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8월 13일
- 4분 분량
논커플링, 황시목
<돌이킬 수 없는>
유경 (트위터 @melliflxoxs)
1. 시목이 트렁크를 열고 갖은 짐을 정리해 넣었다. 직접 그를 배웅하러 나온 강 지검장이 연신 한숨을 내어쉬었다. 그러다가 땅 꺼집니다, 시목의 건조한 농담에 원철은 쓰게 웃었다. 그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씰룩였다. 제딴에는 웃어보이려는 노력이었는데, 상사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몰라 금방 그만두었다.
“시목아.” 강 검사장이 불렀다. “네.” “이거 유배 아니다. 금방 올라올 거야.” 시목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유배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진작 났어야 하는 발령인데요.” 그래서 원철이 조금 웃었다. 자식, 예나 지금이나 바뀐 게 하나도 없다. “가겠습니다.” 시목이 고개를 숙이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가라. 운전 조심하고.” 강 지검장이 손을 흔들었다. 시목은 예, 하고 답하며 트렁크를 닫고는 차에 올라탔다. 검사장을 뒤로 하고, 시목이 탄 그랜저가 점점 멀어졌다. 그렇게 멀어지고 멀어지다가 작은 점처럼 변했을 때, 원철은 자켓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와 라이터를 찾았다. 2. 「…… 이번 주 장마전선이 수도권과 강원, 영남, 제주 지방을 강타하면서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강풍을 동반한 강한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오후에는 영남 지방에 150에서 200mm 사이의 집중 호우가 내리겠습니다.」
시목이 와이퍼로 유리창을 닦았다. 툭, 툭 떨어지는 빗소리와 함께 라디오에서 일기 예보가 시작됐다. 아니나다를까. 경부고속도로를 타자 마자 번개가 빠르게 발광하며 마른 하늘을 가르더니, 그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옥산 분기점을 통과할 때쯤 거센 비가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에 서울을 올라갔다가 온 것이 잘못이었나 보다. 시목은 아이고, 하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 끝으로 핸들을 두드렸다. 그러다가 문득 조수석 쪽의 사진에 시선이 닿았다. 특임 시절, 모두가 함께였을 때다. 3. 은수가 찾아오던 날에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다. 우산이 없었다. 빗물에 푹 젖은 몸으로 인터폰을 올려다보면서 선배님, 하는 걸 그대로 돌려보내면 매정하다는 소리를 들을까 싶어 문을 열어주었다. 현관에 서서 오들오들 떠는 은수에게 수건과 제 옷을 건네주었다. 그애가 머쓱해한다는 걸 알면서도 은수야, 하고 불러주지 않았다. 영은수. 꼭 성까지 붙여 그렇게 불렀다.
「선배님, 영은수는 너무 정 없어 보이잖아요. 은수야, 이렇게 불러주시면 안 돼요?」
「우리 사이에 무슨 정이 있어. 씻어.」 뚝뚝한 목소리에 은수는 입을 비쭉이며 욕실이 어디예요, 하고 물었었다. 시목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소파에 기대 눈을 감았다.
사건 전날, 사위가 푸른 밤이었다. 4. 창준의 장례를 조용히 치렀다. 연재의 뜻이었다. 우리 그이 가는 길, 시끄럽지 않게 해 줘요. 시목은 연재의 울음 섞인 부탁을 기억했다. 이제는 한조 그룹의 대표이사가 된 전 상사의 사모였다. 시목은 언제나 연재의 곁에 서 있던 창준을 생각했다. 봉황열반 鳳凰涅槃, 욕화중생 浴化重生. 봉황이 스스로를 불사르고 더욱 강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 말은 꼭 창준을 이르는 것 같았다. 검찰이 소유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존재였다. 죽지 못해 살아져서, 궁창에 몸을 담근 자신의 모습을 견디다 못해서 창준은 모든 것을 무너뜨리기로 결심했다.
시목아, 썩다 못해 부패한 모래성은 언젠가 무너지는 거야. 무너지는 게 뭘 뜻한다고 생각해. 튼튼한 석조 건물을 다시 세울 수 있다는 얘기야.
창준의 육신은 죽었다. 심장이 박동하지 않는다. 숨을 쉬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5. 역사에 이창준이라는 이름 석 자는 괴물로 남겨질 것이다. 한국 전쟁이 났을 때 다리를 끊고 도망갔다는 어느 대통령의 이야기처럼, 여자 가수를 불러 가무를 즐기다가 총살당했다는 어느 독재자의 말로처럼. 검찰 내부에서도 오래도록 그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원래도 그랬지만, 사건 이후 시목은 이프로스(검찰 내부 인트라넷)의 게시판을 잘 보지 않았다. 특임, 영일재, 무능, 이창준, 비리, 자살, 영은수, 살해. 단어들이 이진법의 세계를 맴돌며 흉기가 되었다. 말들이 시시때때로 시목을 찔렀다. 견딜 수 없었다. 6. “잘 도착하셨습니까아.” 전화 속 여진의 목소리가 늘어졌다.
“술 마셨습니까?” 시목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대작할 사람은 통영에 있는데, 이게 무슨 예의인지. 참.”
“아니이, 비도 오고 그래서. 오랜만에 영 검사님 생각이 나서. 특임 할 때도 생각나서. 다아.” 여진의 혀가 꼬부라졌다. 불 꺼진 집이 화안하게 빛나며 번쩍, 했다가 우르릉 천둥이 쳤다. 여진의 콧노래와 시목의 헛기침 소리가 한 데 섞여 불협화음을 냈다. 여진이 흐흥, 하고 웃었다.
“왜 웃습니까?” 시목이 물었다.
“그냥요. 검사님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용.” 여진이 웃었다. “검사님은 변한 게 하나도 없어.”
“변해야 하나요?” 시목이 물었다.
“너무 많은 게 변했어요. 그른데 하나도 기쁘지가 않아.” 여진이 주정 비슷한 투정을 부렸다. “검사님은 안 변했어. 하나두 안 변했어.” 흐흥,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여진이 다시 웃었다. 아이고……, 시목이 한숨을 쉬었다.
“얼마나 마셨습니까?”
“한 병 반 쪼오끔 넘게요. 근데 오늘 술이 안 받네. 에이.” 여진이 짜증을 냈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천둥이 쳤다. 수화기 너머로 여진이 웅얼거렸다.
“검사님.”
“예.”
“뭐가 문제였을까요?” 여진이 울먹였다. “네?”하고 시목이 되물었다.
“뭐가 그렇게 문제였을까요? 영 검사님도, 이 수석님도. 왜…….”
왜, 라니. 정말이지 시목은 할 말이 없었다. 그건 그 자신도 수없이 고민해본 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왜.
은수의 앳된 숨결은 어쩌다 흐드러진 서천 꽃밭을 헤메이게 되었나. 창준의 혼은 어째서 굽이굽이 펼쳐진 북망산 자락을 한없이 돌고만 있나. 그렇게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한 꽃망울들은 왜 스러져야만 했나.
검사님, 하고 여진이 시목을 불렀다.
“네.”
“제가 괜한 말을 했나 봐요.”
“…… 어쩔 수 없었던 겁니다.”
“네?” 이번에는 여진이 되물었다.
“상황이 그런 거고, 세월이 그런 겁니다.”
남은 사람들이 아무리 이유를 고민해봐도 여기에는 답이 없어요. 시목의 말에 여진이 발끈했다. “영 검사님은 아직 어렸잖아요.”
“아흔 살 먹은 노인도 죽고, 열 살배기 어린 애도 죽습니다.” 시목이 대꾸했다. “이제 와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씨이, 진짜…….”
삐 삐 삐, 소리가 이어지더니 여진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시목은 깜빡이는 휴대폰 화면을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좀 있으면 그렇게 전화를 끊어 미안하다며 카톡을 보낼 사람인 걸 알고 있지만 시목은 괜히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
빗방울이 발코니 창문을 두드리며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 수술 이후 지금껏 단 한 번도 흘려보지 못한 눈물들이 방울져 내리는 것 같았다. 뭇사람들은 바로 이런 마음을 외로움이라고 하는 것일 테다. 시목은 생각했다. 지나간 인연들이 괴로웠다. 돌이킬 수 없게 된 모든 것들이 그리웠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장마가 시작된 지 사흘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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