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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년 8월 13일
  • 13분 분량

여진시목

<빛의 자취>


고요 (트위터 @20l706l0)


인생에 있고 없을법한 것을 나누기는 쉽지 않다. 그 생각은 세월이 지날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더 확고해지는데 나 역시, 내 인생에 없을 법한 일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나서야 그 생각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나에게 없을 것 같았던 것은 사람들이 흔하게 느끼는 '감정' 이었는데, 그것은 있는듯하면서도 사실상 나에게는 거의 없는 것이었지만, 그 미묘한 경계에서 나는 큰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니, 않았다.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감정의 부재가 절실하게 느껴졌을 때 나는 필요한 것을 갈구하는 또 다른 '감정' 에 빠져들었고, 그렇기에 내 감정의 시작은 그토록 원했던 '애정' 이 아닌 '절망' 이었다.

놀랍게도 이것은 나의 '사랑' 이야기이다.

빛의 자취

눈을 떴을 때, 누군가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는 것은 시목이 성인이 된 이후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아니, 몇 번은 그 비슷한 얼굴을 보기는 했지만 일회성 인연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괜찮아요? 놀랐잖아요."

놀랐겠지. 시목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약간의 어지럼증이 남아있긴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느낌이다.

"조금 더 쉬다가요. 머리 부딪힌 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말 좀 들읍시다."

강하게 자신을 제지하는 손길에 시목이 약간은 놀란 표정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누워요."

그리고 그 작은 손가락에 밀려 자리에 누우며 시목은 생각했다. 조금 어지러운 걸 보니 머리를 부딪치긴 한 모양이라고.

시목은 감정이 부족할 뿐 아예 없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타고난 성격도 한몫을 톡톡히 해서 타인의 오해를 사는 것은 빈번한 일이었다. 보통은 조금 웃지 않아서, 말투가 딱딱해서, 유도리가 없어서라는 것이 이유였고 그것은 원칙주의자인 시목에게 사회 부적격자라는 타이틀을 달아주기에 충분했다. 원칙이 주가 되어야할 공직사회에서 유도리가 없어 평판이 좋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하지만 시목은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로 인해 몸이 고생한다고 하기에도 워낙에 일 중독자여서 역시나, 아이러니하게도 저 자신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 일을 좀 적당히 하셔야지."

"...왜요."

"왜라뇨. 검사님은 쉬지를 않잖아요. 좀 쉬어요. 주위 사람 걱정 끼치지 말고요."

팔짱을 끼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목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왜 그러는지 인지하지 못한 채 그저, 알았다고 답했다.

만난 것은 일 때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시목은 그녀와 종종 엮였다. 딱히 사적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길에서 만나 밥을 먹었다던가 하는 우연에 의한 상황들이 몇 번 있었다. 나중에서야 그런 것들이 인연이었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당시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 사람을 그냥, 수많은 타인 중의 한 명으로 보다가 어느새 자신이 먼저 알아보고, 인사하고, 혹은 일이 있어 먼저 전화를 하는 일이 생기면서 시목은 그녀가 자신의 내적 경계선 안으로 확실히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식사했습니까."

"웬일이래. 그런 것도 다 묻고. 안했으면요?"

"...그냥 물어본 건데요."

"아, 진짜."

자신에게 성을 내는 것이 재밌었다. 그래서 밥을 사고,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또 밥을 샀다. 밥을 샀으니 사주겠다 해서 또 밥을 함께 먹었다. 이 정도면 밥 친구라고 해도 될까.

친구라...그녀와의 관계는 정의하려 할수록 더 모호해져만 갔다.

이렇게 실없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는데. 시목은 책상에 쌓인 서류더미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던 어느 날이었다.

낯선 고통을 마주한 어느 날, 복도가 흔들리던 날. 다시 눈을 뜨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던 날. 시목은 한없이 가라앉는 감정을 느꼈다. 어디까지 추락하는 걸까. 감정은, 이토록 깊은 거였구나.

그리고 그즈음 남해로 떠나면서는 그녀와 이별을 했다. 고통과 이별로 혼란스러웠던 날들 속에서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 잘 지내요. 걱정하게 하지 말고!

그 문자는 흔적만 남은 감정의 점화였다. 시목은 휴대폰을 붙잡고 조금 울었다. 아니, 펑펑 울었던가.

바다를 바라보며 종종 시간을 흘려보냈다. 경계가 없이 밀려들어온 감정은 다시 온 것처럼 떠나가지 않을까. 그러기를 바라기도, 그러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책장을 넘기듯, 영화의 장면이 전환되듯 시간은 그녀와 시목의 사이를 자연스레 가로질러갔다.

많은 것이 변했다.

나도, 어쩌면 그녀도.

"검사님!"

"경감님."

"올~."

어떤 것에 대한 야유인지, 환호인지 모를 탄성을 뱉으며 여진이 한달음에 달려와 시목의 앞에 섰다.

"잘 지냈어요? 또 일만 주구장창 하셨나?"

"비슷합니다."

"그래도 좋아 보이네요."

"네, 경감님도요."

급한 일이 있는지, 여진은 시계를 한번 보더니 이따 전화할게요, 받아요. 하고는 시목에게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시목은 손을 마주 흔들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으나 여진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후다. 피식, 웃고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피부가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치고 올라와 시목은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혹시 얼굴이 달아올라 있지 않나 싶어서였다.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는 얼굴을 슥 매만진 시목이 옷매무새를 살폈다. 오래간만에 인사를 해야 할 사람들이 많았다.

과하다 싶은 환대를 받은 시목의 얼굴에 미미하지만 미소가 감돌았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적절한 '감정'을 가진 사회적 인간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웃기고 이상했지만, 시목은 정말로 이제 좀 모난 돌이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말에 신경 쓰고 살지는 않았는데도 감정은 지각변동이 일어나듯 내면의 판을 뒤집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행동을, 말을, 생각을 하게 했다.

여진에게 전화가 온 것은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고 저녁에 바로 약속을 잡았다. 종종 만나던 곳. 그 포장마차가 아직도 있다는 것에 시목은 한 번 더 웃었다.

“왔어요?”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여진이 손을 흔들었다.

시목은 순간 그녀의 손이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 손에서 무언가가.

마주앉은 시목이 손에 눈길을 주자 여진이 자랑하듯 시목의 앞에 손을 펼쳐 끼워진 반지를 자랑했다.

"어때요."

"...이상합니다."

"별게 다 이상하대?"

뾰로통한 얼굴을 한 여진이 시목의 앞에 빈 잔을 놓아주었다. 한잔해요. 그녀의 말에 시목이 잔을 든다. 시목에게서 이 술잔의 의미가 빠르게 바뀌고 있는 동안 여진이 자신의 잔을 내밀며 건배를 제안했다.

"반갑습니다."

"네. 늦었지만, 축하합니다."

무슨. 쑥스러운 미소를 지은 여진이 술잔을 한 번에 비워냈다.

"검사님 술 많이 늘었네."

연거푸 잔을 비운 시목의 빈 잔을 채우며 여진이 웃었다. 흘러내리는 여진의 긴 머리카락을 본 시목이 그제야 시간의 흐름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마음이 정말로 쓴 건지, 술이 쓴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 쓰디쓴 무언가를 그래도 삼켜내야 한다고, 시목은 자신을 다독였다. 어떤 일을 당해도 이런 마음은, 감정은 들지 않았었는데 이토록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은 자신은 아무래도.

"검사님."

"네."

"아, 술만 마시지 말고. 뭐 하고 지냈는지 얘기 좀 해봐요. 뭐, 재밌는 일은 없었어요? 바다 구경은 좀 했고?"

시목이 그런 여진을 빤히 바라보았지만, 여진은 이제 그런 것에는 당황하지 않았다. 되려 어? 하고는 재차 묻기까지 한다.

"바다는 좀 봤습니다. 딱히 재밌는 일이 없어서요."

"아니, 그렇게 좋은걸 보면서 어떻게 한번을 놀러오라는 소리를 안 해요? 사람이말야..."

"놀러요?"

"그럼. 우리가 그래도, 함께 한 시간이 있는데. 좋은 거 보면 좀 나누고 그럽시다. 앞으로는요."

앞으로는. 그 희망적인 말이 괴로운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마음을 폭격하듯 떨어져 내리는 감정에 시목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 저의 앞에서 여진은 웃고 있고, 손에 낀 반지는 빛나고, 술은 점점 올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괜찮아요?"

"조금, 어지러워서요."

"그러게 천천히 마시라니까."

여진이 건네준 차가운 물잔을 손에 쥔 채 시목은 눈을 감았다. 검사님!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새벽이 다되도록 사무실에 혼자 남아있을 때였다. 갑작스레 울리는 벨 소리에 빤히 전화기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수화기를 들었다. 늦은 시각 걸려오는 전화는 대체로 좋은 소식이 아니었기에 시목은 조금 긴장했다.

"검사님?"

"...경위님?"

"역시. 내가 촉이 딱 오더라니."

"무슨 일입니까. 이 시간에."

"일 거의 끝나지 않았어요?"

"...네."

"역시! 빨리 나와요."

나오라니. 시목이 엉거주춤하게 일어서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손을 흔드는 인영이 보인다. 여진이었다.

"나와요~!!"

수화기 너머에서 쾌활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늦은 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목소리였다. 뚝 끊긴 전화에 어이없는 웃음을 지은 시목이 서둘러 책상을 정리했다.

"그래서는 무슨. 그런 놈들은 발모가지를 확!"

여진이 양손으로 다부지게 나무젓가락을 두 동강 내는 모션을 취했다. 갈색의 얇은 점퍼를 걸친 여진의 모습이 썰렁해보여서 시목은 옅게 미소를 지으며 가운데 놓여있던 우동그릇을 여진 쪽으로 슬쩍 밀어주었다. 자연스레 그릇에서 국물을 떠 호호 불어 마시는 여진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목이 물었다.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면 피곤하지 않습니까."

"누구는?"

"경위님은 몸으로 뛰잖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 잊었어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시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러네요.

"서로 조심합시다. 나 정말, 검사님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여진이 내민 잔에 제 잔을 부딪치며 시목은 술잔을 기울였다. 저도요 라는, 뱉지 못한 말이 씁쓸한 알콜을 희석시키며 부드럽게 넘어갔다.

시목이 남해로 떠나게 되기 몇 달 전이었다.

관계의 변화는 롤러코스터처럼 급변했다. 그것이 바닥으로 치닫는다 할지라도 그 변화에 제동을 걸고 싶어 하는 이는 없었다. 이전과는 다른 눈 맞춤과 규칙적인 통화, 의미 없는 안부 인사 같은 것들.

가끔 외근을 나갔던 여진이 지검으로 퇴근을 했다. 시목의 차를 뒤따르는 여진의 차가 종종 목격되었지만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여진도 시목도, 자신들조차 그것이 이상하다고는 느끼지 못했으니까.

괜찮아요?

밥 먹었어요?

하지만 단순한 안부인사는 그 이후로 시목을 잘 지내지 못하게 했다. 함께 걸으며 어깨가 부딪히는 순간과 눈을 마주치며 진지하게 대화하는 순간들이 버거워졌다.

이것은 친구가 아니었다.

"괜찮아요?"

그 언젠가처럼 안부를 묻는 여진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진다. 잠시 어지러운 머릿속을 가다듬은 시목이 천천히 눈을 떴다.

"검사님."

황급히 일어나 앉은 시목이 지근거리는 이마에 손을 올렸다.

"뭐가 급하다고 그렇게 일어나요. 어지럽게."

차가운 물을 제 앞에 가져다 놓는 여진의 모습의 익숙하게 느껴져 시목이 생각에 잠기자,

"왜요, 또 기절하시게."

하고 여진이 타박하듯 말했다. 그러게 술을 좀 천천히 마시라니까. 안보는 사이에 성격이 이상해졌어.

들으라는 듯 소리 내어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시목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르는 공간. 하지만 이전에 옥탑 방에서 보았던 여진의 감성이 묻어있는 따듯한 느낌의 집이었다.

"어디..."

"짜잔~ 한여진의 뉴 하우스~"

양팔을 활짝 벌린 여진이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정식으로 집들이 하려고 했는데 뭐, 이렇게 된 이상 특별히 검사님한테만 먼저 보여주는 겁니다."

"왜 여기로..."

"아니 갑자기 그렇게 쓰러지니까 응급차 부를 뻔 했잖아요. 검사님 집을 찾아간들 비밀번호도 모르고. 그래서 이렇게, 새집으로 모시고 온 걸 감사하게 생각하시란 말입니다."

"...미안합니다."

여진의 말을 멍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시목이 간신히 한마디를 뱉어냈다.

"...미안하면 물 마셔요. 물."

그제야 천천히 물을 마시는 시목을 바라보며 여진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생각보다는 시간이 많이 지체된 것은 아니어서 내심 안심을 하고 있던 시목에게 여진이 차분히 물었다.

"검사님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 말입니까."

"아니, 안하던 짓을 하니까. 술을 왜 그렇게 급하게 마셨어요?"

"...그러게요."

잠시 뜸을 들이던 시목이 가보겠습니다 하고는 인사하며 일어선다. 그대로 돌아서서 현관으로 나선 시목에게 여진이 물었다.

"또 보는 거죠."

그 이상한 물음에 몸을 돌려 여진을 바라보는 시목에게,

"아니, 검사님 좀...뭐랄까."

어색한 표정으로 코를 긁적이던 여진이 이내 그 손을 들어 허공에 휘휘 저었다.

"에이, 아니다. 조심히 가요. 내일, 아니 오늘 연락할게요."

"...왜..요."

"속 풀어야지."

고개를 끄덕인 시목이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문틈 사이로 따뜻한 여진의 공간이 점점 좁아지는 것을 바라본다. 시목은 꽉 닫힌 현관문 앞에서 잠시 서 있다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듯 천천히 뒤돌아 복도를 걸어갔다.

은수가, 그래 은수가 그랬지.

시목은 타들어가는 감정의 경계를 느끼며 은수를 떠올렸다.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거나 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은수가 떠올랐을 뿐이었다. 내가 잘 버티고 있는지 물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녀일 것 같아서.

끝까지 이기적이시네요. 선배.

그 단단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해 시목은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깊어지는 감정은 그와 비례해 추악하구나. 서늘한 바람이 마른입술을 툭툭 스치고 지났다. 시목은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새벽녘 어두운 길을 천천히 걸어 집으로 향했다. 그 어두운 길가에 시목은 하나둘, 메마른 감정을 털어냈다. 자연스레 지는 감정은 떨구어내고 아직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감정들은 뽑아내었다.

그래, 사실 이것은 나의 '이별' 이야기이다.

시목은 아주 오래간만에 꿈을 꾸었다. 성인이 되어서 이토록 크게 마음의 동요를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꿈은 그것과 반대로 몹시 평범했다. 여진을 만나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전화를 받는.

하지만 그 일상들 속에서 자신은 사회 부적격자이고 감정이 누락된 불쌍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갈피마다 끼워 넣는 또 다른 자신이 있었다.

그것들은 매우 또렷해서 꿈이라고 인지하지 않으면 그 어느 날. 이라고 칭해도 될 거 같은 평범한 일들의 나열이었다. 그 일상은 잔잔한 바다 위에 떠 있는 돛단배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그래서 시목은 조금 의아해졌다.

자신이 서 있는 현실이, 이곳에서의 낯선 감정들이 진짜일까. 아니면, 꿈에서 본 현실이 진짜일까.

감정이란 것은 눈에 띄지 않아 좋다는 생각을 했다. 내면의 파도는 허상이고, 아무리 깊은 우물에 빠진들 나오지 못할 것도 없다고. 모호한 감정과 입에 담기 간지러운 말들을 치워내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이전처럼 일상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만년필의 끝에 햇살이 닿아 반짝이는 것을 볼 때면 종종 여진의 반지가 생각났다.

"이 그림은 뭐에요? 애기가 있으신가."

참고인으로 앉아 있던 여자의 말에 시목은 아닙니다. 하고 말았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출처가 불분명해 말이 많았던 그 그림은 여진이 시목을 그려 선물해준 것이었다. 모니터 가장자리에서 책상 위로 자리를 잡은, 웃고 있는 얼굴. 황시목.

어둑해진 밤에 퇴근을 하면 인적이 드문 공간과 공간 사이로 짠내가 날아들었다. 그 냄새를 따라 바닷가로 나섰다. 먹물처럼 검게 물든 바다는 저 먼 곳의 큰 일렁임으로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시목은 서울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이, 감정들이 그 검은 일렁임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뭐해요?

멀리서 오징어잡이 배가 밝힌 등이 하나둘 켜지듯 여진의 문자는 종종 시목의 어두운 내면을 밝혔다. 반짝하고 밝아졌다 사그라지고 다시 반짝 하고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바다요. 바다를 봅니다.

문자 대신 읊조리듯 작게 답한 시목이 천천히 몸을 돌려 모래사장을 빠져나갔다.

습관처럼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뱅뱅 돌리며 생각에 잠겨있던 여진이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저저, 또 딴생각. 애인한테 차였나 요즘 왜 그런대?"

타박하며 지나가는 누군가의 (누군들)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한 여진이 휴대폰을 꺼내 책상에 탁, 하고 올려놓았다.

"나도 바쁘다 이거야."

그러다가 다시 그것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작게 한숨을 푹 내쉰다. 어렵네. 늘 어려움을 갱신하는 사람이야.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여진이 잡생각을 지우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정보통 만나러 가요~"

"니가 정보통이 어딨어! 혼자 영화 찍는 거야??"

그렇다면 그런 줄 알지.

여진은 농땡이를 부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말 그대로 정보통을 만나러 나가는 길이었다. 주위 사람들도 정보통 그 자신도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시목은 여진의 연락을 의도적으로 몇 차례 피했다. 한여진은 상황을 꼬아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바빠서 받지 못했겠거니 하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시목은 그녀가 생각보다 더 행동력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간과했다.

"검사님!!"

"경감님."

놀란 시목이 걸음을 멈췄다.

"아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여긴 어쩐 일로."

"나요? 내 정보통 만나러."

정보통? 시목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가요, 밥 먹어야지. 일부러 시간 맞춰왔는데."

"...예."

시목이 느릿하게 답했다.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을 모르는 척 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시목은 과거에 어떤 부분에서 환멸을 느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이후로 시목은 한동안 환멸과 함께였다. 왜 이 순간 그 감정이 떠올랐을까. 사실 환멸은, 반지를 보던 순간 잠시 느꼈을지도 모를 절망은, '감정'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가볍게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여진을 보며 시목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감정이 아니라 그저 고통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는 것을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또 다른 고통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 어느 날 환멸이 다가온 것처럼, 시목에게 그렇게 절망이 다가왔다.

"뭐, 두고 왔어요?"

"아닙니다."

여진은 미묘하게 달라진 분위기의 시목을 힐끔거리다 물었다.

"왜 연락 안했어요. 속 풀어준다니까."

시목이 멀뚱하게 여진을 바라보자,

"아니, 그날. 검사님..."

"아."

뭐, 바쁘셨겠죠. 여진이 웃으며 자문자답을 했다. 평소에도 말이 없는 편이지만, 공기의 흐름이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한 여진이 천천히 밥을 먹기 시작한 시목에게 말했다.

"무슨 일...."

"반지는."

반지? 갑작스러운 시목의 질문에 여진이 자신의 빈손을 보고는 아~ 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았어요. 잠깐 빼놨지."

여진의 말에 시목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침묵했다.

"집들이하려고요."

"네."

"휴지라도 사와요."

"갈 수 있을지..."

"아, 진짜."

여진이 들고 있던 수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검사님. 왜 그래? 안 그랬잖아."

"...왜 갑자기 반말을."

"아니, 이상하잖아요. 꽁해가지고. 나한테 서운한 거 있어요?"

시목은 여진의 말에 놀란 듯 얼굴이 굳어졌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한 표정에 여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연락도 안 되고, 말도 안 하고 정말로 나한테 할 말 없어요?"

"네, 없는데요."

"나는 있는데."

시목이 굽혔던 상체를 펴 의자에 몸을 기댔다.

"뭡니까, 할 말이."

"보고 싶었어요."

시목은 잠시 느슨해진 손에 다시 힘을 주었다.

"무슨."

"검사님 보고 싶었다고요. 그러니까, 나 피하지 마요."

시목은 마주한 여진의 눈동자에서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했던 시목이 다시 입을 다물자 그것을 본 여진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평온하게 말했다. 국 식어요.

어떤 것을 뒤돌아봐야 하는 순간이 생길 때, 자신이 지나쳐온 걸음걸음을 등불 삼아 되돌아가야 할 때. 사람들은 그 순간을 어떻게 견뎌내는 것일까. 시목은 기억, 추억, 후회.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과거의 시간들을 밝혀줄 자취가 없었다.

서류더미 속에서 갈피를 잃은 손이 허공에서 멈추기를 반복했다. 지지부진한 것은 딱 질색이었다. 하지만 시목은 그 검은 일렁임을, 끝없이 추락하던 감정의 깊이를 다시 들여다보려 하는 마음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지근거리는 이마를 꾹꾹 누르다가 던지듯 볼펜을 책상 위에 놓았다. 데구르르 구르던 볼펜이 책상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 가장자리에서 간신히 멈춰 섰다.

친구일까, 아닐까.

사랑일까, 아닐까.

절망일까, 아닐까.

이 모든 것은 고통일까, 아닐까.

볼펜이 어디로 기울어질지 바라보는, 그 의미 없는 행동을 한참동안 하다가 시목은 한숨을 내쉬었다.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뉴스를 보며 출근 준비를 하던 시목이 작은 진동소리에 휴대폰을 확인했다.

-비가 온대요.

시목은 순간, 마음속에서 작은 불빛이 반짝하고 켜졌다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어느 날 밤처럼. 커튼을 걷자 어둑어둑한 아침의 음울한 기운이 유리창을 뚫고 밀려드는 듯하다. 그 보이지 않는 일렁임 속에서 불빛 하나가 수면에 떠있는 것처럼 천천히 흔들렸다.

장마는 그 어떤 것도 시원스레 해결해주지 못한다. 장마 뒤에 남는 건 축축한 불쾌감뿐이다. 시목은 자신이 이제 무척 '감정'적인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아니, 감정이든 고통이든 상관이 없어졌다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보고 싶었다. 

그 말을 작게 읊조려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일으키는 파면의 끝에 누가 있는지 떠올려 본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을 떠올리는 자신이 이제는 이곳에 또렷한 자취를 남기려 한다.

밖으로 나서자 습한 공기가 훅 밀려들었다. 뿌옇게 흐려진 세상으로, 그 감정의 일렁임 속으로 시목은 발을 내디뎠다.

◇◆◇

"보물 상자."

"어?"

아이는 제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어른을 만난 것이 기뻤는지 여진의 소맷자락을 얼른 붙잡았다. 탐문 수사 후 복귀하려던 여진이 아이를 만난 것은 해가 막 지기 시작한 어둑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지금 혼자 보물 상자를 찾고 있다고?"

아이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올망졸망한 눈에는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떨어질 듯 말듯, 눈물방울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부모님은? 집은 어디니?"

여진의 말에 아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여진은 멀리서 저를 기다리는 차를 한번 바라보고는 아이의 손을 꼭 붙잡았다 놓았다. 여기서 기다려.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는데..."

별 이상한 사람이 다 있네. 아이가 말하는 보물 상자라고 하면 끽해야 깡통 상자처럼 생겼을 텐데. 그걸 집어가나.

"부모님은 언제 오시는데?"

다시 입을 다문 아이를 살살 달래 대략적인 사정을 들은 여진이 시간을 확인했다.

"해야지. 아동보호. 그치?"

그렇게 여진과 아이의 보물 상자 찾기가 시작되었다. 한차례 탐문수사로 동네를 어느 정도 파악한 여진이 아이의 손을 잡고 골목을 누볐다.

"배 안 고파?"

여진의 말에 아이가 제 배에 손을 올렸다. 배에 손을 올리면 알 수 있는 걸까? 여진이 웃으며 떡볶이 사줄까? 하고 묻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업으로 낮에는 대부분 비어있는 집들. 밤에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좁은 골목. 범죄에 취약한 동네다. 여진은 등에서 전해져오는 작은 온기를 느끼며 슈퍼 가게 사장님께 알아낸 아이의 집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연이은 오르막길에 잠시 허리를 펴고 섰을 때였다. 듬성듬성 켜져 있는 가로등 아래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어?”

여진이 조심스레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었다.

“진짜...보물 상자네.”

상자는 여진이 상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보물 상자. 라고 쓰인 핑크색의 낡은 상자 안에서 차르륵 하며 뭔가 구르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눈을 뜬 아이를 등에서 내려준 여진이 상자를 건넸다.

“나 주는 거야?”

아이는 상자를 조심스레 열어서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여진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여진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대로 아이의 손을 잡고 돌아서는데 언뜻, 또 다른 반짝임이 눈을 스친다. 이내 여진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부촌에서 다리 하나를 건너면 아이가 사는 동네였다. 부촌 사람들은 분명 절도범이 이 동네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분실된 귀금속까지 발견되었으니 그 의심은 확신이 되어갔다. 소문은 빠르게 번졌고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해서라도 조사는 불가피했다.

“협조를 해주시면...”

“협조고 뭐고, 일 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지금 뭐요? 그 목걸인지 뭔지가 내 호주머니에서 나왔대도 안 한 거는 안 한 거요!”

“자꾸 이렇게 협조 안 해주시면 공무집행 방해...”

“방해는 무슨 방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을 지금 방해하는 게 누군데!!”

방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자 남자는 다시 한 번 버럭 화를 내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를 달래는 목소리가 잠시 들려오고, 다시 밖으로 나온 남자의 곁에는 어린 여자아이가 서 있다.

“무슨 일이야?”

뒤늦게 합류한 여진의 목소리, 드러난 익숙한 모습에 겁에 질려 있던 아이가 달려와 품에 안긴다. 그 모습을 본 아이 아버지의 표정에서 서서히 적개심이 사라지는 것을 본 여진이 남자에게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CCTV가 없는 작은 동네에서는 주민들의 말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남자는 인적이 드문 동네에서 어느 날부터 사람들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사람들이요?"

"처음에는 동네도 어둑하고 하니 애들이 몰려다니나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더만."

"왜요?"

"애들이 그러고 숙덕거리나? 지들 좋을대로 떠들고 소리치는 게 애새끼들이지. 근데 안 그러더라고."

"확인은 따로 안하셨어요?"

"눈 붙이기도 바쁜데 뭘 확인을 해. 것도 잠결에 들은거라..."

"그런 일이 몇 번이나 있었나요?"

여진은 남자와 또 다른 주민들의 증언들을 취합해 보며 근래 일어났던 상황들에서 왠지 의도성이 느껴지는 것 같다는 의심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왜? 대체 누가?

-의도적이라면, 어떤 빌미를 만들려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빌미요?

-동네 평판을 안 좋게 한다던가 하는 거요. 그럼 실질적으로도 지역 가치가 떨어지겠죠. 입지가 좋다면 고의로 가치를 떨어트려서...

-싸게 투자를 하겠다는 거군요.

-재개발을 앞둔 곳입니까?

-...검사님 서울에 누구 심어놨어요?

-끊습니다.

웬만한 정보통 보다 낫다니까. 시목과의 통화를 마친 여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면 좋겠지만 설령 이 가정이 맞더라도 입증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여진이 해야 할 일은 단순했다. 절도범을 잡는 것. 나아가서 그 사람들의 나쁜 의도를 막는 것. 그런데,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즈음 범인이 자수를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밖에 있던 여진이 황급히 서로 복귀했다. 

"어, 니가 왜 여기에 있어?"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아이가 여진에게 달려왔다. 멀리서 아이의 아버지는 조사를 받고 있었고, 그 상황에서 여진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아이는 제가 준 반지를 끼고 있는 여진의 손을 보고는 배시시 웃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여진이 뭔가가 생각난 듯 몸을 숙여 아이에게 물었다.

"보물 상자, 어디 있어?"

여진이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반지를 꺼냈다. 신기하게 잘 맞는단 말이야. 혹시라도 중요한 물건인가 싶어 아이 아버지에게 물어봤지만, 어디서 생긴 싸구려 반지일 뿐인지 별 상관이 없다는 반응이다. 그럼에도 여진은, 그 반지가 이상하게도 어떠한 증표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반지와 함께 찾은 분실물이자 증거품이라던가, 계속해서 이어진 아이와의 인연, 또 다른 사건의 시작이라던가 하는 것들. 아직까지는 그 누구의 불행도 기쁨도 아닌 이 기로에서 여진은 이 반지가, 그리고 인연이 부디 좋은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가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며칠 뒤, 상자에서 누군가의 지문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분실된 귀금속에서는 지문이 나오지 않아 동일범이라는 확신을 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그 두 물건이 함께 있었으니 충분히 고려는 해볼 수 있게 되었다. 아이의 상자를 함께 놓음으로써 아이의 아버지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들어간다... 생각에 잠겼던 여진은 문득, 아직 확실한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심증만으로 일을 무리하게 진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우려가 생겼다. 

"그럼 또 방법이 있지."

여진이 다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네요.

-그럼 아닌 걸까요?

-아니요. 맞을 가능성이 더 높죠.

-왜요?

-기본적으로는 그것이 범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물론 아이 아버지에게 뭔가 딜을 제시했다면 그 순간부터 어떤 자각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전까지는 단순히 나쁜 짓 정도로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범인은 전문적인 절도범이나 범죄자가 아닌, 그저 동네 주민일 테니까요

-그럼 건너편 동네 사람들을 대상으로 다시 조사해봐야겠네요.

여진이 특유의 다부진 목소리로 말했다.

-또 연락할게요.

-네. 그러시죠.

-다음엔,

이어질 여진의 말을 기다리는 듯 시목에게서는 답이 없다.

-다음엔, 다른 용건으로 전화할게요.

-어떤...용건이요?

-...일 이야기 말고 다른 거?

-다른 거요?

-뭐, 덕담...같은 거?

-아...네.

여진의 말에 흔치않은, 웃음기가 담긴 시목의 답이 들려왔다. 왠지 쑥스러운 느낌이 든 여진이 괜스레 손가락에 낀 반지를 뱅뱅 돌렸다.

◇◆◇

여진은 아직 어색하기만 한 반지의 촉감이 꼭 저와 시목의 관계 같다고 생각했다. 놀랍도록 손가락에 꼭 들어맞으면서도 쉽게 익숙해지지는 않는. 여진은 시목을 처음부터 특별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남해로 떠나게 되었을 때, 아이들이 어설프게 쌓아올린 블록처럼 맺어진 관계가 쉽게 무너질까 걱정스러웠을 뿐이다. 우리는 상처를 입었고 서로를 보듬어줄 시간이 없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인내해야할 시간에 그 서툰 수용의 시간들이 상처 입은 마음을 잘 치유해주기를 바랬다. 

-집들이는 언제 합니까.

여진은 한참동안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허공을 잠시 헤매던 손가락이 천천히 액정 위를 두드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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