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8월 13일
- 8분 분량
원철세원
<가능한 미래>
102 (트위터 @see_what_)
0.
“소원이 있어요.”
1.
더 철저한 수사로 사건의 진상을 확실하게 조사하겠다고 이야기하는 시목의 얼굴에는 며칠간 누적된 피로가 여실히 드러났다. 눈에 띄게 가칠해진 뺨을 바라보던 원철은 문득 그렇다면 제 얼굴은 시목에게 어떻게 보일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원철은 시목의 감상을 묻는 대신 범인을 검거한 것을 축하한다는 인사를 꺼냈다. 원철은 ‘범인’이나 ‘검거’ 따위의 단어를 발음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평소처럼 무덤덤하게 들린다는 것에 조금 놀라고, 이어 시목이 자신의 표정을 필요 이상으로 깊게 살피지 않는다는 데에 안도했다.
시목이 방을 나간 후에야 원철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책상 앞에 무너지듯 앉았다. 긴장이 풀리자 뒤늦게 몸 이곳저곳이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휴식이 절실했으나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지검 전체를 대상으로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라는 공문을 돌리고, 각 부서의 부서장들을 따로 소집하여 부서 인원들의 입을 한 번 더 단속시켜야 했다. 사업가 살인 사건의 진범이 같은 지검 소속의 검찰 공무원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현 지검장으로서의 의견서를 준비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의견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기자들은 분명 서부지검 검사 살인 사건과 진범과의 관련성을 캐내려 들 테니(원철은 영정에 어울리지 않는 어린 얼굴을 떠올리고 이를 악물었다) 그 부분에 대한 대비 또한 필요할 것이다.
비서관에게 지시할 수 있는 일과 스스로 해야만 하는 일을 머릿속으로 구분하던 원철의 귓가에 어느 순간부터 규칙적이고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원철은 그제야 자신이 한참도 전에 손에 잡히는 펜을 꺼내 들어 책상 위를 두드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을 들여 생각을 정리해야 할 때, 그러나 상념만 늘어질 뿐 도무지 결론이 잡히지 않는 순간마다 나오는 오랜 습관이었다.
'잘 안 풀리는 일이라도 있으세요?'
파열음 대신 익숙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원철은 눈을 질끈 감았다. 주변의 대다수는 물론 때로는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 하는 사소한 버릇에 기민하게 반응하여 말을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표정을 살피는 조용한 눈동자의 모양새나, 대답을 기다리는 가만한 얼굴 같은 것이 감은 눈꺼풀 위로도 선명히 그려졌다.
기실 그를 이 방에 불러들였던 것은 단 한 번, 그것도 아주 짧은 몇 분뿐이었다. 그때 원철은 자신과 더욱 가까운 위치에 그를 앉히겠다고 단언했다. 근속연수로 줄을 세우면 한참 아래에 있을 후배에게 검사장과 가장 가까운 부서의 장 자리를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에 놀란 주변인들의 얼굴이 기억에 선명했다. 그러나 정작 그 장본인의 표정은 이상할 정도로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 순간 그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나. 대답하는 목소리의 높낮이가 평소와 다르지는 않았던가. 그날의 그의 언행 중에서 지금과 같은 미래를 암시하는 단서가 한 가지라도 있었나.
원철은 한참 후에야 감았던 눈을 뜨고, 전화기를 들어 비서실로 통하는 번호를 눌렀다. 수화기 너머 비서관에게 내일 오전 각 부서 부장들을 소집하라는 지시를 내리며 원철은 비어있는 쪽 손으로 노트북을 열었다. 공문 작성 창을 띄우는 손의 움직임에는 지체가 없었다. 원철은 책상 너머 소파, 있을 리 없는 이의 그림자를 다시금 찾는 대신 키보드 위로 양손을 올렸다.
2.
“괴물입니다. 그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브라운관 안의 시목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원철은 방송의 진행자는 물론 카메라가 언뜻 돌아가며 비춘 방청석의 사람들 모두가 시목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검찰의 가장 본질적 임무에 실패했습니다. 이 실패의 누적물이 이창준 전 검사장이며, 우리 모두는 공범입니다. 제가 제 동료 모두를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만…”
원철은 시목이 긴 이야기를 마치고 카메라 너머로 자신을 지켜볼 모든 이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할 때까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방송이 종료된 후, 지나치게 밝고 경쾌한 음의 광고 CM이 흘러나온 후에야 원철은 리모콘을 들어 텔레비전을 껐다.
시목의 시사 프로그램 출연이 당장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반향을 일으킬 수는 있겠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우병준은 여전히 한조의 살인교사를 부정하고 있었고, 한조와의 재판은 상상 이상으로 긴 시간을 들여 힘겹게 진행될 것이다. 원철은 시목에게 미국 연수가 취소되고, 대신 지방행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전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결국은 직접 말해야 하는 일이었고 당사자인 시목은 이의 없이 받아들일 테지만, 쉽게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말해야만 하는 일. 원철은 입안에서 몇 번 단어를 둥글리다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몇 주 전 임시 저장함에 저장된 문자를 찾아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장된 문자의 발신인이 서울 서부구치소장임을 몇 번이나 확인한 후, 원철은 전송 버튼을 눌렀다.
3.
특별 접견실로 마련된 사무실 안의 공기는 건조하고, 흐릿하게 먼지 냄새가 났다. 원철은 회백색 천장을 바라보던 눈을 내렸다. 유리판이 깔리지 않은 나무 테이블 위에는 과일과 과자 몇 종류, 녹차가 든 종이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다과상이라니. 원철은 속으로만 헛웃음을 짓고, 테이블 건너편에 고개를 숙이고 앉은 세원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부쩍 살이 내려 딱딱해진 얼굴을 하고도 세원은 여전히 등이 곧았다. 짧게 깎인 손톱부터 마른 손목을 지나 제 얼굴까지 길게 이어지는 원철의 시선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는 태도는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몸에 걸친 것이 수인복이 아니었다면, 접견 상대가 아니라 구치소 밖에서 들어온 원철의 동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용한 상상을 떠올리던 원철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길게 내쉬자, 테이블 위에 올려둔 세원의 손끝이 조금 움찔거렸다.
“…그래도 나 온다고 다 준비해놓은 것 같은데, 뭐라도 들지.”
원철은 자신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잠긴 것처럼 들린다고 생각했고, 곧 자신이 접견실에 들어온 후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철이 종이컵을 들어서 차게 식은 녹차로 목을 축이는 동안, 세원은 다과상에 조금도 손을 대지 않은 채로 침묵을 지켰다. 무엇인가 말하려는 듯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세원은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길게 자라난 머리카락이 쏟아져 눈가 위로 그림자가 졌다.
“……그냥 접견으로 오셨어도 나갔을 텐데, 왜 이렇게까지 하셨어요.”
낮은 한숨 소리를 섞어 세원이 중얼거렸다. 원철은 대답 대신 탁, 소리가 나게 테이블 위로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소장이 전부터 얘기했던 거야. 특별 접견으로 해달라 내가 먼저 요구한 게 아니라.”
“그래도 왜 굳이,”
“너 생각해서 한 거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라니까.”
원철은 구치소장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나중에 어떤 뒷말로 번질지,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피해를 줄지 알면서도 굳이 특별 대우를 받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최소한 사이에 유리 칸막이를 두고 마주하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마음으로 수락한 제안이었다.
기실 그 결정에 큰 의미는 없었다는 것은 창문도 없는 작은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깨달았다. 문 너머에는 교도관이 대기 중이었고, 원철이 앉은 자리의 맞은편 벽에는 재소자를 위한 기도문이 걸려있었다. 우연히라도 글자를 읽게 될까, 벽으로 무심코 눈을 돌리는 행동조차 할 수 없었다.
대신 여전히 표정을 짐작할 수 없는 흰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원철은 입을 뗐다.
“내가 너를 생각해서 했던 일들은, 너한테 아무 의미도 없지 않았니.”
세원이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원철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세원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원철은 문득 사고 후의 긴 휴직에서 돌아온 세원을 처음으로 마주한 순간을 떠올렸다.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검게 탄 눈이 여기 아닌 다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곳이 삶의 반대편에 놓인 자리일 것이라는 불길한 직감으로 이어지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었다. 재나 연기처럼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세원의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붙박게 할 만한 것이 필요했고, 원철은 자신이 그것을 줄 수 있다 생각했다. 무난하게 승진이 예상된 이들과 함께하는 자리에 동문 후배라는 명목으로 굳이 그를 데려갔다. 믿고 맡긴다는 말로 억지로 떠안긴 일들이 그에게 확실한 기록으로 남는 실적을 가져다주는 것에 안심했다. 이제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곳으로 끌어오기까지 했으니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라 믿었었다.
“……일부러 기만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
세원이 다시 머리를 숙이며 중얼거리는 말에 원철은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너한테 화내려고 온 거 아니야. 미안하다는 말 들으러 온 것도 아니고.”
애초에 내가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지.
원철의 마지막 말에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세원이 천천히 입을 뗐다.
“…수석님과 제가 함께 계획한 일이었습니다.”
“그래, 공범관계. 서부지검 소속 공무원이 청와대 전 수석이랑 짜고 친 일이었다. 방송에서 떠드는 거랑 똑같이 말하네.”
“제가 말한 내용이 그대로 방송에 나갔을 테니까요.”
원철은 고개를 저었다.
“그 계획에 이창준의 죽음은 있었지만, 너는 없었어.”
“그것도 알고 시작한 일이었어요.”
“전부 알면서도 이창준을 선택했다, 이거지.”
세원에게서는 어떠한 긍정의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으나 원철은 그가 굳이 소리 내어 말하지 않은 답을 알 것 같았다.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원철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그 대답을 직접 들으면 너한테 화가 날 줄 알았는데.”
세원이 가만히 눈을 들었다. 까맣게 마른 눈이 차라리 화를 내라고 종용하는 것 같기도 했고, 혹은 조금도 원망하지 않냐고 묻는 것 같기도 했으나, 어느 쪽도 원철의 대답은 같았다.
“말했잖아. 너한테 화난 거 아냐. 널 끌어들여서 이용하고 혼자 편하게 간 이창준한테 화가 나고. 그리고.”
원철의 다음 말은 짧지 않은 사이를 두고,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애초에 네가 선택을 고려할 대상도 아니었던 그때의 나한테 화가 나는 거지.”
원철은 처음으로 세원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내렸다.
이창준의 사망 후 그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며 세원이 휴직 중 이창준과 접촉하여 그의 계획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곧바로 드러났다. 날짜를 역산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원철은 세원이 복직한 시점에서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결론에 금방 도달했다.
원철은 세원에게 기만당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애초에 세원이 선택할 수 있는 답 중 하나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든 생각은, 선택지에 오르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분노였다.
“……배상욱이 개입한 걸 알았다면, 가만히 있진 않았을 거야.”
미래가 사라진 이에게는 어떠한 과거의 가정도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원철은 기어이 시목에게 했던 말을 다시금 입에 올렸다. 형식뿐인 위로가 아닌 가장 진심에 가까운 말이 그것이라는 데에 원철은 새삼스럽게 절망을 감각한다.
숙인 머리 위에서 세원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검사장님이었다면.
“만약 같은 상황이었어도, 저에게 사람을 찌르라고는 시키지 않으셨겠죠.”
원철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말에 베이기라도 한 듯 입술을 깨물고 고통을 참듯 힘겨운 얼굴을 하고 있던 세원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런 분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수석님의 계획에 이용당하더라도, 다치지는 않으셨으면 했어요.”
“세원아.”
“그러니까, 여기에도 다시는 오지 말아주세요.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검사장님을 위해서.”
“…세원아.”
원철은 겨우 이름자를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세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거친 금속성의 마찰음을 냈다. 닫힌 문 너머에서 교도관이 작게 문을 두드렸다가 뒤이어 문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지나치게 가깝게 들렸다. 원철은 자신의 등 뒤로 돌아 들어온 교도관이 세원의 양 손목을 몸 앞으로 돌려 수갑을 채우고, 한쪽 팔을 붙잡아 문밖으로 이끄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세원이 입술을 보일 듯 말 듯 작게 달싹였다.
오늘 드린 말씀 중에 거짓말은 없었어요.
4.
수사과장실은 지검의 가장 높은 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창준의 사망 이후 수색영장을 든 경찰들이 몇 차례 방문했으나, 수사가 끝난 뒤로는 지검 소속의 청원경찰만이 교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원철은 문 앞의 경찰을 물린 후 혼자 수사과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불이 꺼진 사무실 안에서 가구의 윤곽만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원철은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린 책과 파일철, 서류더미 따위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조심하여 책상 앞까지 걸음을 옮겼다.
신임 수사과장의 검토를 거쳤어야 할 서류들은 책상 위는 물론 그 주변에도 장애물처럼 높이 쌓여 있었다. 일부는 서명 칸을 비워둔 채로 폐기될 것이고, 일부는 후임자가 새 명패를 들고 올 때까지 이곳에 방치될 것이다. 원철은 책상의 끄트머리, 수사과장 이름 석 자가 적힌 명패를 짚었다. 둥근 원으로 시작하여 아래를 향해 그어지는 받침으로 끝나는 이름을 손끝으로 감각하며 원철은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층이 높은 건물이 아니었지만, 지검 근처에 고층 빌딩이 없었기 때문에 블라인드를 모두 걷어 올리고 창 너머를 바라보면 제법 시야가 트였다는 감상이 있었다. 그래봤자 구도심 한복판이었고, 고만고만한 회색 건물들이 난잡하게 들어선 황량한 풍경이었으나, 원철은 그 야경이 안정을 상징한다고 여겨왔다.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가장 먼 건물, 밤에도 환히 불을 켜둔 사무실에 있는 누군가의 일상이 나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상상. 오늘의 피로 뒤에는 반드시 내일의 안정이 있다는 예감이 견고함을 더하는 일상. 가파르게 상승하지 않지만 불안하게 요동치지도 않는 완만한 곡선과 같은 삶.
할 수만 있다면, 이 방의 주인에게도 그런 것을 주고 싶었다.
원철은 몇 달 전 취조실 유리 너머로 바라본 세원이 입에 담은 말을 떠올린다. 시작했을 때 미래 같은 것은 모두 버렸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원철은 자신이 세원에게 주려 맘먹었던 것들을 떠올렸고, 세원이 원하는 것은 애초에 자신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세원에게 죽음보다 괴로운 삶을 이어가라고 종용할 수 없었다. 세원을 위해서도, 그 자신을 위해서도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창준의 죽음 후, 그리고 수인복을 입은 세원을 만나고 돌아온 지금, 원철은 세원의 미래가 온전한 그 자신의 의지로 택한 길이 아니었음을 직감한다.
사건 후 모든 언론이 죽은 창준의 관에 조화를 던지는 동안 산 세원의 몸 위로는 칼들을 던졌다. 세원을 알고 있던 사람, 혹은 모르는 사람들 모두가 그를 마음껏 조각냈고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모양대로 이어붙여 최대한 흉한 모양을 만들어내어, 그것을 자랑하기에 바빴다. 시목이 카메라 앞에서 창준을 괴물로 정의한 후로도 큰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세원은 살인자였고, 창준은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시킨 영웅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원철은 창준이 세원을 공범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적어도 세원을 자신과 같은 위치의 사람으로 여겼다면 이렇게 할 수는 없었다. 원철은 세원에게 하지 못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이창준은 너를 공범이 아니라, 자기 대신 피 묻힐 칼로 사용한 거야. 자신의 죽음 후 일어날 일들을 맡길 사람까지 생각해두었던 사람이 과연 홀로 남은 사람이 받아내야 할 것의 무게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을까. 남은 사람에게 속죄할 기회를 주려고 한 것일까, 자기 죗값까지 떠넘긴 것일까.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산 자들은 그의 뜻을 영영 알 수 없다.
“그걸 알면서도, 네가 선택한 건 이창준이고.”
어둠 속에서, 먼 곳에 칼자국처럼 떠오른 붉은 교회 십자가들을 바라보며 원철은 세원은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소리 내어 할 수 없었던 말을 고백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그런 공범도 못 됐던 거지."
다음 순간, 칼날을 삼킨 듯 날카로운 아픔이 혀끝부터 시작하여 목구멍으로, 더욱 깊은 안쪽으로 퍼졌다. 원철은 약한 구토감을 느낀다. 공범이라니.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위치였고, 애초부터 가능성이 박탈당한 미래였다.
원철은 자리에서 무너지는 대신 책상을 짚고 잠시 섰다가, 문 앞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문고리를 잡고 돌려 문을 열자 복도의 형광등 불빛이 어둠에 익은 눈에 날카롭게 쏟아져 내렸다. 원철이 자리에 선 채로 눈을 한 번 세게 감았다 뜨는 동안 자리를 떠나 있던 청원경찰이 다시금 되돌아오는 발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선 원철은 세원의 마지막 말을 복기한다. 세원은 자신이 창준처럼 손에 칼을 쥐여주는 사람이라 여기지 않았다. 원철은 세원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을 긴 시간 속여왔을지언정 적어도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만큼은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이 자신의 위안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원철은 세원과 자신 사이에는 이제는 정말로 어떤 위안도, 위로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원철은 천천히 손을 떼어, 주인 없는 빈방의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무거운 소리가 마치 종언처럼 귀를 울렸다.
시즌2 첫방을 며칠 앞둔 지금까지도 15화 강원철의 "알았다면 그냥 두고만 봤겠어?" 대사 못 잃는 사람의 질척거림이었습니다. 사실 강원철을 통해 윤세원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 것 같기도 합니다(ㅠ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세해주세요...(틈새질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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