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 2020년 8월 12일
  • 3분 분량

논커플링, 영은수

<너를 그리워하며>


지걷 (트위터 @___jiokgil)


* 비밀의 숲 시즌 1의 스포일러가 많이 담겨 있으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내가 죽은 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그날 내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심장이 멈추고, 천천히 혹은 빠르게 식어간 후에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다. 미디어에서는 사후세계를 여러 방면으로 표현했다. 천국과 지옥, 이승과 저승, 동서양 혹은 문화에 따라 천차만별인 공간. 진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는 이 공간은 일반적으로 아는 개념보다는 누군가의 강한 사념이 만들어낸 공간 같아 보인다.

하얗고 긴 세트장과도 같은 곳이다. 길은 나 있고 나를 인도하는 것 같지만 왠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방에는 안개가 자욱하니 갈래도 갈 수 있을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살아있을 적(이렇게 부르는 것도 처음엔 치가 떨리도록 어색했다.)에는 누가 막아도 전진을 일삼던 나였는데, 고작 손목을 쥐어도 가슴에 손을 데어도 심장 고동 소리 하나 안 들린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이렇게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것이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겠거니 싶었다. 죽으면 죽는 거라고 호기롭게 부르짖던 내 모습은 죽은 후에 겨우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애써 바람이 머리카락을 건들고 갔다고 치고 넘어갔다.

하아, 하고 입에서 숨을 뱉은 후에 머리에 흐르는 피를 코트 소매로 대충 닦았다. 통증은 없었다. 주저앉아 있었기에 허리를 펴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것도 없는 공허를 뒤로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길이 나 있다고는 했으나 그 길도 앞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마치 미로와도 같은 길이었다. 벽을 만지고, 그 매끈함을 느끼고, 얼마나 단단한지도 가늠해보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퍼즐 게임을 푸는 듯 왼손으로는 벽을 훑고 주춤거렸다 망설이기를 반복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따금 저기요, 하면서 공포 영화의 주인공처럼 누가 있을까 하며 불러 보았지만, 이 넓은 공간에는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그러다가 막다른 길에 놓인 작은 텔레비전을 발견했다. 내가 갈 길은 따로 있었는데, 시선을 훔치는 건 다름 아닌 신호를 받는 게 불안정해 보이는 텔레비전 화면이었다. 시간 감각을 잃어버려 얼마나 응시하기만 했는지 모르겠다. 벽에 붙인 손을 떼고 방향을 틀고는 걸어가 텔레비전 앞에 몸을 수그리고 앉았다. 자세히 보니 다이얼을 돌려 채널을 맞춰야 방송이 나오는 구식 텔레비전이었다. 이건 내가 어렸을 때도 못 봤던 건데. 안테나, 버튼, 스크린. 이곳에 이런 골동품이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은 채 온전히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로 상태는 좋아 보였다. 행여나 고장이 날까 봐 다이얼을 살살 돌려 텔레비전 화면에 무언가가 비치게 조정해보았다. 얼마 동안은 지직거리며 나를 불편하게 만들더니 어느 순간 딱 맞는 지점을 찾은 것 같았다. 죽어서도 쾌감을 느낄 수 있어 다행이었다.

화면에는 우리 가족이 담겨 있었다. 내가 뭣도 모를 시절에 하필이면 장래 희망이라는 것을 알아버려 아버지처럼 훌륭한 법관이 되겠다고 처음으로 말을 할 때. 이런 건 대체 누가 갖다 놓은 거야. 괜히 코끝이 찡해진다. 그 후로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중학교 친구들과 함께 어울릴 때, 고등학교에 가서 피 터지게 노력해 결국 당당히 대학에 갈 때... 나 영은수의 일대기가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던 영상은 어느 한순간에 도달하자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이 부분, 중요한가?

검은 우산을 쓴 남자가 비도 오지 않는 밤에 길을 걷고 있다. 필히 황시목 선배님의 집 앞에서 본 남자일 것이다. 촉이 그리 말해준다. 그리고 그 남자가 차에 타려고 우산을 내리자마자......

“......”

맞다. 나를 죽인 남자. 눈을 질끈 감았다. 진정이 되지 않아 더는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이루지 못한 사명이라면 끝까지 해내야 하는 것이 맞다. 입꼬리의 떨림을 오롯이 느끼며 다음 장면을 보았다.

남자는 큰 건물 앞에서 내렸다. 우산은 접은 채로 들고 내려 다시금 눈도장을 찍게 해줬다. 그리고 들어간 곳은... 한조, 라고.

거기에서 영상은 끝났다. 텔레비전은 다시 요란한 소리와 함께 회색 화면을 내었고 나는 전원 버튼을 더듬어 눌렀다. 검은 화면에는 내 모습이 비쳤다. 아까까지는 몰랐지만, 어지간히도 엉망인 피투성이 내 모습을 보니 머릿속에는 불꽃이 튀어 오르는 것처럼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완주. 어디가 끝이고, 가는 길도 방향도 심지어 목적도 모르는 이 길을 완주하는 것이다. 다만, 늦지 않게...... 일어나려고 땅을 짚었는데 손가락에 치이는 무언가가 보인다. 익숙한 형태의 유에스비다. 집어 올려 뒤집어보니 누군가 네임펜으로 2017. 이라고 라벨링을 한 게 보인다. 손아귀에 꽉 쥐니 그제야 유에스비의 온기가 전달된다. 이거다. 이게 내 키야. 텔레비전에 마지막으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뛰쳐나갔다. 뿌옇게 깔린 안개는 언제부터인지 가라앉은 후였다.

“......는 거 준비해!”

“...심박수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영은수의 마지막을 항상 아쉬워했어요. 시즌 2가 오면서 그리워하기도 했고. 저와 같은 마음인 분들께 바치는 if 영은수가 살았다면? 사경을 헤메고 있었을 때의 은수는? 이라는 몇 가지 생각을 가지고 쓴 짧막한 글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