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8월 13일
- 9분 분량
여진시목/시목여진
<가을비>
양 (트위터 @0610_Y_)
* 시즌 1 최종화 시점 이후 일 년 정도 지난 시점의 일입니다.
** 시목은 서울로 돌아왔고, 여진은 용산서에서 근무 중입니다.
시목이 여진에게 사랑 고백을 한 건 더위가 차츰 찾아오던 어느 봄날의 일이었다. 그 고백을 여진이 받아들임으로써, 둘은 그날로 연인이 되었다. 둘의 연애에서는 끌고 가는 사람과 뒤따라가는 사람이 분명히 갈렸다. 비교적 무던한 성격의 시목을 매사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여진이 끌고 가는 모양새였다. 여진이 그렇게 이 연애에 힘을 쏟을 수 있었던 건, 그에게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시목을 가장 잘 아는 타인일 거라는 확신. 그런 믿음은 여진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게끔 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시목의 남다른 성격도 있었는데, 여진은 시목의 그런 한결같고 우직한 모습을 좋아했다. 변하지 않는다는 건 당시의 여진에게는 큰 행운으로 다가왔다. 지금 이대로만 지낼 수 있다면 어쩌면 언제까지나 그를 사랑할 수도 있을 거라며, 여진은 막연하게나마 그와의 먼 미래를 떠올려보곤 했다.
그러나 연인으로서 시목의 메마른 말과 행동들을 견딘다는 건 당연히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여진은 내심 그가 조금은 바뀌기를 기대하긴 했다. 그가 바라는 건 그리 큰 변화가 아니었다. 아주 조금만이라도, 자신에게 확신을 줄 수 있는 애정표현이면 되었다. 하지만 여진이 아무리 애정을 쏟아도 그는 여전히 똑같았다. 그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자, 여진은 그동안 그를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 밑에 덮어뒀던 상처들을 뒤늦게서야 하나둘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를 안다고 생각했고 그와 함께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밑 빠진 독에 혼자서만 사랑을 붓고 있었던 건 아닌지, 여진은 지나간 시간을 복기하면서 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점차 연애가 괴로워지기 시작했고, 애초에 시목의 고백이 진심이었는지조차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진은 자신이 여전히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이 관계를 붙잡고 싶었다. 여진은 시목을 설득해서 관계를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었다. 그는 갖은 노력을 했다. 울기도 하고, 차분히 앉아 설득도 해보고, 화도 내보고, 다 해봤지만 시목은 요지부동이었다. 애초에 여진이 왜 그러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와중에 여진은 자신이 점점 소진되어감을, 더는 쏟을 힘이 남아 있지 않음을 느꼈다. 참다 참다 도무지 견딜 수 없던 날, 여진은 시목의 아파트 앞에서 물기 어린 이별을 고했다. 시목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덤덤히 받아들였다. 매미 소리가 가득한 여름의 일이었다.
*
이 둘이 다시 만나게 된 건 살인 사건 현장인 어느 주택에서였다. 마치 후암동에서 처음 만났던 때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헤어지고 몇 주 동안 문자 한 번 안 하고 지냈는데, 담당 사건이 겹쳐 버리다니. 대문 앞에서 서로를 알아보자마자 여진은 얕게 탄식했다. 이게 하늘의 장난이라면, 장난도 이런 짓궂은 장난이 어디 있나. 그의 얼굴을 보니 지난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떠올랐다. 도저히 같이는 못 있겠다 싶어서 못 본 척 피하려는데, 시목이 먼저 그를 잡았다. 여진은 놀란 눈으로 그를 보고 말했다.
“아니 저…. 먼저 둘러보실래요? 저는 여기 밖에서 있다가…”
“괜찮습니다. 같이 들어가죠.”
당황한 탓에 여진이 연애 시절과 달리 존댓말을 썼는데도, 시목은 아무렇지 않은 듯 받아쳤다. 뭐가 괜찮다는 건지, 여진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붙잡은 걸까. 짧고 굵게 사귀면서 볼 장 다 보고 헤어졌는데 이럴 수 있는지, 여진은 복잡한 마음으로 집 안에 발을 들였다. 시체가 있던 거실 쪽에서 시목이 무언갈 골똘히 생각하며 서 있었다. 연애하는 동안 일을 핑계로 현장에 함께했던 적도 많았던 탓에, 여진은 이제 그 모습을 그저 보기만 해도 그가 머릿속으로 사건을 재현하는 중임을 알았다. 여진은 그를 그렇게 잘 아는 자신이 새삼 싫었다. 얼굴을 구긴 여진은 시목을 피해 안방 쪽으로 걸어갔다. 보강조사를 위해 나중에 다시 오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당장은 시목과 마주치기가 싫었기 때문에. 여진이 별 볼 일 없는 큰 방과 작은 방까지 훑고 나올 때까지, 그는 여전히 거실에 서 있었다. 여진은 그가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에 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런데 미처 몇 발자국 가지도 않았을 때, 시목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피해자는, 선박을 통해 마약 밀매를 하던 조직원이었습니다.”
여진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박무성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냈을 때처럼 덤덤한 표정과 말투였다. 하지만 그때는 혈흔 결과를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치더라도, 지금은 여진을 붙잡을 이유가 없었다. 안 그래도 복잡한 여진의 머릿속이 더 꼬이는 느낌이었다. 그는 들릴락 말락 한숨을 작게 내쉬고 입을 열었다.
“지금 나랑… 공조하자는 거예요?”
“… 범인 잡고 사건 해결해야죠. 경감님도 그러려고 여기 오신 거 아닙니까.”
여진은 할 말을 잃었다. 사건 앞에서 그리고 형사의 책임 앞에서 너무 애처럼 행동했나 싶은 생각에 조금 후회가 밀려왔다. 사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시목과 함께 수사해야 할 이유도 없지 않겠냐고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여진은 시목이 자신의 최고의 파트너라는 걸 알았다. 그건 곧 수사의 빠른 진전을 위해서는 둘이 함께하는 게 가장 우선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걸 시목 또한 알고 있기에 자신에게 말을 건넨 것일 테였다. 형사 한여진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래, 같이 해요, 이 수사.”
시목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건에 대해 빠르게 읊었다. 여진은 그 음성 위로 겹쳐 들리는, 자신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목소리를 애써 지웠다. 마음속으로는 이 일로 완전히 관계를 완전히 매듭지을 것이라 다짐하며.
*
두 달여 간 이어진 둘의 공조수사는, 예상 이상으로 여진에게 고역스러운 시간이 되었다. 시목도 시목이었지만, 사건이 예상 밖으로 규모가 커지는 바람에 수사만으로도 두 달을 정신 없이 보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수사 초기에는 원한으로 인한 단순 살인 사건으로 종결될 뻔했던 사건이었다. 만약 시목과 여진이 없었다면 그렇게 종결되었을 가능성이 컸지만, 둘은 수사를 포기하지 않았다. 다들 그게 무슨 메리트가 있어서 붙들고 있냐고 힐난하는 와중에, 사건의 배후에 지하 조직이 자리하고 있다는 확증이 나왔다. 이런 내용이 보고되자 무슨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조직의 뿌리를 뽑아 놓으라는 윗사람들의 지시가 내려왔다. 그 여파로 용산서에도 전담 수사팀이 꾸려질 거라는 말까지 돌았다. 그렇게 수사만으로도 벅찬 와중에, 시목과의 관계까지 견디려니 여진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이미 서로가 아는 바와 같이, 둘의 실력이나 서로를 보조하는 파트너쉽은 견줄 데가 없었다. 그러니 수사 자체에는 서로가 걸림돌이 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사건의 실마리가 풀려가는 것과는 별개로, 점점 꼬여만 가는 시목과의 관계에 여진은 두통만 늘어갔다. 그와는 지금 완전한 동료도, 친구도 아니지만 애인은 더더욱 아닌 이상한 관계였다. 시목은 여진과의 연애가 없었던 것처럼 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매듭짓지 못했던 그 관계를 신경 쓰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한 표정을 띄우고 있었다. 여진은 그런 표정을 봐도 마음이 정리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될 뿐이었다. 먼저 이 관계를 끊은 건 자신이었는데, 시목은 거기에 미련이 없는 건지. 남은 마음이 없다면, 다른 사람들한테 대하듯이 냉대하고 칼같이 잘라내지, 왜 자신을 거기서 붙잡았는지. 아니면 정말 아무 감정이 남지 않은 건지, 그러면 그 때 자신에게 했던 고백이 애초에 진심이긴 했는지. 결국 돌고 돌아 연애 시절에 했던 고민으로 생각이 돌아왔다. 과연 시목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긴 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여진은 점점 시목 앞에 선을 확실히 긋게 되었다. 어색하게나마 분위기를 풀기 위해 동원되었던 시시콜콜한 잡담은 없어지고 추리나 업무에 꼭 필요한 말들만 주고받게 되었다. 물론 시목은 여진의 변화에도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시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진은 직접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에게 마음이 남아 있든 아니든, 어느 쪽이든 간에 여진은 그의 확답을 듣는 건 죽어도 싫었으니까. 그에게서 미련이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면 흔들릴 게 뻔해서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보다도 시목의 마음이 완전히 정리되었다는 말을 피하고 싶은 게 더 컸다. 여진은 그야말로 시목으로부터 도망친 것이었으니까. 미움도, 원망도 섞여 있지만 마음이 떠난 건 아니었다. 그래서 억지로 몸을 떼어왔을 뿐인 여진이, 시목으로부터 마음이 없단 얘길 듣는 것 자체가 상처가 될 거라는 건, 굳이 상상해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여진은 시목을 계속 모르고 싶었다. 그저 수사의 종결과 함께 영영 헤어지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하려던 여진을 팀장이 불러세웠다. 여진이 무슨 일인가 묻자 그는 이틀 뒤로 전담팀이 꾸려질 거라고 통보했다. 그건 곧 여진이 사건에서 밀려난다는 말이기도 했다. 초동수사를 여진이 했다고 해도, 수사의 규모가 커지자 그는 경력팀 베테랑들과 마약팀 인력들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겨우 경력팀 삼 년 차이니, 여진은 가만히 이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수사를 그만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차라리 시목과 더 마주할 일 없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팀장의 지시에 따라, 그간의 자료들을 전담팀에 넘기기 위해 전부 정리해 박스에 담았다. 잘 정돈된 서류들을 보며 여진은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수사 기간 두 달. 시목과의 연애도 딱 그 정도 길이였다. 시목과 처음 함께했던 두 달, 남해에서 올라온 후의 연애 두 달, 그리고 다시 두 달. 이번은 사건도 여진의 손을 떠났고, 시목과의 관계까지 완전히 끝난 두 달이었다.
여진은 연애를 시작했을 때, 그가 다시는 없을 사람이고 또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봄과 여름에 걸친 시간, 그 계절 자체가 그들의 연애를 축복하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는 특히 햇빛을 받는 시목의 얼굴을 좋아했는데, 그 얼굴을 보기 위해 사무실에서 시목을 억지로 끌고 나들이를 나가곤 했다. 그건 다시는 없을 여름이었다. 여진은 서류들을 앞에 두고 떠오르는 생각을 억지로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이제 정말 끝이었다. 정확히는, 이제는 끝이길 바랐다. 시목은 여전히 그에게 다시 없을 사람은 맞았지만, 그래서 이제는 놓아주고 싶은 여진이었다. 다시 사랑을 하더라도, 이제는 벅차지 않은 연애를 하고 싶다며, 여진은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더군다나 이틀 뒤이면, 시목과 마주할 모든 명분이 사라지기에.
정리한 짐들을 뒤로하고 서를 나서려는데, 주머니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화면을 보니 시목이었다. 사건 때문일까. 여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호흡을 고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라고 말하자마자 시목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냈다.
-아 경감님, 어제 말한 씨씨티비 영상, 그거 원본 지금 저한테 가져다주실 수 있나요? 내일 분석 맡기려고요. 그리고 아까 아현동 다녀왔는데, 지하실에 아들이 쓰던 건지, 야구 배트가 있더라고요. 핏자국으로 보이는 게 있어서 일단 채취해왔는데, 이거 경감님이 내일 알아봐 주실 수 있겠어요? 지금 오시면 드릴 테니까.
여진은 시목의 말이 끝나자 전화기를 얼굴에서 떼고 작게 한숨을 쉬고는, 몸을 돌려 책상으로 돌아갔다. 박스를 뒤적거리며 전화를 이었다.
-하드는 나한테 있어요. 그런데… 검사님은 소식 못 들으셨나 봐요.
-무슨 소식이요.
-우리 서에 전담팀 꾸려진다고요. 나는 이 사건에서 완전히 손 떼요, 이틀 뒤이면.
-… 그런데요.
그런데요 라니. 그건 마치, 암묵적으로는 이미 공지 받은 오늘부터 밀려난 처지라 해도, 이틀 동안만이라도 본분을 다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이미 시목의 얼굴은 다시 볼 일 없을 거라고 여기며 정리했던 여진의 마음이 다시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한숨을 쉬고는 대답했다.
-… 알겠어요 혈흔은 내가 내일 알아볼게. 지금 어디예요. 사무실? 지검으로 가면 돼요?
-아뇨, 저 집입니다. 이리로 오세요.
그러고 시목은 전화를 끊었다. 하필 집이라니, 여진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연애할 때, 둘의 회사나 카페 같은 곳보다도 가장 많이 시간을 보냈던 장소가 시목의 집이었다. 여진은 그곳을 무척 좋아했다. 다른 사람은 거의 들이지 않는 그 장소에서 시목의 일상을 뜯어보는 게 좋았다. 원하는 바가 항상 분명치 않았던 시목에게 여진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의 집에 가겠다고 답하고는 했다. 시목이 별말 없이 전화를 끊은 건, 그런 여진이 주소를 잊었을 리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별했던 그 날부터 여진은 다시 그 아파트에 갈 일이 없을 것이라고 여겨왔지만. 그런데 하필 거기라니. 여진은 의자에 푹 눌러앉았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마음의 채비가 필요했다. 아무 이유 없이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곳인데 이제는 용건이 있어도 불편해졌다니, 여진은 어이없는 숨을 내뱉었다. 그는 의자에 기댄 채 그곳을 곰곰이 떠올렸다. 아마 현관문을 열자마자, 아니 그 단지의 풍경을 보자마자 마음이 많이 흔들릴 것이다. 여진은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채 멍하니 천장만 응시하고 있었다.
*
집안의 정적을 깨는 벨 소리가 들리자, 시목은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지난 두 달간 내내 그랬듯, 여진은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가 열어준 문으로 여진은 아무 말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먼저 소파에 앉은 시목에 여진에게 앉으라고 손짓하지만, 여진은 고개를 가볍게 젓더니, 가방에서 하드를 꺼냈다. 시목은 그게 영상임을 알고 그에게 하드를 건네받고, 그에게 면봉이 담긴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여진은 그걸 가방에 넣으며 처음 입을 열었다.
“내일 알아보고 연락할게요.”
여진은 그 한마디만을 하고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했다. 연애 때는 하지 않았던, 사무적인 묵례였다. 그는 바로 현관 쪽으로 걸어가다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여진은 몸을 돌려 시목을 바라보았다.
“수고했어요, 두 달 동안.”
시목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조금 벙찐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진은 그런 시목을 다시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그의 집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도어락의 전자음이 집 안에 퍼졌다. 시목은 여진이 나간 현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수고했다니. 그건 무슨 의미였을까. 정말 두 달 동안의 수사에 대해서 동료로서의 인사치레일까, 아니면 전 애인을 견딘 것에 대한 말이었을까. 그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내 지워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밤이 깊었지만 쌓인 일거리를 다 하고 자야 했다. 아마 아침에 가까운 새벽에야 침대에 누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시목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집안의 정적을 깨는 거센 빗소리가 들려왔다. 시목이 창밖을 보니 장대같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장마가 끝난 후 오랜만에 내리는 비였다. 잠시 비가 내리는 걸 응시하던 시목은 다시 집중하기 위해 서류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빗소리를 들으니, 아까 여진을 볼 때도 떠오르지 않았던 잡생각들이 머리 위로 하나 둘 떠올랐다. 유독 예고 없는 비가 많았던 올해 여름, 여진과의 데이트는 대체로 습도가 높았다. 일기예보를 확인했음에도 놀러 나갔다가 봉변을 당한 적이 많았었다. 그럴 때면 오히려 여진은 이런 게 좋다며, 쾌활하게 웃어 보이고는 했었다. 그저 그 날씨를 만끽하는 사람 같아 보였다. 시목은 축축함에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다가도, 그런 여진을 보면 어느새 얼굴이 펴지고는 했다. 물론 여진은 그것도 못마땅히 여겨, 항상 활짝 웃으라고 핀잔주고는 했지만.
시목이 그렇게 속절없이 잡념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들려온 초인종 소리가 그의 정신을 깨웠다. 일어나서 인터폰 화면을 보니, 밖에는 비를 좀 맞은 듯한 여진이 서 있었다. 여진의 집이나 용산서는 이곳에서 한 시간은 족히 걸렸다. 그러니 지금 여길 다시 왔다는 건, 여진이 집을 나서고 나서도 아파트 단지 내지는 이 근처에 계속 머물러 있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왜 떠나지 않고 남았을까, 무슨 용건으로 다시 왔을까. 현관으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시목의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이 스쳤다. 그가 문을 열자, 비에 젖은 여진이 눈에 들어왔다. 셔츠는 빗물에 늘어져 달라붙어 있었고 턱선을 따라 얼굴에서도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가방도 우산도 없는 맨몸이었다. 꽤 급하게 뛰어왔는지 아직도 호흡을 고르는 중이었다.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도, 여진은 예의 그 또렷한 눈빛으로 시목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시목이 왜 다시 왔냐 물으려는데, 이번에는 여진이 선수를 쳤다. 시목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그를 확 끌어안은 것이다. 그러고는 여진은 시목의 가슴께에 고개를 숙여 기댔다. 강한 힘에 꼼짝없이 붙잡혀버린 시목은 몸을 빼지도, 그렇다고 팔로 그를 감싸지도 못한 채 여진의 팔에 어정쩡하게 감겨 있었다. 시목은 옷 너머로 여진의 몸이 닿아 있음을 느끼며, 서로를 안는 게 일상이었던 시절이 있었음을 얼핏 떠올렸다. 아주 오랜만의 포옹이었다. 시목은 여진이 무슨 말이라도 하길 기다렸지만, 여진은 말이 없었다. 그저 시목을 꽉 안고 있을 뿐이었다. 몇 분 정도 지났을까, 여진의 몸에 흐르던 빗물이 더는 차갑지 않을 때쯤, 시목은 그가 왜 이곳에 돌아왔는지, 서서히 알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저 여진이 직접 말을 하기만을 가만히 기다렸다. 마침내 여진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래?”
시목은 팔을 움직여 여진의 몸을 감싸 안았다. 아직도 거친 숨에 들썩거리는 등을 차분히 쓰다듬다가, 여진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뜀박질에 달아오른 여진의 몸을 안고 있으니, 적당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새로운 계절의 시작이었다.
단순히 비를 뚫고 달려온 여진을 보고싶단 욕망에서 시작했던 시작했던 글이었는데, 이렇게 살이 붙게 될 줄 몰랐네요. 참고로 마지막 부분에서 여진의 말을 시목이 받아들이고, 둘이 다시 가을의 연애를 하게 되어도 변함없이 고통스럽고 질척거리는 연애가 될 거라고 생각하며 썼어요. 읽으시면서 어떠셨을까요? 좋았다면 거리낌 없이 말 전해주시면 기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