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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년 8월 13일
  • 8분 분량

시목은수

<안개섬>


개미 (트위터 @sik_ant)


시목의 세상은 수술 전과 후로 나뉘었다. 수술 전에는 자극과 고통, 그리고 아주 약간의 행복이 그를 구성했다. 그리고 뇌 수술 이후, 그의 세상은 크게 바뀌었다. 기존의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그에게 남은 것은 대다수의 이성, 그리고 감정의 흔적뿐. 감정을 느끼지 못하니 당연한 수순으로 다른 이들과 공감할 수도 없었다. 다른 평범한 이들이 여러 개의 다리로 서로를 연결한 섬들과 같다면 시목은 혼자 단절된 섬이었다. 안개가 자욱해 아무도 안을 볼 수 없고 그 자신도 밖을 내다볼 수 없는 섬.


시목은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했고 타인이 자신에게 공감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외부와 단절된 채 늘 홀로 있었지만, 그런 삶에 아무런 불만을 느끼진 않았다. 정확히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였다. 그저 자신이 따라야 할 가이드라인을 찾고, 그것을 따랐을 뿐이다. 그러나 정말 그가 외로움을 느끼지 못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의 감정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극히 억제된 것에 가까우니. 안개로 둘러싸인 그 섬 안에 무엇이 있을진 시목 본인도 모르고 타인들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꿈에서는 어떠할까? 누가 그러지 않던가,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며,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감정, 기억들이 모두 그 곳에 있다고. 그는 기실 꿈을 잘 꾸진 않았지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으레 꾸는 꿈이 있었다. 수술 전의 기억. 주로 감정이 가장 극대화됐던 순간들이 그것이었다.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울던 날의 기억, 해변에서 즐겁게 놀던 날의 기억....그래 그것이 그의 꿈이었다. 꾸는 날보다 꾸지 않는 날이 더 많은 그런 것. 어쩌다 꾸게 되어도 이명이 찾아올 때면 찾아오는 화이트아웃 현상처럼 금세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 시목의 주치의는 그것이 억눌려 있던 감정의 반향이라고 말했다. 평소에 억눌려 있던 것들이 꿈을 통해 분출되는 것이라고. 그런 식으로 쌓인 것들을 조금씩 풀어낸다고 말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지금 시목이 갇힌 꿈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시목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인의 모습으로 꾸는 자각몽. 퍽 낯선 경험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는 꿈이라니. 게다가 안개가 자욱하게 껴 시야도 확보되지 않는 판이다. 시목은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하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잠에 들었었나? 뭘 하고 있었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는 차분히 제 기억을 파헤쳐보았다. ……기억이 없다. 자신이 어떻게 일상을 보냈는지, 자기 사무실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하다못해 꿈에 들기 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분명 자신이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고 있다. 황시목, 서부지검 형사 3부에서 평검사로 근무 중. 뇌 수술 경력이 있고, 차 한 대와 아파트 한 채, 그리고 다량의 빚 보유. 그래,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정확했다. 그러나 그것뿐 이었다. 일상의 기억, 직장동료, 그의 앞으로 배정된 사건, 오늘이 며칠인지. 그런 것들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가족....어머니는 기억했으나 그 마저도 흐릿했다. 그저 명확한 것은 자신이 누구냐는 것과, 이 공간, 이 순간이 자신의 꿈이라는 것 뿐.

그렇다면 이 공간에 무슨 단서가 있는 것일까 시목은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주변을 탐색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보이는 것은 안개…….아니다. 길이 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짙은 안개 속, 시목은 발 밑에서 흐릿하게 빛나는 길을 발견했다. 어째서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눈에 띄는 길이었다. 시목은 잠시의 고민도 없이 그 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이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가만히 있는 것은 어떤 결과도 낳지 않는다. 시목은 이미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발소리마저 먹어버리는 짙은 안개 속을 차분히 걸어 나갔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안개 속, 인지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상상으로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경우엔 의미가 없는 가정이었다. 시목은 공포도 망설임도 없이 쭉 나아갔다.

얼마쯤 걸었을까 그의 귀에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의 목소리인 듯도 하고 그저 의미 없는 소리에 불과한 것 같기도 한 그 소리는 한 순간 시목의 귀에 닿았다가 안개에 먹혀 사라졌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ㅅ…..]

[…….ㅏ…….ㅇ]

시목에게 닿았다가 그 주위에 유독 짙게 깔린 안개에 먹혀 사그라 드는 소리들. 그 중에는 짙은 안개에도 불구하고 시목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다가온 소리도 있었다. 그래, 이 소리처럼.

[....목아, 아드...]

익숙한 목소리.

“...어머니?”

시목은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엄...가.....미.........이..ㄹ...]

“어머니세요?”

여전히 사방엔 안개뿐. 잠시 들렸던 어머니의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

잠시 멈춰 서 어머니의 목소리를 찾던 시목은 다시 길을 걸었다.

[ㅇ…….ㅏ….ㄴ…]

[……ㄷ……]

또다시 뭉개진 소리들이 그를 스쳐갔다. 어딘가 익숙한 듯, 그러나 뭉개져 그 뜻을 알 수 없는 소리들을 들으며 시목은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

이상하다, 시목은 인상을 찌푸리며 귓가를 간질이는 소리를 들으려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그 소리는 한 순간 시목에게서 동요를 이끌어 낸 것이 없었던 일인 마냥 이미 사라진 뒤였다. 대개 지금 그에게 들리는 소리들이 그렇지만, 이 소리또한 어떤 이의 말소리 같았다. 하지만 누군지 특정할 수도 없을 만큼 작은 소리여서, 시목은 거슬리는 느낌이 있었던 것이 우연일거라 생각하며 다시 길을 걸었다.

[…….]

또다, 또 그 소리다. 시목은 무시하려던 처음의 생각과는 달리 어느새 그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걷다가도 그 소리가 들리면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소리에 신경을 쓰고 있는 제 모습이 낯설어 부러 신경을 안 쓰려고도 해봤지만, 그럴 때마다 저 소리가 사라지고 다신 들리지 않을까 싶어 멈춰 서게 되었다. 이 느낌을 뭐라 해야할까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불안감? 초조함? 무엇이든 처음 느껴보는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게 한 소리에 집중하며 걷다보니 자연스레 시목의 발걸음은 느려지고, 그 덕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소리들이 조금 선명하게 들리는 듯도 했다. 웅웅 울리는 소리, 삐삐 기계음 소리, 낯선 목소리, 귀에 익은 목소리들이 모두 섞여 그의 감각을 어지럽혔다.

소음 속에 사람들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기계음으로 추정되는 소리만 들려오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시목은 속도를 높여 걸었다. 그러다 사람들의 말소리 같은 것이 퍼지면, 그 땐 걸음을 늦춰 걸었다. 집중하며 걷는 동안 시목은 이 목소리들 중 중복되는 몇 개를 구분해낼 수 있었다. 낯선 누군가의 목소리,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 어머니의 목소리, 그리고 시목이 신경 쓰는 그 목소리. 그 목소리가 들릴때면 시목은 발걸음을 더욱 느리게 하거나 제자리에 멈춰선 채로 그 소리에 집중했다. 그러나 제대로 들린 적은 한번도 없었다. 늘 그 소리는 시목을 휘감았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렇게 빠르게 걷고, 느리게 걷고,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걷고 하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시목은 그동안 그 목소리의 패턴을 알아냈다. 그것은 소리들이 가장 다채로운 때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기계음만 남는 순간에 찾아와 아주 짧은 순간만을 머물다 사라졌다. 시목은 그 목소리가 날 때면 자신을 싸고 있는 짙은 안개가 한순간 흐릿해지는 것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도저히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대체 왜? 시목은 어쩐지 답답해져 안개를 손으로 헤쳤지만 안개는 전혀 흩어지지 않았다.

터벅 터벅.

시목 자신의 발소리가 들릴만큼 안개가 옅어지고, 소리들이 더 선명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ㄱ사님....오......언제까지.....어나요....]

[야.....빨리......뭐....]

[아직도.....검.........]

[얌.....꼴이......뭐.......]

[.....님....우리.........어......]

[ㅅ목.....엄마가....늘은....]

[.....놈.....가....이쁘다고....]

그는 이제 그 목소리를 제외한 소리들을 꽤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중간중간 먹힌 소리는 있었지만…알아듣는데 큰 무리는 없었다. 검사님, 시목아, 황 검사, 야......많은 이들이 그를 다양한 호칭으로 부르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긴 시간을 무엇인가 떠들며 그에 곁에 머물다 간 소리도 있었고, 가끔 찾아와 그를 스쳐 지나간 소리도 있었으며, 매일같이 그를 감싸 안은 소리도 있었다.

안개가 어떤 원리로 작용하는지, 소리마다 선명하게 들리는 정도가 달랐다. 그리고 이제 말소리는 내용의 절반이 들렸다. 조각조각 들리는 것으로 전체 문장도 유추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시목이 가장 듣고 싶었던 소리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이 뭉개져 흩날릴 뿐이었다.

[........ㅂ..ㅐ.]

저것이 그나마 시목이 반복되는 소리를 곱씹다가 추측해낸 한 글자였다. 만일 저것이 그를 부르는 호칭이라면 아마도..’선배’라는 말이겠지. 선배, 그를 그렇게 부를 자들은 많을 것이다. 초, 중, 고....혹은 대학교 후배, 아니면 연수원, 그보다 낮은 기수의 검사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저 자는 그 중 누구일까. 시목은 머릿속으로 다양한 가설을 세웠다 지웠다 하며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길은 끝나지 않았고, 시목의 기억도 불완전했다.

걸은 지 한참 되었지만 몸이 힘들진 않았다. 혼자 있다는 고립감도 없었다. 애초에 그는 그런 걸 느끼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그가 안개 속에서 홀로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 무색하게도 그의 주위엔 다양한 소리들이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목은 이 길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소리의 주인공이 신경 쓰였다. 아니 신경 쓰인다 라는 말은 조금 부족했다. 어릴 때 이후로 느껴본 적 없던 갈망이 성마르게 시목을 재촉해왔다. 이 곳을 벗어나라고. 벗어나, 그 소리의 주인을 찾으라고.

안개가 더 짙어졌다. 이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시목은 소리들이 안개에 먹혀 사라진 건지, 아니면 그들이 자신에게 닿기를 포기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곳을 벗어나도 그들을 만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 소리의 주인을 영영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으나,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기에 그는 계속 나아갔다.

이젠 시야가 온통 하얗다. 소리는 커녕, 자신의 존재감마저 안개에 먹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시목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보려했지만 시야에 잡히는 것은 숨이 막히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의 안개뿐이었다. 이곳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을지도... 그가 걸어온 시간들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결과도 낳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그런 것은 상관없다. 시목은 단지 소리들을, 특히 그 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다. 알아듣지 못해도 좋으니 함께였으면 했다.

문득 시목은 이제까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다시 뒤로 되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되돌아갈까 생각하며 걷는 그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시목이 멈춰선 채 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 뒤를 응시했다.

결심은 빨랐다. 돌아가자. 보이지 않는 저 너머를 향해 이대로 걷는 것보다는 돌아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을까 아니면 그저 소리들이 그리워서였을까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시목은 그리 결심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봤다.

그리고 그곳엔, 하얀 문이 서 있었다.

그가 돌아가자 결심하자마자 없던 것이 생겼다. 시목 자신의 꿈이라 그런 것인가, 알 수 없었지만 시목은 일단 문을 살펴보았다. 특별할 것 없는 문이다. 갑자기 나타난 것과, 벽도 없이 혼자 서 있는 문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가 손을 내밀어 문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그의 주변에 자욱했던 안개가 흩어졌다. 시목을 감싸고 있던 가장 짙은 안개마저도 흩어져 떠나갔다.

우웅-

무언가 울리는 소리를 시작으로, 안개가 흩어진 자리를 예의 소리들이 가득 메웠다.

안개 속에서 들을 땐 작아 알아듣기 힘들던 소리들이 이번엔 저들끼리 뒤엉키고 섞여 온통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다. 마치 수술을 받기 전 그가 느끼던 세상처럼.

그리고 그와 함께 오랜만에 느껴보는 통증이 시목을 덮쳤다. 그 고통에 시목은 주저앉아 귀를 막았다.

까득,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긁던 시목의 손이 방황하다 문 끝자락에 닿았다. 고통을 벗어나려는 본능이 이 문을 열고 이 곳을 탈출하라며 시목을 부추겼다. 문을 열고 나가면 편해지겠지, 적어도 지금의 고통은 없을 것이다, 그는 쉬이 그 평안함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문을 열기를 주저했다.

어린 날 생각했던 것처럼 그를 둘러싼 소리들이 그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님을 이제는 아는 까닭이었고, 또한 그가 열망하는 소리가 이 속에 있음을 아는 까닭이었다. 그는 뇌가 조여드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자신이 찾는 소리와, 그 소리의 주인을 찾아내려 애썼다.

그러나 애초부터 크지 않았던 소리가 이 소음 속에서 들려올리는 만무했다. 그가 고통에 몸부림칠수록 소리들은 더욱 거세게 그에게 달려들었고, 그의 통증은 더 심해지기만 했다.

결국 시목은 참지 못하고 문에 손을 뻗었다. 일어나 문고리를 잡아챌 힘도 남아있지 않아 손톱을 세워 문을 긁으면서도 그는 끝까지 정신을 놓지 않았다. 시목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열망과 집착이, 그를 버티게 하였다.

아, 그러나 그것도 한계에 봉착한 듯 했다. 문을 긁는 시목의 손이 느려지고, 그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시목은 본능적으로 정신을 잃는 순간이 곧 자신의 끝임을 직감했다. 그 순간마저도 시목은 그 소리에 대한 물음을 멈출 수 없었다. 누구일까, 내가 열망하는 자는.

누구, 시목이 끝맺지 못한 질문이 그의 입 안에서 흩어지고, 시목을 괴롭히던 통증마저도 시목을 붙잡지 못해 그를 놓아주던 순간. 작은 소리가 그의 귀에 닿았다.

‘옷 좀, 빌려 주실래요.’

그 사람이다. 그를 애타게 하던 그 소리의 주인이다.

그 첫 말을 시작으로 그 사람의 말이 시목에게 쏟아졌다.

‘제가…아무거나 소화를 참 잘해요. 내일 봬요’

‘왜..전 안돼요 특임에?’

‘검사님! 왜 안돼요? 제가 못 미더우세요?’

‘네, 맡겨만 주세요!’

‘아줌마, 여기 소주잔 하나 더요.’

‘범인을 잡아야…구제라도 기대할 텐데..’

‘가르쳐주세요’

‘우리 아빠한테 돈 전달한 사람이요, 김태균! 놓칠까봐 일단 탔는데’

‘’뭐라도 해야죠, 선배가 이렇게 애써 주시는데…’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시목과 그 사이에 놓인 다른 소리들, 손 쓸 도리 없이 엉켜버린 실타래와 같았던 그것들을 덮으며, 그 이의 소리가 시목에게로, 그에게로 쏟아졌다.

시목은 이제야 그 말들이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들을 수 있었으나, 그럼에도 저 이가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에 처음으로 자신의 머리를 원망했다. 소주잔 하나 더 달라는 말엔 앞에 마주앉아주고 싶었고, 울먹이며 나는 감사하다는 소리엔 가슴이 답답했다. 그 답답함과 조급함에 손을 뻗어보았으나 닿는 것은 없었고, 소리만이 그를 감싸 안았다. 자신이 못 미덥냐는 소리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여전히 그의 손에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소리는 그저 소리로만 그에게 닿았을 뿐 형체가 없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소리들도 사그라들었다. 시목은 끝내 잡히지 않는 그 소리들이 못내 아쉬워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뻗은 손을 거두지 못하였다.

시목의 눈이 감기고, 곧게 뻗은 손이 툭, 떨어졌다.

그러자 시목이 눈을 감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꿈이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흐리게 빛나던 길도, 진작 사라진 안개도,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던 허허벌판도, 어둠에 먹혀 하나 둘 사라지고 시목마저도 어둠에 먹혔다.

그리고, 그것이 꿈의 끝이었다.

헉, 시목은 자신이 어둠에 먹히던 순간 숨을 몰아쉬며 꿈에서 깨어났다. 아직도 그 고통에서 벗어난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 듯 커진 시목의 눈이 방황하다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가 닿았다.

으응, 작게 잠투정을 하며 시목의 손에 얼굴을 부비는 은수가 거기 있었다.

손에 들어온 온기가 믿기지 않던 시목이 조심스레 누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은수를 마주 보았다.

제 옆에서 멀어진 온기가 느껴진 것인지 은수가 인상을 찌푸리다 손을 뻗어 더듬거렸다. 이내 은수의 손에 시목이 잡히고, 그 손길에 시목은 꿈의 여운에서 벗어나 은수가 자신의 곁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낸 그가 은수를 품에 안았다. 손의 떨림이 잦아들고, 은수의 고른 숨소리를 따라 시목의 가슴도 천천히 오르내렸다.

그래, 꿈이었던 것이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아슬아슬 그를 애태우던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고, 이렇게 그의 옆에 있었다. 품에 가득 안긴 은수의 온기가 끊임없이 그에게 말해주었다. 나는 여기 있다고. 시목은 그제야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그를 괴롭게 하던 갈망과 상실에서 벗어나 평안에 잠길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안개에 갇혀 있지 않았다. 이제 그는 안개를 벗어나 그가 바라는 사람과 함께 있었다. 그 사실이 그에게 깊은 안도감을 주었다. 시목은 은수를 감싸 안은 팔에 더 힘을 주며 깊게 끌어안은 채 잠이 들었다. 은수는 모를, 새벽녘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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