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8월 13일
- 5분 분량
논커플링, 서동재
<Villain>
선생님 그간 잘 지내셨어요?
어, 너무 오랜만에 왔다고 설마 제 얼굴 잊거나 하신 건 아니죠? 저보고 여기 환자들 중에서 제일 잘생겼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런 말 한 적 없다고요? ...에이, 뭐 그걸 말로 들어야 아는 겁니까. 눈빛만으로도 딱 전해지는 게 있잖아요. 이거 가만보니 전에 뵀을 때보다 선생님 존안이 훤해지신 게... 족히 십년은 회춘하신 것 같은데요. 비결이 뭔지 들을 수 있을까요?
아, 푹 주무셨다고요. 그럼요, 피부엔 역시 숙면만한 게 없죠. 저 여기 눈밑 칙칙한 거 보이십니까? 사실 요새 제가 잠을 통 못 자고 있거든요. 하루종일 회사 안팎에서 치여살면 머리에 베개 대자마자 곯아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말이에요.
덮은 이불 뒤척이다 일어나서 머리맡에 놔둔 소주 자리끼처럼 입안에 털어넣어 다시 눕고는 그렇게 눈뜬 채로 해뜨길 기다리는 것만 반복하게 되덥니다. 개운치 못한 머리로 곧 시끄럽게 울릴 알람소리를 기다리다 보면 꿈인지 상상인지 모를 망상들이 머릿속을 덮쳐오는데요. 음... 그걸 그냥 꿈으로 간주해 보실래요?
꿈속에서는 검사장이 박 사장을 데려온 저를 보며 술잔을 내려놓고 허탈하게 웃고 있습니다. [네가 기어이 나를 나락으로 떨구려 하는구나.] 그 말에 위로 어떤 형사의 엄숙한 목소리가 겹쳐져서 웅웅대며 들려요. [밀었습니까?] 귓가에 날카로이 들러붙는 물음에 외면하듯 고개를 숙이면 아래 발치에는 쓰러진 채 곁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며 허덕이는 영 검사의 얼굴이 있어요. [검사님이 진짜 안 죽였죠?]
'내가 누굴 죽였다고?' 혼란스러운 저는 죽어가는 후배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뒷걸음질치죠. 조금 벌어진 입새로 얼빠진 소리로만 색색대다 등뒤에 있던 누군가와 부딪히는 바람에 짜증스레 고개를 돌리노라면, 그놈의 재수없는 황 검사가 감정 하나 보이지 않는 무기질적인 얼굴로 어딘가를 가리킵니다.
[모든 일의 시작점은 서동재 검사입니다.]
놈이 들어올린 손끝엔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검사장이 피를 뚝뚝 흘리는 깨진 머리로 폐건물 난간 끄트머리에 서있습니다.
[너는 아직 기회가 있어.]
시기를 놓쳐 수확되지 못하고 썩어버린 낙과처럼 아래로 떨어지는 그분을 멍하니 내려다보는 저는 거기서 문득 손이 축축해지는 걸 느낍니다. 제 두 손은 피칠갑이 된 것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있죠. 불면에 시달린 머리에 제것같지 않은 소스라치는 비명이 울려서 정신을 차려보면 손에 묻었던 핏빛은 어느 새 침실의 커튼 사이를 투과해 들어오는 햇빛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네? 아, 손 이거 말입니까. 평소엔 괜찮아요. 여기서 상담을 받을 때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발작을 하는 것처럼 떨게 되더라구요. 네, 괜찮습니다. 이러고 있으면 곧 진정될 겁니다... 빌어먹을 수전증이 멈출 때까지 이 답답한 속을 조금 더 꺼내봐도 될까요? 이제부터는 선생님만이 들어주실 수 있을 비밀 이야기라서요. 선생님은 제가 아는 분들 중 가장 입이 무거우시니까요.
박 사장을 검찰로 끌고와서 그 사달을 냈던 저를 보던 검사장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현실에선 아무 말도 못했지만 꿈속에서는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지들이 스스로 물든 거라고 강짜를 부리는 저에게 그분은 쓰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후배들에게 올바른 길을 걷도록 하는 환경을 조성해주지 못한 선배의 잘못이 크다고. 밥 한 번쯤이야 하고 말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바늘 찌를 틈조차 주지 않도록 기반을 다져놨어야 했다면서.
[너는 아직 기회가 있어.]
당시에도 그랬듯 제게 그 유언은 당신처럼 사라질 허상마냥 설득력 없게만 들렸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철부지처럼 검사장님만 애타게 불러댔던 오래 전의 그날과는 달리 어젯밤의 저는 상상 속의 그분을 노려보며 성토했습니다.
'애초부터 당신은 나를 믿지 않았잖아? [썩은 오른팔은 잘라내야지.] 당신 생전에도 도구로조차 쓰임을 다하지 못했어. 나는 당신의 칼로 쓰이지도 못했고 심지어는 방패로 버려지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다고. [동재 네 어깨는 쇠로 만들었어? 다신 그러지마.] 그저 자기 아래에 두고 감시하려고만 했지. [자기 수습은 자기가 챙겨야지.]
당신은 내 이름을 자식 대하듯 살갑게 부르곤 했지만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어. 반면 그 망할 후배에겐 이름 석 자 딱딱하게 불렀으면서 정작 당신의 뒤를 이을 후계로는 걔를 선택했지. 십년을 개처럼 매달렸던 내가 아니라.
안개에 가려졌던 숲의 장막을 벗겨낸 이들의 최후는 결국 어땠을까? 갓 초임되어 앞길이 창창했던 후배는 그 장막에 흠집낼 칼을 손에 넣었지만 도리어 그것에 역으로 찔려 절명했고 철옹성처럼 굳건해보였던 당신은 사방의 디딜 곳 하나 없는 허공에 떨어져 허무히 추락했어. 당신이 연민하던 윤 과장은 검찰 옷을 벗고 차디찬 감옥에서 덜덜 떨고 그렇게 아끼던 황 프로는 눈엣가시 취급을 받아 저 아래 땅끝으로 좌천돼서 다시 올라올 길이 요원하지.
근데 말야... 사법부 철창살이란 게 사람에 따라서는 녹아서 흐물해진 엿가락보다 물렁해지기도 하더라고. 돈 있고 권력 있는 분들이야 잡혀들어갔어도 금방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그들을 두팔 벌려 마중나오는 세상부터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어. 이 시점에서 난 난 당신의 게이트에 얽혀든 검찰관들 중 왜 나만이 여기 서부지검에 남게 된 건지 뼈저리게 알게 되었어. 떠나간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처음부터 나에겐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결핍이 나를 살렸다는 걸...
나를 저버린 것으로 느꼈던 배신감과는 별개로 당신이 나를 신뢰하지 않았던 그 혜안은 빌어먹게도 정확했던 셈이지. 그것에서 만큼은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 * *
"어이쿠, 어디 가셨나 했더니 여기 계셨네. 이제 재활운동 가셔야죠."
상담실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온다. 의사과장과 같이 들어온 간호사와 요양보호사가 이제까지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노인을 달래듯이 부축하며 데리고 나간다. 이 방의 진짜 주인인 과장은 노인이 의사 행세를 하던 자리에 앉고는 어이없다는 투로 한숨을 쉰다.
"이봐 서 검사, 치매환자는 왜 또 붙잡아 놓고 있어? 내 가운까지 입혀놓고는."
"저 영감님이 병원놀이를 그렇게 좋아하시더라고. 같이 좀 어울려드렸지."
"싱겁긴... 이거나 받아."
"뭔데?"
"전에 네가 부탁했던 vip 진단서."
"아, 땡큐."
"네가 얘기한 소견대로 작업해놓긴 했는데... 영 찝찝하단 말야. 정말 뒤탈 없는 거 확실해?"
"왜 이래? 한 두번 해본 것도 아니잖아."
"네가 물어주는 거 계속하다 언제 한번 팡 터질까 걱정돼서 그런다. 좀 봐줘야 임마, 나 지금이 진짜 중요한 시기라고."
"의뢰인이 재단 후원금 빵빵하게 채워주는 거 다 형 공으로 돌아가는 거잖아. 원장자린 따놓은 당상인데 뭘 쫄아 있어?"
"허... 너 꼭 나만 위하는 것처럼 밑장뺀다? 말해봐. 넌 얼마 챙겼어?"
"다 누이좋고 매부좋은 거 아니겠어. 나중에 술 살게."
전해 받은 흰 봉투를 가슴 안쪽에 넣으며 동재가 일어선다. 그와 같이 일어선 과장이 정색하며 대거리한다.
"너 정신과 약 복용중엔 내가 술 먹지 말라고 했냐 안 했냐? 밥이나 사."
"한약도 아닌데 까탈은... 아참, 말나온 김에 나 형한테 상담받은 걸로 치고 수면제 처방 좀 해줘."
"저번에 받아갔잖아."
"더 센 걸로."
"약빨에만 의존할 생각 말고... 이참에 진지하게 치료받아 볼 생각은 없어?"
"오버하기는. 검사는 원래 한손에 영장 들고 다른 한 손엔 수면제 들고 다닌다는 말도 못 들어봤어?"
"어차피 너도 일 걸려서 재판가게 되면 참작받을 소견서 필요해지는 거 아니냐? 그쪽도 센 걸로 써줘봐?"
빈정대는 어조의 말에도 그는 같잖다는 얼굴로 피식 웃기만 한다.
"이 서동재가 피고석에 설 거 같아? 그럴 일은 절대 없을 테니 신경 꺼."
혀를 내두르는 과장의 시선이 제 어깨를 툭툭 치는 서동재의 손으로 향해 있다. 잔떨림으로 핏기가 다 빠진 새하얀 손은 거짓말처럼 멀쩡해져 있었다.
종합병원 내에 있는 약제조실 앞에서 서동재는 고향선배인 의사과장이 짐처럼 떠맡긴 처방전을 들여다본다. 거기엔 수면제 외에 불안증에 쓰이는 알약 이름 몇 개가 더 표기되어 있었다. 증상칸에 ptsd로 기입된 진단서도 같이 받았지만, 그건 상담실을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보이는 쓰레기통에 구겨서 버렸다.
처방전을 제조실 창구로 밀어넣은 그는 약이 나오길 기다리며 병원 로비에 걸려있는 벽걸이 티비를 응시했다. 화면 속 아나운서가 모 대기업에서 사회취약계층을 지원하는 취지로 재단법인을 설립했다는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재단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찮다곤 해도 어마어마한 상속세를 퉁치는 값으로는 말도 안 되게 싸게 먹히는 거지. 거기다 이미지 쇄신까지 더하면 남는 장사고.
[나 한번만 믿어줘라. 선배님 유언... 검사장님이 마지막으로 나에게 한 당부, 나 꼭 지키고 싶어.]
존경하는 선배님. 보시다시피 당신이 떠나간 뒤에도 세상은 나아지거나 뒤쳐지거나 바뀐 것 하나없이 예전처럼 그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너는 아직 기회가 있어. 동재야, 너는... 이 길로 오지마.]
그럼요. 저는 그 길로는 가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소임을 짊어지는 사람은 그 녀석으로 충분하잖아요. 출발점부터가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길을 고르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아닙니까? 제가 한 선택에 부디 애석해하진 않으셨으면 합니다.
솔직히 저한테는 없는 능력을 가진 후배에게 열등감을 느낄 때도 있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을 자괴감으로 받아들여 뉘우치고 반성해야겠다는 생각은 제겐 없습니다. 그 녀석처럼 출신부터가 탄탄대로인데다 뛰어난 놈은 어딜가도 독야청청 잘 먹고 잘 살 겁니다. 녀석이 녀석의 길을 가듯 저 역시 제 살 길을 찾아가는 차이일 뿐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절 너무 나쁘게는 생각하지 말하주십시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 아니겠습니까.
저는 누군가가 드러내고자 했던 진실을 쓸어가버린 저 세찬 빗줄기로 범람하는 숲 밖을 나갈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세간에선 저를 부패했다 비난하고 주변에서는 배신자다 박쥐같다 조롱해도 나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남들이 뭐라하든 제 본분이 검사라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뭐, 굳이 원하신다면 당신의 등을 떠민 무수한 이들 중 하나라는 공범 딱지를 내게 붙이셔도 됩니다.
지금은 밑바닥에 굴러떨어져 넙죽 웅크린 신세지만 이왕 살아남은 거 어떻게든 여길 내려다보는 이들이 있는 숲의 꼭대기까지 올라가 볼 겁니다. 저를 저 위로 올려주는 것이라면 이쪽으로 내밀어오는 손이 누구 것이든 간에 무조건 잡을 겁니다. 두고 보시죠. 단연코 내가 여기서 쫓겨날 일은 없을 겁니다.
"약 나왔습니다."
서동재는 제 이름을 호명하는 약사에게서 수면제를 받았다. 이 약이 제 발목을 붙잡는 지난한 꿈들을 지워주기를 바란다. 매번 똑같아 더 볼 것도 없는 뉴스 영상에서 시선을 뗀 그는 병원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그가 나간 출입문이 닫히고, 때마침 화면이 바뀐 티비에서는 김창식 총리의 월권행위 관련으로 국회가 특검법 발의를 추진하고 있다는 속보가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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