 조용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실에 커다랗게 난 창문 밖으로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하늘은 짙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잔뜩 흐려져 있다.
“아뇨, 괜찮아요.”
은수는 의자에 걸쳐 두었던 겉옷을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혹시라도 더 제보하고 싶은 맘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 주시고요.”
인사와 함께 고개를 숙이는데, 순간 현기증이 일면서 머리가 어찔했다. 눈꺼풀을 움직일 때마다 새까만 어둠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가 사라진다. 급히 테이블을 짚고 선 은수는 벌겋게 열이 오른 이마를 짚으며 작게 신음했다. 뒤늦게 술기운이 오르는지 속이 뒤집힐 듯 울렁거렸다.
요란해진 빗소리가 어둠 속에서 더욱 크게 들려온다. 은수는 낮은 한숨을 내어 뱉으며 기울어진 몸을 바로 세웠다. 겉옷을 대충 팔에 걸친 뒤, 자리를 빠져 나오려는데 순간 눈 앞이 번쩍였다. 번개가 어둠을 가른 탓이다. 상황을 미처 자각하기도 전에, 집안이 캄캄한 어둠으로 뒤덮였다. 정전이었다.
새벽
말숙 엄마, 빨간 지붕 집 그 처자 말이야. 좀 이상하지 않어?
또 뭐가. 싹싹하고 예쁘기만 하드만.
아니, 잘 좀 생각해봐. 요즘 세상에 누가 이런 곳으로 이사를 와? 버스 하나 안 다니는 시골에다, 툭 하면 정전에 침수…. 젊은 사람들은 이런 거 싫어해.
싫어하는 건 희진 엄마 같은데?
아이참. 객관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거지. 신자라면 몰라도 외부인이 자발적으로 오긴 힘든 곳인데. 안 그래요, 의사 양반?
그만해. 이 양반은 순진해서 그런 거 잘 몰라.
아이구, 모르긴 뭘? 요즘 둘이 붙어다니더만. 의사 양반, 조심해요. 혹시 알어? 뭔가를 캐러 온 걸지도 모르지.
8.
또, 비가 온다.
세찬 빗소리에 귀가 얼얼했다. 이게 얼마만의 비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은수는 지난 날들을 대략 어림잡아 세어 본다. 이틀에 걸쳐 내렸던 장대비 이후, 거의 일주일만의 비였다. 목을 빼어 마당을 살피니 한동안 바싹 말라있던 흙이 물기를 흠뻑 머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본격적인 여름 장마의 시작이었다.
수건 위에 걸친 머리칼에서부터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욕실에서부터 옮아온 온기가 은수의 몸 안을 맴돌며 곳곳에 열기를 피워낸다. 귀를 기울이자 바깥의 빗소리가 한층 더 가깝게 들려왔다. 은수는 빗소리를 음악 삼아 바닥에 놓인 옷가지들을 정리한다.
“음.”
현관을 스쳐 지나가던 중, 불쑥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신발장 옆에 빼뚜름히 기대어 선 시목의 우산. 그것을 보는 순간 얼굴에 열이 잔뜩 올랐다. 새삼스러운 갈증에 목이 따갑기까지 하다. 은수는 마른 입술을 혓바닥으로 축이며 작은 소리로 신음했다. 그와 관련된 모든 것에 반응하는 자신이 낯설고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모든 건 그날 새벽에 시작됐다. 급작스런 정전에 하는 수 없이 그의 집에 머물렀던 그날. 은수는 또 다시 무심코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어둠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이전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누군가의 숨결 같은 것 말이다. 찰나 겹쳤던 손 끝과 살갗으로 느껴졌던 뜨거운 온도. 바람결에 인사하듯 살랑거리던 머리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느낀 감각들은 더욱 선명했다. 가까이서 느껴지는 시목의 숨결이 은수는 싫지 않았고, 언뜻 간질이는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비가 그치려면 꽤… 남았겠죠?’
곧장 손끝이 맞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만이 자리를 지킨다. 창밖을 응시하던 시목은 무심한 얼굴로 입을 뗐다. 그럴 것 같네요. 속삭이듯 뱉은 말에 한순간 마음이 바르르 끓어올랐다. 찰나의 눈맞춤 때문이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뜨거운 쇳물이 되어 뚝, 뚝 흘러내렸다. 그동안 애써 외면했던 감각들이 파도가 되어 눈앞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은수는 거의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얽힌 시선에 심장이 저릿했고, 눈두덩이 뜨거워졌다. 평온했던 마음이 소란스러워진 것도 그 때였다.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예감. 은수는 주먹을 말아 쥐며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속에서부터 울컥 올라온 무언가가 자신을 서서히 집어삼키는 것이 느껴졌다.
‘기자님.’
익숙한 부름에 고개를 들자, 시목의 얼굴이 보였다. 스치듯 마주친 눈에 가슴이 조여왔다. 은수는 숨조차 죽인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짙은 색의 눈동자. 그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모골이 서늘해지며 오싹 소름이 돋았다. 지금 이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은수는 입 속으로만 그 말을 되뇌어본다.
두려움? 아니면 공포?
아니다. 이 감정은 그것들과는 결이 달랐다. 혼란 속에서도 그 사실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따금씩 파르르 떨려오는 눈꺼풀과 달음박질 치는 심장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그 무엇도 아니라고.
입술을 부딪힌 건 순전한 충동이었다. 울컥 끓어오른 감정을 참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은수는 저도 모르게 성큼 다가가 그에게 짧게 입맞추었다. 입술을 삼키거나, 혀를 섞는 일 없이 그저 고요한 입맞춤이었다. 참았던 숨을 내쉬며 슬며시 뒤로 물러나자, 가까워진 시목의 얼굴이 보였다.
‘후회하겠죠?’
‘뭘요?’
‘지금 이 선택이요.’
시목은 말없이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은수는 가슴이 소란스레 뛰는 것을 느낀다. 바르르 끓어오른 감정이 멈추지 않고 자꾸만 바깥으로 흘러내렸다. 은수는 조금 망설였지만 이내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 들어올렸다.
‘날 비겁하다고 욕해도 좋아요. 그러니까,’
‘….’
‘한번만 더 하고, 없던 일로 해요. 우리.’
순간 그의 입술이 맞닿아왔다. 조심스레 겹쳐지는 손 끝과 얼굴 위로 우수수 쏟아지는 그의 뜨거운 숨결. 은수는 저도 모르게 아…. 하고 짧게 탄식한다.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불현듯 서글퍼졌다. 온갖 어두운 감정들로 점철된 덩어리가 자신을 짓눌러왔다. 언제부터 생겨났을지 모를 감정들이 자신을 좀먹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좋았다. 차마 그것들을 쳐내고, 잘라낼 수가 없었다.
은수는 그의 입술을 삼키듯 입맞췄다. 언젠가 이날을 후회하게 될 것을 직감했지만, 차마 멈출 수가 없었다. 시목은 그에 화답하듯 손을 뻗어 목덜미를 감싸쥔다. 은수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깊숙이 혀를 섞자, 심장이 마구 고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걸까? 무심코 떠올린 생각은 허리를 바싹 당겨 안는 손길에 묻혀 사라졌다.
결국, 그날 이후 남은 것은 깊은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실망감 뿐이다. 그와 입맞췄을 때 느꼈던 배덕한 해방감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영은수, 사실과 진실은 달라. 진실을 통해 맥락과 가치까지 다룬다면 좋겠지.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어. 취재를 통한 경험적 실재, 즉, 사실을 보도하는 게 우리의 의무라는 거야. 사실 위에 맥락과 가치가 덧씌워지는 순간, 팩트는 흐릿해져. 우리는 객관적으로 상황을 봐야만 해. 그러기 위해선 사적인 감정을 배제해야 하고.’
선배의 말이 맞았다. 사적인 감정을 지닌 채 객관적인 취재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지나친 감상과 몰입은 취재의 방향성과 목적을 희미하게 만들고, 결국 기사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기 마련이다. 은수는 이제와 되짚어본다. 그날 새벽의 자신은 왜 그 사실을 알고도 외면했던 걸까. 은수는 순간의 감정에 휩쓸린 과거의 자신을 차마 직면할 자신이 없었다.
사적인 감정을 덜어내야 해.
은수는 입 속으로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불필요한 감정이 취재에 독이 된다면, 그것을 쳐내는 것이 옳았다. 단순한 끌림을 이유로 지금껏 지켜온 기자로서의 신념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독 무겁다. 그와의 일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무거운 공기가 막중한 무게감으로 자신을 내리누르는 것만 같다. 은수는 불현듯 걸음을 멈추고 서서 여러 사진과 자료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2개월 가까이 공을 들여 얻어낸 결과물이다. 취재의 목표를 묻는 시목에게 자신은 무어라 답했던가.
‘진실을 알려서, 더 이상 희생되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죠.’
은수는 조금쯤 울적한 기분이 되어 다짐한다. 다시는 흔들리지 않기로.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심지 곧은 나무가 되기로. 스스로에게 하는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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