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8월 12일
- 9분 분량
시목세원
<Stabilizer>
한그루 (트위터 @geuru_simok)
주의 : 이 글은 원작 세계관과 몹시 다릅니다.
일종의 평행세계관으로 '시목이 검사가 아닌 기자였다면.', '윤세원이 만난 사람이 이창준이 아니라 황시목이라면' 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배경년도는 2016년이며 시즌 1의 <박무성 살해 사건> 보다 앞선 시간입니다.
자해 및 자살 트리거가 눌릴 수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거북하시다면 5, 6번 글은 읽지 말아주세요.
0.
안개가 걷히면 그곳엔 무엇이 있을까.
내가 지나온 곳들처럼 기다란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을까.
회색에 깊이 파묻혀서 안개가 이끄는 곳으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곳으로 향하는 아주 간단한 꿈.
장례식을 치른 직후 항상 꾸던 꿈.
그 안개 속에는 대체 무엇이 살아 숨 쉬고 있을까.
1.
시목이 눈을 뜬 것은 삼십분째 그를 괴롭히던 이명이 겨우 멎은 직후였다. 바닥에 쓰러진 생수병은 찌그러진 채 내용물을 뱉어내고 있었고 투명한 액체는 그가 입고 있던 검은색 카디건을 적실 정도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시간이..."
익숙하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 시목은 주름진 미간을 손으로 누르며 제 왼쪽 손목으로 시야를 옮겼다.
-9시 27분.
지난번보다 길어진 시간에 작게 한숨을 쉰 시목은 입술을 작게 씹으며 몸을 마저 일으켰다. 물이 흡수된 카디건이 축 늘어지며 무게를 더했다. 카디건을 벗어 대충 내려놓은 시목은 주방에서 키친타월 꺼내와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안에 받쳐입은 회색 티가 시목의 움직임에 따라 구겨지며 뭉툭한 주름을 만들어냈다. 쓰레기통에 젖은 키친타월을 집어넣은 시목이 아무렇게나 둔 카디건을 집어 들었을 때 그의 성격만큼이나 무미건조한 벨 소리가 적막한 집안을 울렸다.
"여보세요."
-시목아. 서울로 올라와라. 국장이 너 이제 올라오래.
"부장님."
-와서 서동재 좀 어떻게 해봐.
"..."
- 인마.
"... 예."
-바로 회사로 와. 너 일 하나 들어왔다.
"예."
-제보 들어온 거 메일로 보낼게. 읽어보고. 다다음주 쯤에는 현장 가자.
"... 예."
-내일 보자.
뚝-
통화를 끊은 시목은 한참을 가만히 생각했다. 청주 SFF에서 적격심사 대상으로 해고당할 위기에 처한 자신을 국장이 부른다니 무슨 이유일까. 애초에 해고 당할 위기에 처한 것도 툭하면 혼자 앞서나가버리는 성격 탓에 미움을 받은 것이 그 이유였다. 멀뚱히 집안을 둘러보던 그가 곧 이삿짐을 싸는 용도의 박스를 여러개 꺼냈다.
2.
'윤세원'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시목이 사는 공덕에서 멀지 않은 곳에 혼자 살고 있었다. 10평도 안 되는 작은 집에서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더러워진 윗옷과 아래에는 후줄근한 사각 트렁크만 입은 채로 그는 시목을 반겼다. 정확히는 금방이라도 나가떨어질 것 같은 문을 조금 연 채 경계하는 눈으로 시목을 지긋이 응시했다.
"안녕하십니까. 윤세원씨. 저는 SFF의 기자 황시목입니다.."
시목이 명찰을 꺼내어 눈앞에 들이밀었을 뿐인데도 세원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그에 시목이 당황하며 손을 거두자 그제야 세원이 입을 열어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 무슨 일로 오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가세요."
"윤세원씨. 다름이 아니라 아드님 사건..."
"가시라고요!!"
쾅!
1년을 집에서 은신한 사람에게는 타인이, 그것도 불쑥 찾아와 제가 은신하게 된 이야기를 꺼내니 겁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시목은 그런 세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등을 돌렸다.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는 등 뒤로 제 명함을 꽂아둔 현관문이 슬며시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얇은 종이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3.
시목은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원철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1년 전 아들을 잃고 이혼당한 아버지를 제게 취조하라고 한 것인지 생각했다. 제보가 온 내용 또한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드문드문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윤세원 (남)
-1984년 09월 01일.
-슬하에 아들 윤영광(6세, 남아) 2015년 사망.
-아들 사고 직후 이혼.
교통사고.
사망원인 : 미상.
사고원인 최종판결 : 가드레일 부실시공. (판결문 첨부)
버스 기사 3년. 그 외 관계자. 징역 6, 7개월.
-사고 이후 휴직 상태.
-제보자 : 집주인.
-제보 사유 : 1년째 집에서 나오질 않는 사람이 있음. 손발에 낙서인지 무엇인지 모를 흔적이 가득하고 이른 새벽에만 나와 생필품 -그래봤자 라면과 휴지 한두 통, 술 뿐인- 을 구매함. 월세 밀린지 석 달 째. 보증금으로 겨우 버티는 상황.
그날 저녁 막 저녁을 먹었을 법한 시각에 궁금증을 참지 못한 원철에게 연락이 왔다. 시목은 명함만 주고 왔노라고 답했다. 원철은 그 한마디에도 뛸 듯이 기뻐하며 시목에게 수고했다고 거듭 말했다. 단답만을 내놓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다 겨우 통화를 끊은 시목은 불도 켜지 않고 어두운 소파에 앉아 제보에 대해 생각했다.
'월세를 밀렸다면 집주인은 당연히 의아함을 느꼈을 테지만 구태여 신고를 할 이유는 없다. 차라리 경찰에 신고하는 게 더 확실할 테니까. 1년 전 사고로 이혼 후에 그저 은둔하는 것이라면 굳이 제보를 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손발에 낙서라니, 신체 일부에 세긴 낙서는 문신일 가능성이 높지만 문신이 이상한 행위인가? 분명 아들의 죽음 외에도 그를 1년간 은둔하게 만든 이유가 또 있을 것이다. 뭘까.? 무엇이 그를 자극했나? 무엇 때문에 그는...'
"판결."
무감정인 시목에게도 오랜 시간 쌓인 기자의 촉이 있었고 방금 언뜻 그의 뇌리를 스친 단어가 이번 일의 키워드인 것 같았다. 튕기듯 소파에서 일어난 시목은 테이블에 올려둔 파일을 집어 들었다.
"버스 기사... 3년..."
애초에 사고가 왜 일어난 건지 그는 왜 그곳에서 1년 이라는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지에 대한 답이 원철이 팩스로 보내준 판결문에 있었다. 담당 검사. 담당 공무원. 그리고 도무지 왜 있는지 모를 이름들. 어지럽게 돌아가던 머리 위로 익숙할 정도로 많이 봐왔던 짜고 치는 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14명의 어린아이들이 죽었음에도 겨우 3년. 차체 조사 결과 스테빌라이저 누락. 하지만 판결은 가드레일 부실시공, 만약 그 사이에서 누군가 브로커짓을 했다면."
그렇다면 지금 윤세원은 몰라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제 아들을 죽인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시목은 서둘러 외투를 걸쳤다. 5월임에도 불구하고 밤은 제법 쌀쌀했다.
4.
세원이 문을 열었을 때. 시목은 바람에 흩날려 헝클어진 머리와 제대로 잠그지도 못한 외투, 풀린 신발 끈을 밟은 채로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높고 낮음이 없는 목소리로 세원이 물었지만 시목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그가 현관을 닫을세라 재빨리 제 오른발을 문틈 사이로 밀어 넣었다.
"이야기 좀 하시죠."
"빼세요."
"잠깐이면 됩니다."
"..."
"지금 생각하시는 일 하지 마세요."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아시고요?"
"윤세원씨. 이런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충분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착각하시나 본데 아닙니다. 그거."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얼마나 잘 안다고 그렇게 말하는지 궁금한데요?"
시목의 말에 잠시 침묵한 세원은 날 선 눈을 거두지 않은 채 물었다. 여전히 문고리를 잡고 있는 손마디가 노랗게 번져갔다. 시목 또한 무미건조한 표정을 유지한 채 문틈 새로 끼운 발을 거두지 않고 답했다.
"저는 윤세원씨가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는지 궁금합니다."
"기자님이 제 사생활에 대해 간섭할 권리는 없습니다."
"살인을 막을 의무는 있죠."
세원의 검은 눈이 시목을 찬찬히 훑었다. 온정 없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시목은 결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이 발에 힘을 주어 버텼다.
문고리를 잡은 세원의 팔이 서서히 저리고 문 사이에 끼운 시목의 발이 멍들 것처럼 아파지고 나서야 세원은 문을 잡은 손에서 힘을 뺐다. 힘이 풀리며 자연스레 세원의 손으로 눈이 간 시목은 얇은 피부에 쓰인 알 수 없는 글자들을 발견했다. 대충 스쳐 지나갔음에도 확실히 문신은 아니었다. 시목이 제 손을 쳐다보는 것을 느낀 세원은 재빨리 소매로 손등을 덮으며 작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5.
세원의 집은 삭막했다. 가구라고는 낡은 옷장과 매트리스 하나, 미니 냉장고가 전부였다. 구석에는 라면 봉지가 가득 든 재활용 봉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싱크대에선 미처 잠그지 못한 수도꼭지가 찔끔찔끔 물을 뱉었다. 시목이 신발만 겨우 벗고 마루에 뻘쭘하게 서 있자 세원은 머리카락 두어개가 불은 메트리스 커버를 대충 털어내며 앉으라고 권했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냉장고에서 500mL 생수 한 병을 꺼내 종이컵에 따라 건네며 말했다.
"마땅히 드릴게 없네요."
"괜찮습니다."
사실 시목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종이컵은 아무리 뒤집어 두었다지만 표면에 먼지가 가득했고 싱크대에는 바퀴벌레 한 마리가 사람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고 느긋하게 기어 다녔으며 미니 냉장고는 누렇게 색이 바래고 문짝이 삐걱 거려서 과연 제 기능을 제대로 할지 의심스러웠다. 그래도 세원이 생수병을 딸 때 들린 뚜두둑-소리가 그나마 시목을 안심시켰다. 시목이 물을 마시며 집 안을 관찰하는 동안 안쪽에 딸린 보일러실에서 접이식 의자 하나를 가져온 세원은 시목의 맞은편으로 다가와 의자의 먼지를 털고 앉았다.
"우리 애 때문에 오셨다는 건..."
세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때까지도 시목은 소매로 미처 가려지지 않은 세원의 손에 쓰인 낙서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시목의 시선이 집요하다는걸 눈치챈 세원은 결국 헛웃음을 터트리며 축 처진 소매를 걷었다. 앙상하게 마른 손등 위로 새까만 펜으로 휘갈겨 쓴 글자들은 제법 질서정연하게 제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아마도 빼곡한 것에 공포가 있는 사람이라면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을 거라고 시목은 생각했다.
"... 그러니까..."
입술을 달싹이며 적당한 단어를 고르는 시목을 비웃으며 세원은 말을 가로챘다.
"제가 한 거에요. 손 말고도..."
아무 표정 없이 왼쪽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붙이자 잔 근육이 잡힌 팔뚝에 온갖 낙서가 가득했다. 시목의 머릿속엔 어느 영화에서 본 장면이 스쳐 지나갔고 시선이 닿는 것을 느낀 세원의 피부는 타인의 시선이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가려움을 호소했다. 저도 모르게 오른손을 왼팔로 가져간 세원은 걷어붙인 팔을 긁었다. 처음엔 모기 물린 것 처럼 잘게 긁던 세원은 이내 분에 차 숨을 헐떡이며 손톱을 세워 새빨간 자국이 남을 정도로 긁기 시작했다. 잉크로 뒤덮인 표피는 거센 손길에 금세 하얗게 일어나며 신경에 통증을 전달했고 세원은 피부가 벗겨진 자리에 피가 맺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손을 거두었다. 오른손 손톱 아래로 피가 묻어있었다. 시목은 그 일련의 과정을 한참 지켜보다 세원이 숨을 다 고른 후에야 입을 뗐다.
"약 사오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 팔 말고 다른 곳도... 하셨습니까?"
"..."
"치료는요?"
"..."
세원은 답을 하지 않았지만 왼팔의 울퉁불퉁한 흉터들을 보니 답을 알 것 같았다.
"가방 두고 갈 겁니다. 문 열어주세요."
시목의 말에 입꼬리를 살짝 당겨 웃은 세원이 검지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답했다.
"가방은 문 앞에 두겠습니다."
"그러시지 않길 바라죠."
시목은 더 이상의 말 없이 핸드폰과 지갑만을 챙겨 집을 나섰다. 기왕이면 즉석식품이라도 사다 줄 요량이었다.
6.
시목이 나간 후 세원은 그 자리에 못이 박힌듯 앉아 제가 낸 상처를 한참 구경했다. 연한 피부는 제가 낙서한 흔적들과 뒤섞여 검붉었다. 이윽고 쓰라림이 세원을 덮쳤다. 손톱 독이 오른 왼팔은 곧 열이 올라 욱신거렸고 피부는 칼로 베어낸 것 보다 더 큰 통증을 호소했다. 세원은 그것이 기분 나빴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살아있는 것 같아 몹시 기뻤다. 하지만 머지않아 제가 한 행위를 후회했다.
고통은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다. 아들이 떠나고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 일련의 과정을 밟는 동안 세원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가혹하게도 그날 이후 어린이날, 생일, 기일이면 까르르 웃던 아들이 생각났고 거리를 걸으면 어린이집 가방을 맨 아이만 봐도 가슴이 미어졌다. 숨이 막혔고 머리가 아팠다. 속이 울렁거렸다. 불탄 버스가 눈앞에 생생했다. 그래서 세원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영광아... 윤영광... 내 아들... 우리... 우리 아들..."
입술이 벌어지며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가슴이 땅으로 푹 꺼졌다. 세원은 생각했다.
'아.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다. 몸이 조각났으면... 산산이 조각났으면 좋겠다. 불에 탄 우리 아들... 불쌍한 내 아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얼마나... 내 손으로 버스에 태웠는데, 데리러 가겠다고 분명... 분명 오후에 데리러 가겠다고 했는데 그랬는데...'
"윤세원씨!"
쾅쾅쾅!!!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세원은 멀어져가는 의식을 겨우 붙잡고 가느다랗게 신음했다. 흐린 시야 사이로 시목이 두고 간 가방과 외투가 보였다.
7.
세원이 깨어났을 땐 시목이 두고 간 명함과 편의점 로고가 박힌 비닐봉지가 좁은 탁자에 놓여있었다. 눈가를 문지른 세원이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자 옆자리에서 IV를 확인하던 간호사가 다가왔다. 이윽고 환한 빛이 동공을 두어번 비추더니 몹시 지친 음색이 세원의 귓가로 스며들었다.
"보호자분 한 시간 전에 가셨고요. 수납도 해주시고 가셨어요. 혹시 드시는 약 있으세요?"
"아니요."
부르튼 입술에 두어번 침을 묻힌 세원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러자 간호사는 세원의 바늘이 꽂힌 팔을 확인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팔은 드레싱 했고요. 어지럽거나 하진 않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이거 다 맞으시면 가셔도 돼요. 혹시 묽은 코피나 귀에서 피가 나오거나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우시면 내원하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간호사가 커튼을 치고 사라지자 세원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뱉어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낯설어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다. 영양분 부족 탓인지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시목이 두고 간 비닐봉지 안에는 각종 빵과 도시락 세트가 들어있었다. 바로 옆에는 'SFF'기자 황시목. 010-****-**** 라고 쓰인 명함이 있었고 뒷면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드세요'라고 적혀있었다. 세원은 그 짧은 단어를 보며 '이 사람이 왜 나에게 잘해주나' 싶어 한참을 생각하다 몰려오는 졸음에 하품을 했다. 제가 자해한 팔에는 간호사가 말했듯 깔끔하게 드레싱 처리가 되어있었다. 진통제라도 넣은 건지 몸이 한없이 무거워진 세원은 수액이 반쯤 남은 것을 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
8.
세원이 다시 제집을 찾았을 때는 새벽 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약 기운과 잠기운이 아직 덜 빠진 건지 정신은 조금 몽롱했고 오른손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봉지는 부스럭거리며 제 존재를 알렸다. 주삿바늘이 빠진 자리에는 투박한 밴드가 붙어있었다. 어두컴컴한 계단을 올라 제집에 도착했을 때 세원은 억지로 뜯긴 대문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땅히 도난당할 물건은 없었지만 사람의 심리라는 게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세원에게 집은 굉장히 중요한 장소였다.
현관을 열었을 때 세원은 제가 정말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인지 눈을 의심했다. 시목은 커버만 갈아 끼운 매트리스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싱크대 옆, 본래 가스레인지가 들어갈 자리에는 휴대용 가스버너가 켜져 있었고 식당에서 포장해온 듯한 찌개가 새로 사 온 것으로 보이는 냄비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구석에 놓인 쓰레기봉투는 새것으로 바뀌어있었으며 그 안에는 찌개를 포장해왔던 하얀 플라스틱 용기가 들어있었다. 바닥에는 밥상 대신 신문지 두어장이 깔려있었다.
시목은 하염없이 오늘 자 기사들을 훑어보다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과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세원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저를 응시하고 있었고 시목은 그런 세원을 지나쳐 생수를 꺼내 조금 졸아든 찌개에 부었다.
"밥 드시죠. 기다렸습니다."
"...왜요?"
세원이 당황과 의아함이 섞인 물음을 던졌지만 시목은 나무젓가락을 뜯으며 말없이 고갯짓으로 제 맞은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세원은 손에 들린 봉지를 내려놓으며 일단 자리에 앉았다. 의식하지 못했으나 배가 고팠다. 시목은 뜨거운 물에 담가둔 즉석밥을 꺼내 뚜껑의 비닐을 뜯어 세원에게 건넸다. 밥은 뜨거웠다. 곧 불투명한 플라스틱 숟가락이 세원의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마땅한 게 없어서요." 시목은 머쓱하게 덧붙였다. 세원은 여전히 이 상황이 어이없고 황당했고 궁금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이게 다 뭡니까?"
"드세요."
시목은 계속해서 먹기를 권유하며 찌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허연 김이 펄펄 올라 습기가 천장에 웅어리졌다. 제대로 보니 돼지고기 김치찌개였다. 고기의 냄새는 참으로 오랜만이라 세원은 더 말 할 것도 없이 찌개에 숟가락을 담갔다.
세원이 허겁지겁 밥을 먹는 모습을 한참 지켜보던 시목은 천 원짜리 플라스틱 컵에 생수를 따라 세원의 앞에 놓아주었다. 제가 기삿거리를 얻기 위해 종종 가던 용산서의 형사인 여진에게 서툴게 배운 것 중 하나였다. 기다렸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시목은 즉석밥을 금세 먹어 치우고 세원이 다 먹기를 기다렸다.
"더 드릴까요? 혹시 몰라서 하나 더 해뒀습니다."
세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라면이나 술로 끼니를 때우거나 굶었으니 쌀밥이 그립기도 했다. 삼각김밥을 먹어보기도 했으나 금방 물렸고 무엇보다 양이 적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세원은 죄책감을 느꼈다. 자식 잃은 아비가 밥이 잘도 넘어가는구나 하는. 하지만 살고자 하는 몸은 계속해서 배고픔을 호소했고 당겨 받은 퇴직금과 위자료를 주고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버텨야 했다. 매번 먹을 것 앞에서 돈을 따지는 제 모습이 처량해 몇번씩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으나 계속해서 실패했다.
"천천히 드세요."
고저 없이 흘러나온 시목의 목소리에 세원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더 무너질 자존심도 없었지만 이 상황이 부끄러웠다.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은 세원은 숨을 고르며 시목이 준 물을 한모금 마시고 지금껏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감사합니다만 왜 이렇게 하시는 거죠?"
"필요해서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세원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예?"
"윤세원씨가 필요합니다."
"제가... 왜요?"
미묘한 긴장감에 세원은 혀를 내어 메마른 입술을 더듬었다. 자꾸만 목이 탔다. 이 사람이 내게 해주는 호의는 당연지사 공짜가 아닐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게다가 이 무미건조한 사람이 어떤 대가를 바랄지 두려워서도 있었다. 긴장한 세원의 표정을 본 시목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날. 아드님 사고 어디까지 조사하셨습니까."
"... 알고 계시잖아요. 여기서 이렇게 있으신 거 보면."
"박무성. 죽이려고 하셨습니까?"
"네."
세원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박무성이 스폰서라는걸 알아낸 것은 얼마 되지 않았고 제 아들이 그가 한 스폰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최근이었다. 기실 제가 생각해도 너무 성급했다. 시목은 고개를 숙인 채 더 말이 없는 세원을 보며 운을 띄웠다.
"버스 회사. 스테빌라이저. 버스 기사."
"3년."
어금니가 서로 마찰하는 소리가 좁은 집 안을 울렸다. 시목은 살벌하게 번뜩이는 세원의 눈을 마주하곤 젓가락을 든 손에 힘을 보탰다. 나무젓가락이 힘없이 부러지는 소리에 세원은 그제야 눈에서 힘을 풀며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겨우... 겨우 3년이라뇨."
"..."
"내 아들이. 조그맣고 예쁜 그 손이... 말랑한 몸이... 잿덩이가 되어서 돌아왔는데. 유치원생 열넷이 죽었는데 겨우 판결이... 겨우...!! 3년이라뇨!!"
쾅!
분에 못 이겨 소리를 지른 세원이 무색하게 옆집에서 적당히 하라는 듯 벽을 쳤다. 마른세수를 하며 분을 삭인 세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황기자님은 무슨 이유로...?"
"박무성. 저희 회사 사람들과 은연중에 청탁을 주고 받았을 겁니다. 기자 몇을요. 박무성은 국장과 담당 검사에게 스폰을 했고요.저희 언론사는..."
"그럼... 그쪽 국장이."
"아니요."
세원의 성급한 판단에 시목은 진정하라는듯 손을 들어 저지하며 말을 이었다.
"서동재가 기사를 썼습니다."
"예?"
"서동재가 승인 없이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검찰에게 뇌물을 받고요. 당시 국장도 같이 뇌물을 받았던거죠. 부장의 1차 승인 없이요."
"..."
"처음 기사가 나간 직후 여론은 당연히 버스 기사의 부실이라며 몰아세웠고 사고의 진짜 원인은 가볍게 묻혔습니다. 부장님께서 기사를 정정하려고 하셨지만 이미 여론은 바뀔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대로 재판까지 간겁니까?"
"이런 사건은 민심이라는 특수성이 있으니까요."
"하..."
세원의 한숨이 짙게 드리웠다. 시목은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몸은 어떠십니까?"
지극히 상투적인 어조에 세원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에 시목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왜 웃으십니까?"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제게 왜 이런 호의를 베푸시는지 진짜 이유를 알고 싶은데요."
세원의 질문에 시목은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강원철 부장을 아십니까?"
"그분을 어떻게 아시죠?"
"저희 부서 부장이십니다."
"그런데요?"
"부탁하셨습니다. 챙겨드리라고요."
시목의 말에 세원의 미간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동정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기분 나쁘지 않았으나 시목이 순전히 호의가 아닌 누군가의 부탁으로 행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원 본인조차도 제가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예민해진 감정은 쉽게 회복 되지 않었다.
"나가주세요."
"예?"
갑작스런 냉대에 시목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시목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세원이 말했다.
"할 일 끝나셨으면 나가주시라고요.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세원이 고개를 푹 숙이자 늘어난 티 사이로 쇄골 언저리에 쓰인 낙서가 보였지만 시목은 개의치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생각엔 원하지 않으니 그만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시목이 나가며 문을 닫는 소리에도 세원은 미동조차하지 않았다.
그저 제 아들이 생각나 숨죽여 울었을 뿐이었다.
길고 지루한 글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2편은 추후에 따로 포스타입에 연재할 예정입니다. 수많은 선생님들과 함께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후기라고는 했지만 거의 2편 예정에 가깝네요.ㅎㅎ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면서 2편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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