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 2020년 8월 12일
  • 22분 분량

동재시목

<악몽>


자몽 (트위터 @jamong_sm0602)


# 트리거 워닝 : 살인사건에 따른 “등장인물의 사망”과 “교살을 묘사” 하는 내용이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1.

또 그 꿈이다.

희미한 안개 속에서 시목 혼자 걷고 있었다. 저벅저벅. 이상하리만큼 발소리가 크게 울려, 시목은 긴장으로 솜털이 곤두섰다.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골목. 그러나 으레 있어야 할 가로등불 조차 없어 사위가 어두웠다. 축축한 장맛비의 냄새도 났다. 어디선가 빛이 흘러들어오는 건지 눈앞의 안개만은 뚜렷하게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장면이 전환되며 자신의 손이 처음 보는 여자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시목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엄지손가락으로 목젖 위를 강하게 누르고 있었고, 여자가 몸부림치며 괴로워했다. 그러다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다 축 늘어졌다. 움켜쥔 목덜미에서 급속도로 체온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생생해, 시목은 몸서리치며 손을 얼른 놨다. 눈앞에서 슬로우 모션으로 눈을 감은 여자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헉!”

시목이 소리를 치며 튀어 오르듯 일어나자, 옆에서 자고 있던 동재도 덩달아 잠에서 깼다. 뭐야, 또 악몽 꿨어? 눈을 비비며 일어난 동재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식은땀 흘리는 시목을 품안에 끌어안았다. 걱정 말고 더 자. 아직 두 시 밖에 안 됐어. 꿈은 꿈일 뿐이야. 동재는 신경 쓰지 말라며 품안의 애인을 도닥거려줬다. 시목의 앞머리에 입술을 부비고 등을 쓸어주며 익숙하게 다시 수면으로 유도했다. 꿈속에서 느꼈던 차가운 여자의 체온과 달리 자신을 품고 있는 애인의 체온은 따뜻해서, 시목도 몇 번 뒤척거리다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아휴, 검사님. 어젯밤에 제대로 못 주무셨죠? 얼굴이 때꾼하네.”

“그렇습니까?”

“맞나보네. 퇴근도 늦게 하시면서 집에 가도 매일 서류만 보시죠?”

출근하자마자 계장이 시목을 보며 얼굴색이 안 좋다고, 실무관과 너스레를 떨었다. 시목이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워낙 시목을 잘 아는 두 사람이기에 그의 손에 홍삼액 한포를 쥐어주었다. 이거, 우리 아내가 준 건데 하나 드세요. 시목은 계장에게 감사의 목례를 한 후, 홍삼액을 들고 자기 자리에 앉았다. 업무시작 전, 노트북이 켜지는 동안 시작화면을 물끄러미 보던 시목은 잠깐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최근 들어 매일 밤 시목은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똑같은 장소를 걸어가, 누군가의 목을 조르는 꿈. 처음 그 꿈을 꿨을 때는 체온이 빠져나가는 사람 피부의 감촉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 잠에서 깨면서 식은땀을 엄청 쏟았었다. 검사를 하면서 시체를 보아온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에 의해 타인의 숨이 끊어지는 장면은 아무리 꿈이어도 매번 치가 떨렸다. 처음에는 목 조르는 상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노인인지 어린아이인지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같은 꿈을 꾸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자신이 걸어가는 골목길이 같은 장소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밤마다 같은 장소를 걷는 꿈을 꿀 때마다 골목길의 지형지물이 하나씩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젯밤의 꿈에서는 드디어 자신이 목을 조르는 상대방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2.

[검사님, 잠깐 시간 되세요? 마포구 공덕동 10-2에요.]

시목이 같은 꿈을 일곱 번째 꾸던 날 오후였다. 휴대폰 화면이 반짝거려 확인해보니, 한 경위의 메시지가 와있었다. 무슨 일인지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주소만 보낸 문자를 보고, 짧게 ‘네’ 라고 보낸 시목은 일어섰다. 마침 외근이 있어 나가려던 참이라 그대로 백팩을 챙겨 지검 밖으로 나왔다. 휴대폰으로 주소 위치를 확인한 후, 거리가 멀지 않아 시목은 걷기 시작했다. 문자에 찍혀있는 장소에 도착해보니, 다세대 주택 입구에 노란 폴리스라인 테이프가 둘러져 있었다.

“여기요, 검사님!”

걸어오는 시목을 발견했는지, 멀찍이 서있던 여진이 그를 부르며 빠르게 걸어왔다. 시목이 눈짓으로 무슨 일이냐고 묻자 여진이 그의 팔을 붙잡고 한쪽 구석으로 데려갔다.

“곧 수사본부 세워질 거예요. 그런데 밀실 살인사건이라 골치가 좀 아프네. 검사님도 한 번 들어가서 보실래요?”

“밀실 살인사건이요?”

여진이 그렇다며 시목을 이끌고 다세대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골목 안이라 큰길가에는 cctv가 있지만, 이 골목 안에는 마침 없더라구요. 주택 현관에도 물론 cctv는 없고요. 여진의 설명을 들으며 시목은 지하 1층 원룸 입구에서 신발 위에 덧신을 신었다. 부검을 위해 사체는 이미 이송됐는지 감식반만 남아서 사진을 찍고, 증거물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시목은 원룸 안과 화장실을 둘러보며 이어지는 여진의 설명을 들었다.

“피해자는 이연미. 25살. 홍대 클럽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대요. 최초 신고자는 클럽 매니저. 닷새 동안 출근을 안 해서 매니저가 신고를 했나 봐요. 마지막 출근했던 날, 월급 중 일부를 미리 받아갔대요. 빨랫줄 같은 얇은 로프로 교살 당한 것 같아요. 처음에는 반항흔이 없어서 자살인가 싶었는데, 현장에서는 로프가 발견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현관과 창문에도 강제 침입 흔적이 없고.”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은요.”

“지금 용의자 리스트 뽑고 있긴 하지만, 만약에 면식범이었다면 왜 다른 흉기가 아니라 굳이 로프를 사용했을까요? 로프는 단번에 치명상을 입히기 어려운 도구잖아요. 범인은 피해자의 뒤에서 목을 졸랐어요.”

한창 시목과 여진이 이야기 나누는 뒤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이야, 범인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간도 크다. 서부지검이랑 마포경찰서, 용산경찰서가 지척인데 코앞에서 이래? 이건 완전 엿 먹으라고 시위하는 거 아냐?”

목소리의 주인은 용산서 강력3반 최 반장이었다. 한 경위 저거저거, 또 검찰 쪽 사람 불렀지. 시목을 본 최 반장이 여진에게 눈을 부라리자, 여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옆에 서있던 시목은 여진과 최 반장을 바라보다 조용히 주택 입구로 올라왔다.

“새로운 정보 들어오면 연락 주십쇼. 이만 가볼게요.”

“네, 검사님도 연락 주세요!”

뒤따라 나온 여진이 시목을 배웅하며 들고 있던 휴대폰을 흔들었다. 백팩을 고쳐 메고 빠르게 현장을 벗어나던 시목은 걷고 있는 골목 풍경이 낯이 익은 것 같아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오늘 처음 와본 주소지였기 때문에 자신이 착각한 거라 생각하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

3.

밀실 살인사건으로 TV에서 떠들썩했던 공덕동 살인사건은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풀려가는 듯 했다. 최초 신고자였던 클럽 매니저가 범인으로 용의선상에 올랐고, 거짓말 탐지기 등을 이용해 한창 수사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수사는 경찰들이 하는 일이고, 피의자의 범죄 사실 유무를 판단하고 형량을 구형하는 게 검찰이 할 일이니 수사 진척사항만 여진에게 종종 전해 들었다. 그것 말고도 시목은 맡은 사건들이 많아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다행히 한동안 시달렸던 악몽에서도 벗어나는 듯 했다.

똑. 똑.

어디선가 물방울이 느리게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목은 물방울 소리를 듣자마자 가볍게 소름이 돋았다. 또 그 꿈이다.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번 꿈과는 다른 풍경이었지만, 자신이 그 악몽 속에 들어와 있다는 걸 꿈에서도 깨달았다. 시야를 가리는 안개를 헤치며 앞으로 걸어 나가자 예전처럼 순식간에 장면이 전환되었다.

이번에는 손이 아니라 흰색 빨랫줄로 상대방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시목이 당황해 빨랫줄에서 손을 놓으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그만둬야 된다고 빨랫줄에서 손을 떼어야 한다는 생각했지만, 마음대로 손이 계속 움직였다. 갑자기 귓가가 날카로운 소리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메스꺼움이 느껴져, 꿈속에서도 이명을 느낄 수 있구나 싶어 당황스러웠다. 이명 현상이 시작되자, 시목은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혼란스러워졌다. 목을 조르는 상대는 남자인지 뒷머리가 짧았다. 손에 쥔 끈을 더 세게 잡아당기며,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자 눈에 익은 뒷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해야 돼, 그만! 반복되는 이 원인 모를 꿈에 대해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시목은 평소와 다르게 분노라는 감정이 확실하게 느껴졌고 그 감정을 자각할 수 있었다. 시목은 분노하며 소리를 질렀지만,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못했다. 빨랫줄을 쥔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상대방의 몸이 축 늘어지는 걸 보면서, 시목도 이명의 고통 때문에 까무룩 의식을 놓쳤다.

“황시목, 야! 시목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시목은 힘겹게 눈을 떴다. 꿈속에서 느꼈던 이명의 여파 때문인지, 잠에서 깬 후에도 귓가에서 희미하게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침대 위쪽에 앉아 부지런히 시목의 땀을 닦아주던 동재는, 그가 눈을 뜨자 반색을 했다.

“무슨 꿈을 꾸길래 그렇게 소리를 질러. 식은땀 흘린 것 좀 봐. 또 그 악몽 꿨지?”

“네... 아니요, 오늘은 저번 꿈과 조금 달랐습니다.”

“인마, 너 맨날 일에 치여서 햇빛도 못 보고 비실거리니까 기가 약해진 거야. 시골에 계신 우리 어머니에게 부탁해서 보약 한재 지어달라고 할까?”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자식, 너 요즘 부쩍 잠도 못자고 식사도 잘 못하는 것 같던데. 챙겨줄 때 먹어. 이게 다 애인을 아끼는 선배의 사랑이라는 거야. 너, 이런 사랑 아무나 받을 수 있는 줄 알아?”

보약 한재 먹고 나면 기운도 나고, 그런 악몽도 안 꿀 거라면서 동재는 휴대폰을 들고 거실 쪽으로 나갔다. 내친 김에 아예 그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거는 모양이었다. 시목은 자신의 손을 펼쳐서 손바닥을 확인했다. 꿈속에서처럼 빨랫줄을 손에 감아 당겼다면, 마땅히 있어야 할 붉은 줄에 쓸린 자국이 없었다. 흔적이 없는 걸 보고 나니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공덕동 살인현장에서 한 경위가 했던 말 때문인지, 이번 꿈에서는 빨랫줄이 등장한 것 같았다. 꿈은 현실에서 보고 듣고 생각했던 걸 반영하기도 하니까. 애인의 말대로 꿈은 꿈일 뿐이겠지. 하지만 꿈속에서 느꼈던 이명 때문에 아직도 시목의 귓속은 웅웅거리며 울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꿈에서 선명하게 느꼈던 분노가 지금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물방울이 떨어지던 풍경의 악몽은 다행히 한 번 꾼 후, 더 이상 꾸지 않았다. 동재는 자기가 지어준 보약을 먹은 덕분이라며 황시목 넌 기가 약해졌던 것뿐이라고 으스댔지만, 시목은 석연치 않았다. 또 그 악몽을 꿀 것 같은 불안감에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할 때마다 긴장이 되었다.

4.

똑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시목이 고개를 들었다. 안쪽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한여진 경위였다. 의외의 방문객에 시목은 읽고 있던 사건 서류를 놓고, 그녀를 바라봤다.

“한 경위님?”

“아이고. 수고가 많으십니다, 검사님. 많이 바쁘신가 보네. 어휴, 이 서류더미들 봐.”

여진이 붙임성 있게 인사를 하며 안으로 들어오자, 시목도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 앞쪽 소파에 앉으며 앉기를 권했다. 여진은 자리에 앉자마자 서류봉투에서 사진들을 꺼내, 소파 탁자 위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검사님, 지금 시간 좀 괜찮으시죠?

“네, 무슨 일 있는 겁니까?”

시목의 질문에 여진의 표정이 짐짓 어두워졌다. 여진이 꺼내놓은 사진은 각기 다른 두 구의 시체 사진들이었다. 다른 장소에서 찍은 듯 했지만, 목에 확연하게 드러난 붉은 상흔은 한 눈에 봐도 동일범의 소행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편안하게 누워있는 사진 속의 남자와 여자는 목을 졸린 상흔만 아니었더라면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 사진은 열흘 전에 일어난 공덕동 살인사건 현장 사진이에요. 옆에 건 어제 일어난 미아동 살인사건 현장사진이고요. 오늘 도봉서에서 업무 협조 요청이 들어와서 받은 사진인데, 보자마자 살해 수법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검사님이 보시기엔 어때요?”

공덕동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 됐던 클럽 매니저에게 체포영장이 발부 돼서 피의자 심문 중이긴 한데, 계속 자기는 안 죽였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거짓말 탐지기도 반응이 없었고요. 그리고 부검 결과 피해자에게서 소량의 LSD 계통의 환각제가 검출 됐어요. 부검의는 피해자가 LSD 약물을 투여한 상태에서 목을 졸렸기 때문에 반항흔이 없었던 거라고 보고 있어요. 피해자는 목을 졸릴 때 환각 상태여서 고통보다는 쾌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여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시목은 남자의 사진을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곳에서는 목을 조른 범행도구가 현장에서 발견 됐습니까?

“아뇨, 미아동에서도 공덕동과 마찬가지로 발견되지 않았어요. 이 사람도 반항흔이 없었다는데, 부검 결과 이 사람 역시 혈액에서 LSD 계통의 환각제가 검출됐어요.”

“두 사건의 공통점은 체내에서 LSD 약물이 검출된 것과 범행도구의 유사성이군요. 혹시 두 사람이 아는 사이입니까?”

“아뇨, 접점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에요.”

“미아동 살해 용의자는요?”

“아직 특정할 만한 인물이 없어요. 집안에서 피살된 상황이라 목격자도 없고요. 피해자의 동거인이 있었다고 해서 소재 파악 중이에요.”

“그럼 우선 LSD 약물 판매업자를 찾아보는 게 빠르겠습니다. 약물 판매업자를 만나보면 단서가 잡힐지도 모르겠네요.”

“넵! 저는 용산서 들렸다가 미아동으로 가볼게요. 검사님, 고마워요!”

덕분에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으로 사무실을 나서는 여진을 보내고, 시목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진이 보여준 현장사진에서 봤던 남자의 뒤통수가 얼마 전에 꿈에서 봤던 사람의 뒷모습과 겹쳐보였다. 계속 이어지는 악몽이 스트레스인건가. 괜한 삿된 생각이라고 생각하며, 단 한 번 꿈에서 봤던 남자의 뒷모습이 지금까지 기억날 리가 없다며 혀를 찼다. 시목은 다시 손에 든 서류를 한 장 뒤로 넘겼다.

여진에게 다시 연락 온 건 그날 저녁 9시경이었다. 지금 바로 용산서로 와달라고 여진에게 문자가 와, 퇴근 준비를 하고 있던 시목은 알겠다고 답장을 했다. 서부지검 로비 나서며 시목은 동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서 검사님, 좀 늦을 것 같습니다.”

“뭐야, 아직도 지검이야? 요즘 맨날 늦어, 너! 그렇게 무리하면 보약 먹는 거 다 도루묵이야. 당장 안 들어와?”

“잠깐 용산서 들렸다 가겠습니다.”

동재가 뭐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시목은 자기가 할 말만 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그에게 다시 전화가 왔지만, 시목은 종료버튼을 누르고 차 운전석에 앉았다. 용산서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여진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시목을 찾았다. 시목은 영문도 모른 채 비상구 계단으로 끌려갔다.

“검사님, 내일 뉴스에 보도되기 전에 검사님이 먼저 알아야 될 것 같아서, 급하게 부른 거예요. 절대 놀라면 안 돼요. 알았죠?”

“네? 네.”

다짐을 받고 사무실 안쪽으로 시목을 데려간 여진은 그에게 서류봉투 한 개를 내밀었다. 읽어보라는 말에 꺼내 본 서류는 미아동 사건조사서였다. 시목이 겉장을 넘기자 낯익은 이름이 눈에 띄었다. 피해자 황재범. 간단한 인적사항이 적혀있는 아래에는 낮에 여진이 보여줬던 사건 현장 사진들이 붙어있었다.

“피해자가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들어 온지 이 년 밖에 안 됐더라고요. 그래서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연락하기가 어려웠는데...”

여진이 말끝을 흐리며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시목은 다시 한 번 찬찬히 서류 속의 내용을 읽어보았다.

“맞습니다, 제 친부네요.”

담담한 시목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건 여진이었다. 여진은 뭔가 말을 꺼내려고 애쓰다가 포기했다. 함부로 시목을 위로할 수가 없었다.

“놀랐죠, 검사님.”

“음... 네. 저도 십 오년 만에 처음 소식을 듣는군요.”

“...그래요? 아무튼 그래서 검사님도 확인 차, 곧 도봉경찰서 출석요구서가 갈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뵐게요.”

여진에게 인사를 하고 용산서를 나서는 시목의 등이 유난히 구부정해 보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등 좀 펴라고 세게 등을 두드려줬겠지만 오늘따라 그의 구부정한 등이 아파보여서, 여진은 시목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5.

시목은 그날 밤,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꿈을 꿨다. 막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때였나. 가족들과 함께 놀러간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줍던 풍경이 펼쳐졌다. 어린 시목은 모래사장에 앉아 조그맣고 반질거리는 조개껍질을 주워, 유리 주스 병에 넣었다. 조개껍질을 어느 정도 모으자 반사되는 햇볕에 비춰보며 천진난만한 웃음을 터트렸다. 시목아. 멀리서 어린 시목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목은 네라고 대답하고 일어서려고 했다.

“시목아, 내 것도 너 줄게. 이것도 가져가.”

쪼그리고 앉아있던 시목이 일어서려는 찰나, 누군가 다가와 조개껍질이 담겨있는 유리병을 내밀었다. 시목이 들고 있는 병과 똑같은 유리로 된 주스 병이었다. 시목이 고개를 들어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해를 등지고 서있어, 역광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빨리 받으라는 상대의 재촉에 엉겁결에 시목은 유리병을 받아들었다.

여진의 말대로 이틀 후, 시목에게 도봉경찰서 출석요구서가 도착했다. 경찰서에 가 형식적인 조사를 받고 나오던 시목은 경찰서 입구에서 여진을 만났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진은 시목을 발견하자마자 그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검사님, 조사 잘 받고 왔어요?”

“네... 뭐.”

“잠깐 보여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뭡니까?”

여진은 들고 있던 봉투에서 얼른 사진 두 장을 꺼냈다. 한 장은 cctv화면을 출력한 사진이었고, 다른 한 장은 몽타주 사진이었다.

“미아동 사건 피해자에게 동거인이 있었다고 했었잖아요. 일단 그 동거인이 용의선상에 올랐는데, 이게 피해자 집 근처 편의점 CCTV 사진이에요. 그리고 편의점 점원에게 확인한 동거인 인상착의를 토대로 만든 용의자 몽타주고요. 보세요, 검사님하고 완전 닮았죠? 우리서 강력반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랐다니까요? 혹시 검사님 도플갱어 아니냐면서요.”

몽타주 사진과 CCTV 사진의 남자를 본 시목은 침음했다. 여진의 말대로 도플갱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시목과 닮은 모습이었다. 곧은 눈썹, 크지 않지만 매서운 눈꼬리 모양, 굳게 다물린 입술. 머리 스타일은 달랐지만 사진 속의 남자는 그가 시목이라도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닮아있었다.

“신원 확인은요. 벌써 몽타주 나간 겁니까?”

“아뇨, 몽타주는 조금 전에 나온 거라, 아마 내일 각 서로 전달될 거예요. 그리고 이 사람 국적이 한국이 아니라 신원 파악이 어려워요. 이름이 제임스 황이라는 것 외에는 피해자와 어떤 관계인지 아직 몰라요.”

“같은 황 씨라면 친인척일수도 있겠네요. 피해자 친척들을 먼저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럼 저는 일단 용산서로 들어가 볼게요. 검사님은 바로 지검으로 가세요?”

“아뇨, 들릴 곳이 있어서... 나중에 서에서 봅시다.”

여진과 헤어진 시목은 자신의 차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여진이 내민 몽타주 사진을 봤을 때부터 찜찜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이 찜찜한 기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시목은 운전대를 쥐고 도봉서를 빠져나왔다.

“얘는, 오기 전에 연락 좀 하고 오래도.”

시목이 향한 곳은 친모의 아파트 단지였다.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는 예전보다 수척해보였다. 그녀도 친부의 살해사건 때문에 출석요구서가 갔었을 것이다. 그러나 친모나 시목이나 그 일에 대해서 서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가느다란 친모의 팔목을 조용히 응시하던 시목이 고개를 들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요.”

“혹시 니네 아버지에 대한 일이라면, 더 이상 할 말 없다. 경찰서에서 다 이야기 하고 왔어.”

“그게 아니고, 혹시 저와 닮은 사촌이 있나요?”

“뭐? 시목아... 너 기억이 하나도 안 나니?”

“......네?”

어머니의 반문에 오히려 놀란 건 시목이었다.

“너랑 쌍둥이인 형이 있잖아. 시현이, 황시현(黃乨炫). 나는 네가 미국에서 수술하고 돌아온 후, 형한테 관심이 없어져서 소식을 묻지 않는 줄 알았지.”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면 쌍둥이인 시현과 시목은 사이좋은 형제였다고 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졸업 무렵부터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시목이 때문에 시현이는 며칠씩 이모네 집에서 지내다 오곤 했다고 했다. 결국 중학교 2학년 때, 시목의 뇌에 선천적인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았고, 부모님들은 고민 끝에 미국으로 건너가 시목의 뇌수술을 받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그러나 형인 시현이까지 데려갈 여력이 되지 않아, 아예 친척집에 맡겨두고 어머니와 아버지, 시목이 셋만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수술은 세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마칠 수 있었지. 수술하는 동안 너희 아버지랑 무던히도 싸웠어. 그때 빚고 많이 졌었고. 나중에 들어 보니 시현이도 친척들 집을 전전하면서 고생했다고 하더라. 아무튼 중간에 이혼하면서 너희 아버지가 시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갔고, 나는 너와 한국으로 돌아왔었어.”

친모의 말을 들은 시목은 혼란스러워졌다.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에게 형제가, 그것도 쌍둥이 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었다. 한 경위가 보여준 CCTV 사진 속의 남자를 보고, 혹시 친척 중 한 사람이 아닐까 싶어 친모에게 확인하러 왔던 것뿐인데,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확실히 뇌섬엽 수술을 하고 난 후 어렸을 때의 기억, 특히 부정적인 기억들이 희미해진 것 같긴 했다. 아니면 자기방어기제가 작용해 형에 대한 기억을 시목의 뇌 깊숙한 구석으로 숨겨놨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목이 묵묵히 듣기만 하고 대꾸가 없자, 친모가 고개를 틀어 아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나는 네가 형에 대해 잊어버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어머니의 말에 시목은 불현듯 며칠 전에 꿨던 어린 시절의 꿈이 떠올랐다. 꿈속에서 어린 시목에게 유리병을 내밀었던 사람이, 바로 형인 시현이었다는 걸 문득 깨닫게 되었다. 시목이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무의식중에 꿈에서 보았던 것이다.

“혹시 황시현이 어머니에게 찾아오지는 않았었나요? 아버지가 재작년 미국에서 들어올 때 같이 들어왔을지도 모르는데.”

“그래? 지금까지 한 번도 연락 온 적은 없었어. 너희 아버지가 내 연락처 알고 있으니까 시현이도 내 전화번호를 알고 있을 텐데... 하긴, 시현이가 날 보고 싶어 하겠니? 미국으로 떠나면서 내가 시목이 널 선택해서, 자기는 아빠랑 가게 됐다고 원망 많이 했었어. 어렸을 때도 아픈 너만 보살피고 신경 쓴다고 투정을 많이 부렸었거든. 지금도 날 원망하고 있을 거야.”

편의점 CCTV에 찍힌 사람이 황시현이 맞다면, 그가 친부 살해 용의자일 수도 있다고 시목은 생각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님의 이혼 때문에 강제로 아버지와 미국에 가게 되었다면...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을 가능성이 크다. 그게 친부 살해의 동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함께 있었던 미국이 아니라 굳이 한국으로 들어와서 범행을 저질렀을까.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는 시목을 보던 친모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야기가 끝났으면 들어가 보겠다는 어머니에게, 시목은 어쩌면 형이 친부 살해 용의자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형에게 연락이 오면 언제라도 좋으니 꼭 자신에게 전화를 달라고 당부를 했다.

어머니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시목은 한 경위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경위님, 부탁이 있습니다. 지금 바로 북가좌동 XX아파트에 경찰인력 좀 배치해주십쇼. 이유는 지금 용산서에 가서 말해드릴게요.”

만약 황시현이 친부를 살해한 게 사실이라면,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거라는 시목의 친모도 위험해질 수 있다. 시목은 차를 돌려 용산서로 향했다.

도봉경찰서 출석요구서 때문에 반차를 낸 시목은 친모 집을 방문한 후, 용산서에 들렸다 바로 공덕 래미안으로 향했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안으로 들어가자, 동재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일찍 퇴근하셨네요.”

시목이 동재에게 인사를 건네며 재킷을 벗었다. 동재는 대꾸도 없이 TV 리모콘을 들어 채널을 여러 번 돌렸다. 며칠 전 늦는다고 전화를 걸었을 때,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서 삐졌다는 걸 지금 온 몸으로 티를 내고 있었다. 시목도 그런 애인을 한 번 쳐다보기만 할 뿐, 말을 걸지 않고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갔다. 반응 없는 시목이에게 먼저 반응한 건 동재였다.

“야! 황시목! 이제는 애인을 아예 무시하겠다 이거지?”

그동안 둘 다 바빴던 탓에 그날 일에 대해 제대로 대화를 하지 못 했었다. 동재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히며 일부러 일찍 퇴근해, 시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저 건방지기 짝이 없는 황시목은 죄송하다고 사과를 해도 모자랄 판에, 말도 없이 방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동재는 참고 있던 울화가 치밀었다. 방안으로 들어간 시목을 바로 뒤쫓아가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무표정한 얼굴로 멱살 쥔 손목을 걷어내며 시목이 중얼거렸다.

“이거 놓으시죠. 화 많이 나셨습니까.” “이 자식이! 너, 싸가지 없게 전화 톡 끊는 건 그렇다고 쳐! 근데 그런 중요한 일을 그 용산서 경위인지 나발인지를 통해서 알게 할래, 어?”

“무슨 말씀입니까.”

화가 나 씨근덕거리던 동재는 미간을 찡그리며 애써 숨을 골랐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애인의 얼굴을 보니 다시 울화통이 터졌다. 아무리 황시목이 로봇처럼 무심한 녀석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너희 아버지 일 말이야! 살인사건에 휘말렸다는 걸, 너한테가 아니라 한여진에게 들어야 되겠냐고!”

“...별 일 아닙니다. 그동안 연락이 끊겼었다가 저도 이번 사건 때문에 십 오년 만에 소식을 알게 되었는걸요.”

“별 일이 아니긴.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 일인데... 괜찮냐?”

사실 동재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시목이 자신에게 먼저 말을 안 했다는 서운함이 더 컸다. 안 그래도 요즘 악몽에 시달리느라 잠을 잘 못자서 살이 빠진 것 같던데. 정말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멀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애인을 보고 있자니, 동재는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서운함이 녹아내리며 허탈해졌다. 한동안 새벽에 들어와서 잠들기 바빴던 시목의 얼굴을 이제야 제대로 보는 기분이었다. 그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지. 동재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 시목을 품안 가득 끌어안았다. 그리고 애인의 뒤통수부터 등허리까지 천천히 쓸어주면서 나름대로 화해의 스킨십을 시도했다.

“야, 황시목. 그래도 그런 일은 나에게 제일 먼저 알려줘야 할 거 아냐. 난 그냥 직장 상사가 아니라 네 애인이잖아. 서운했다고.”

“...예. 죄송합니다, 검사님.”

“그 검사님 소리도 좀 그만하고. 여보, 자기, 형 이런 좋은 호칭 많이 있잖아. 어이구, 황시목. 언제 애인 노릇 제대로 할래.”

죄송합니다. 시목의 두 번째 사과는 애인을 꽉 끌어안은 동재의 품속으로 사라졌다. 단단하게 언 얼음도 해빙점을 만나면 녹아내리는 법이다. 친모를 만나고 온 후, 날이 섰던 마음이 애인의 따뜻한 품 안에서 말랑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동재는 늘 시목이에게 해빙점이 돼주었다. 동재의 품안이 답답해진 시목이 어깨를 뒤척거렸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동재의 입술에 입술을 가만히 포갰다. 시목 나름대로의 화해의 제스처였다. 입맞춤을 하자 동재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지는 듯 보였다. 그러다 문득 형인 시현의 존재가 떠올라 동재에게 물었다.

“검사님, 저 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야, 끔찍한 소리 마라. 너 같은 놈이 또 어디 있다고! 황시목이 한 명 더 있으면 지구 멸망이야. 나니까 황시목을 데리고 살지.”

“그렇습니까?”

되묻는 시목의 표정도 덩달아 부드러워진다. 다시 한 번 입술을 포개자 마법처럼 동재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근데 너 자꾸 악몽 꾸고 잠 못 자는 거, 수면 클리닉 같은데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그런 것 같은데요.”

“그럼 더더욱 가봐야지. 하루 이틀 그러는 게 아니잖아. 내일 오후에 잠깐 나랑 같이 다녀올까?”

“괜찮습니다.”

어이구, 황고집. 괜찮다고 하지 말고 혼자라도 꼭 가라는 애인의 말에 시목은 마지못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6.

다음날, 시목은 여진과 함께 오전부터 공덕동 사건 현장과 미아동 현장을 방문했다. 공덕동 사건 피해자 집 주변을 돌면서 범인이 어떻게 집안에 침입을 했고, 어떤 방법으로 범행을 저질렀는지 조사해보기 위해서였다. 피해자의 다세대 주택 현관에는 전에 있었던 폴리스라인이 거둬져있었다. 대신 지하 1층 피해자의 집 문 앞에만 노란 테이프가 붙어있었다. 테이프 아래로 허리를 구부려 들어가자, 처음 현장에 왔었을 때보다 원룸 안은 어수선해져 있었다. 원룸의 형태가 대부분 그러듯이 현관 옆에 작은 싱크대가 있었고, 현관 맞은편 벽에 화장실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대각선으로 침대 한 개와 화장대 한 개, 단출한 가구 밖에 없었다.

“공덕동 피해자는 클럽 서빙 알바를 하면서 약물을 시작한 것 같더라고요. 어떤 루트를 통해 약물을 구입했는지는 아직 파악 못 했는데, 클럽 손님 중에 있었을 거라 보고 단골손님 위주로 조사하는 중이에요.”

“피해자는 출근하는 클럽을 가는 것 외에 별달리 외출도 안 했다면서요. 클럽 손님 중 누군가가 피해자에게 약물을 소개시켜줬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약물에 중독되기 시작한 피해자가 직접 판매자와 연락을 해서 약을 구입했을 거고요.”

“하필 피해자의 휴대폰이 집안에 없었어요. 경찰 쪽에서는 범인이 가져갔을 거라고 추측만 하고 있어요.”

“집 안에 남아있던 LSD 환각제는 없었습니까?”

“신기하게도 집안에는 환각제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부검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저희들도 전혀 몰랐던 거고요.”

아직 범행도구도 찾지 못했다면서 방안을 둘러보던 여진은 현관으로 나가는 시목을 뒤따라 밖으로 나갔다. 다세대 주택 밖으로 나간 시목은 방범창살이 촘촘하게 있는 지하실 창문을 확인하고 일어섰다. 피해자 집이 지하여서 외부에서 침입하기는 어렵겠네요. 시목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주택 뒤쪽까지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다. 다세대 주택 뒤쪽에는 또 다른 다세대 주택 건물이 붙어있어서 지하 현관 외에는 특별한 침입경로가 없어보였다.

“범인이 미리 집에 들어가 있을 수 있는 친밀한 관계의 사람이었거나, 방문을 해도 피해자의 저항 없이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남자친구나 약물 판매업자 같은...”

“글쎄요. 조사결과 스테디하게 만나는 남자친구는 없었고, 클럽 사람들과 친구들 쪽은 사건 당일 다 알리바이가 있었어요. 역시 약물 판매업자를 찾아내는 게 빠르겠네요.”

“그럼 여기는 대충 둘러봤으니 미아동으로 갈까요?”

시목과 여진은 미아동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골목길을 걸어 나왔다. 시목이 처음 현장에 왔던 길과 반대편 큰 길로 나오는 길이었는데, 시목은 이 골목을 걸어본 듯한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잠깐만요. 여진에게 기다려달라고 한 시목은 걸음을 멈춰서 몸을 돌렸다. 그런 후 방금 전에 지나왔던 길로 다세대 주택을 향해서 몇 걸음 되돌아갔다. 한 발씩 내딛을수록 눈에 익은 길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주택의 반지하 방범창들과 초록색 음식물 쓰레기통, 그리고 전봇대. 그 꿈이다. 예전에 며칠간 시달렸던, 자신이 여자의 목을 조르던 악몽에서 봤던 풍경이었다. 시야가 안개 때문에 흐릿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었지만, 바닥을 내려다보며 걷다보니 꿈에서 본 것과 같은 눈에 익은 물건들이 있었다. 시목은 걸음을 멈추고 다시 여진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다세대 주택을 향해서 바닥을 보며 걷기 시작했다.

“검사님 뭐해요? 바닥에 뭐 떨어졌어요?”

말도 없이 길을 왔다 갔다 하는 시목을 보며, 여진도 뒤쫓아와 같이 골목길 바닥을 두리번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여진이 물어봐도 시목이 한참동안 대답이 없자, 그녀가 시목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누가 보면 돈이라도 잃어버린 줄 알겠네! 뭐 찾는 거 있어요?”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에잉, 싱겁기는. 얼른 미아동으로 갑시다. 저 바빠요. 오후에는 다른 곳에도 가봐야 한다고요.”

여진의 재촉에 그제야 시목은 걸음을 멈췄다. 세 번이나 관찰하며 걸어본 후, 꿈에서 봤던 길이 맞다고 시목은 확신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다시 걸음을 멈춘 시목을 끌고 차에 태운 여진은 다음 행선지인 미아동 사건 현장으로 이동했다.

미아동은 최근에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라 그런지, 아직 현장을 지키는 경찰이 있었다. 연립주택 문 앞에서 서있던 경찰에게 목례를 한 여진과 시목은 덧신을 신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시목에게 친부의 기억은 어렸을 적 기억 밖에 없었다. 그나마 있던 기억들도 뇌수술과 오랜 시간이 흐른 덕분에 대부분 유실되었다. 투룸에 부엌과 화장실 한 개. 집안을 둘러보며 다니던 시목은 어느 집에나 으레 있는 사진이 한 장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자신의 집처럼. 각각의 방마다 침대가 하나씩 있고, 부엌에 있는 식기류를 보면 친부 이외에 한 명이 같이 살고 있었던 게 확실했다.

“피해자의 동거인 제임스 황의 소재는 파악 됐습니까?”

“추적 중인데 이 사람이 외국 국적이다 보니 쉽지가 않네요. 사건 당일 날부터 귀가하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용의자일 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수사 중이에요. 그리고 검사님이 전에 조사 부탁했었던 황시현은 피해자 황재범의 아들이 맞아요. 그런데 미국으로 같이 이민을 간 후, 칠년 전에 국적 포기를 했어요. 아마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면서 한국 국적을 포기한 거겠죠. 한국 국적을 포기하면 더 이상 가족관계기록부에 변경 사항이 기재되지 않아 확인이 불가능해져요.”

“제임스 황과 황시현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은요?”

“경찰도 둘이 동일 인물이라는 가정하에 수사 중이에요. 그런데 왜 황재범은 미국 시민권을 얻지 않고, 아들인 황시현만 국적 포기를 하고 시민권을 얻었을까요?”

“황재범은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이 있었고, 황시현은 한국에 돌아올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 검사님 천재! 그렇구나. 그럼 황시현은 한국을 싫어했을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이 집에서도 LSD 환각제는 발견되지 않았다면서요.”

“그러니까요... 그래서 지금 사건이 미궁에 빠졌어요. 왜 이곳 피해자 혈액에서도 LSD 환각제가 나왔을까요. 참 알 수가 없네. 주변 사람들이 피해자가 평소에 술은 마셔도 약물은 할 사람은 아니라고 하던데.”

똑.

그때 어디선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동시에 시목의 뒷목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 악몽에서 들었던 물방울 소리와 방금 들은 물방울 소리가 오버랩 되면서, 시목에게 천천히 이명 현상이 찾아왔다. 순식간에 올라온 구역감과 함께 신경을 거스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어, 시목은 오른쪽 귀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상체를 웅크렸다. 방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시목이 미간을 찡그리며 귀를 막자, 여진이 놀라 시목에게 다가갔다.

“검사님, 괜찮아요? 어디 아파요? 오늘 아까부터 좀 이상하네.”

잠시 눈을 감고 마른침을 계속 삼키던 시목은 어느 정도 이명이 잦아들자 감았던 눈을 떴다.

“몸 안 좋으면 가서 쉬어요. 안 그래도 여기 온다고 할 때부터 좀 걱정되더라.”

눈을 떠보니 시목의 앞에 여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있었다. 아마 친부의 살인사건 현장이여서 여진의 입장에서는 시목과 같이 오기 조심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시목은 괜찮다고 했지만 여진은 그만 나가자며 그를 데리고 연립주택 밖으로 나왔다.

“검사님, 검사님은 자각 못할 수도 있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가 올 수도 있으니까 당분간 미아동 현장에는 오지 마세요. 알았죠?

그래도 친부의 살인사건 현장이잖아요. 여진이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이어질 뒷말을 알 수 있었다. 나중에 또 오늘처럼 상태가 안 좋아지면 심리 상담이라도 꼭 받아보라며 여진이 한바탕 훈계를 늘어놨다. 시목은 알겠다면서 사건 진행 사항을 수시로 알려달라고 한 후, 여진과 헤어졌다. 사실 시목은 친부의 살인사건 현장을 직접 확인한 것보다는, 아까 공덕동 사건현장에서부터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 때문에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애인의 권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시목 스스로 궁금한 것이 생겨 수면클리닉에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시목은 자가용에 앉아 휴대폰으로 서부지검 근처에 있는 수면클리닉을 검색해 보았다. 그러나 가까운 곳에 마땅히 갈만한 수면클리닉은 없었고 코골이 치료 병원만 있었다. 그러다 마포구의 어느 정신건강의학과의원에서 수면장애 클리닉 상담을 한다는 홍보 글을 보고 그곳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7.

“황시목 씨, 들어오세요.”

간호사의 호명에 시목은 진료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차분한 베이지색 벽에 파스텔톤 핑크색과 그린색으로 이루어진 문. 병원 인테리어 덕분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의사선생님이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어서 오세요. 황시목 씨는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습니까?”

“궁금한 게 있습니다.”

시목은 자리에 앉아 반복적으로 꿨던 악몽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같은 꿈을 연속적으로 일주일이나 꿨던 일. 그리고 꿈에서 본 듯한 장소에서 실제로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 시목스스로 생각해봐도 비과학적인 일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기시감과 묘한 의구심이 때문에 의사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비과학적인 현상이고 믿기지는 않지만, 예지몽을 꿀 수도 있습니까.”

시목의 말을 듣던 의사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황시목 씨 스스로 잘 알고 계시네요. 예지몽이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수면 중 잦은 악몽으로 인한 문제가 있다면 수면장애나 우울증, 정신장애의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악몽은 전체 꿈 중 95%를 차지한다고 하죠. 이는 꿈이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소 스트레스가 심한 사람이, 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악몽이 매우 정교하고 생생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환자분이 악몽을 반복적으로, 생생하게 꿨던 건지도 모르고요. 환자분의 악몽은 스트레스뿐만 아니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반응이나 수면장애, 우울증 등 정신장애의 징후로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혹시 최근에 충격적인 일이나 스트레스 받을 만한 큰일이 있었냐고 의사가 물었다. 시목은 천천히 최근의 일들을 되짚어보았다. 최근에 일어난 살인사건보다 악몽을 꿨던 게 먼저였다. 그러니 친부의 살인사건이 충격의 계기가 되어 악몽을 꿨을 리는 없다. 그리고 최근에 스트레스를 받을만한 큰일은 없었다. 평소와 같은 반복적인 일상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아뇨,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선생님, 혹시 일란성 쌍둥이는 한쪽의 생각이나 감정을 정서적인 교감을 통해 다른 쪽과 공유할 수 있습니까?”

“그것 역시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된 사실이라고 대답 드릴 수밖에 없네요. 그래도 쌍둥이들에게 초감각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분석심리학자가 있긴 합니다. 쌍둥이 중 한 명이 아프면 다른 한 명도 아프기도 하고, 한쪽이 위험하면 다른 쪽에서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느꼈다는 사례 보고도 있으니까요.

“초감각이요...”

시목은 자신이 꿨던 꿈이 예지몽이 아니라면, 의사의 말대로 쌍둥이 형의 감정을 초감각이라는 걸 통해서 공유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처음에 꿨던 꿈에서 여성의 목을 조를 때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두 번째 꿈, 남성의 목을 조를 때는 시목의 감정이 아닌듯한 커다란 분노의 감정이 느껴졌었다. 뇌섬엽 수술 후, 그렇게 명확하고 큰 분노의 감정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라서 낯설었던 기억이 난다. 비록 꿈에서 느꼈던 감정이었지만. 자신의 추측대로 황시현이 두 사건의 범인이 맞다면 첫 번째 꿈은 미아동 살인사건 때, 두 번째 꿈은 친부의 살인사건 때 초감각을 통해 시목에게 흘러들어온 시현의 기억이나 감정이 아닐까. 정신건강의학과의원에서 의사와 상담을 하고 나면 머릿속이 명쾌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복잡해졌다. 시목은 의사에게 인사를 한 후 병원을 나섰다.

지검으로 가려던 시목은 갑자기 피곤이 몰려오는 것 같아 머리가 무거워졌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지검이 아닌 지검 근처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마침 애인인 동재에게 전화가 왔다.

“황시목, 어디야? 아직 사건 현장 돌고 있어? 바빠도 수면 클리닉은 꼭 가라.”

“안 그래도 방금 수면 클리닉에 다녀오는 길이예요. 잠깐 집에 들렀다가 지검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잘했네. 이따 지검에서 보자.”

통화를 끝낸 시목은 피곤함을 억누르며 아파트 단지까지 간신히 운전을 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킨 후, 시목은 집안에 들어가자마자 재킷을 벗었다. 어차피 다시 지검에 돌아갈 생각이어서 셔츠를 입은 그대로 쓰러지듯 침대 위에 누웠다. 미아동 현장에서 잠깐 느꼈던 이명 때문인지, 계속 약한 두통이 있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1시간 후로 알람을 맞춰 놓은 시목은 정신없이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띵동.

초인종 소리가 울려 침대에 누워있던 시목은 일어나서 현관 인터폰을 확인했다. 그러나 인터폰 화면이 새까매서 밖에 누가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순간 시목의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그 꿈이다. 꿈속에서도 꿈이라는 걸 느낄 수밖에 없는 악몽. 시목은 누구냐고 묻지 않고 가만히 인터폰을 노려봤다. 그 순간 띡띡띡 거리는 현관 도어록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목은 문 밖 너머의 상대가 비밀번호를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숨을 죽였다. 빨리 이 꿈에서 깨어나야 돼, 빨리. 마음이 다급해졌다. 휴대폰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시목이 방으로 들어간 순간, 늘 똑같은 패턴대로 장면이 전환 됐다. 크흑. 이번에는 목을 조르는 게 자신이 아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대방이 시목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상대방의 팔을 움켜쥐고 떼어내려고 했지만, 점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의식이 희미해지는 것 같아 마구 발버둥을 쳤다.

“헉! 허억... 쿨럭쿨럭.”

가까스로 악몽에서 깨어난 시목은 실제 목이 졸리기라도 한 것처럼 산소가 부족해 기침을 하며 허겁지겁 숨을 몰아쉬었다. 당황했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주변을 둘러보니 집안이 어둑어둑해져있었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지났지. 시목은 시간을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찾아 화면을 확인했다. 마침 여진에게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에서 다소 흥분한 여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검사님! 아휴, 전화를 왜 이렇게 안 받아요! 황시현하고 제임스 황하고 동일인물 맞아요! 미국경찰 쪽에 확인해본 결과, 미군에 입대하면서 시민권을 취득하고 한국 국적을 포기한 거래요. 그리고 한국에 들어와 그동안 학원 강사일 하면서 홍대에서 약물 판매를 하고 있었고. 지금 용의자 수배령 내렸으니까 알아두시라고요. 혹시 몰라서 검사님 어머니 댁 주변에 경찰인력 더 배치했어요.”

“... 아, 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전화를 끊고 휴대폰 화면을 보니 벌써 7시 15분이었다. 아까 4시쯤 집에 왔었는데, 3시간이나 잠들었던 것이다. 밀린 일거리가 많아 오늘은 지검에서 밤을 새야겠다고 생각하며 시목은 불을 켜고, 서둘러 재킷과 가방을 챙겼다. 그때였다.

띵동.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시목은 또다시 묘한 기시감에 들었다. 서 검사님인가? 검사님이라면 벨을 누르지 않고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올 텐데. 현관 인터폰을 확인해보자, 베이지색 면바지에 흰 티 차림의 남자가 캡 모자를 눌러쓴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누구세요?”

인터폰으로 묻자 아파트 주민회에서 쓰레기봉투를 나눠주고 사인을 받으러 왔다고 남자가 대답했다. 인터폰 화면 속의 남자 손에는 쓰레기봉투와 서류, 볼펜이 들려있었다. 전에도 몇 번 아파트 주민회에서 잉여 관리비로 쓰레기봉투를 구입해 나눠 받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시목은 별 의심 없이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남자가 쓰레기봉투를 건네주며, 동호수와 확인란이 있는 서류를 내밀었다. 이곳에 사인해 주면 됩니다. 시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받아들어 빠르게 서류를 읽어봤다. 사인을 하기 위해 볼펜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자,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볼펜을 건네주었다. 아니, 건네주는 척 뻗었다가 갑자기 볼펜으로 시목의 손바닥을 깊게 찔렀다.

“윽!”

볼펜에 찔리는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손바닥으로 파고들었다. 남자가 쥐고 있던 건 볼펜이 아니었다. 원래 볼펜심이 있어야 할 부분에 짧은 주사바늘이 튀어나와 있었다. 주사바늘에는 독극물이라도 묻어 있었는지 바늘에 찔린 시목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빙글 돌았다. 다리가 휘청거려 사내의 몸을 잡는 찰나, 남자가 시목의 팔을 붙잡고 집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마비 성분이 있는 약물이었는지 소리를 지르려는 시목의 혀가 굳어서 꼬였다. 남자가 시목을 밀고 들어오면서 눌러썼던 캡 모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드러난 남자의 얼굴은 자신과 닮은 얼굴이었다.

제임스 황, 황시현이었다.

친부를 살해한 다음에는 친모를 노릴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판단미스였다. 아니, 사실은 오만했던 걸지도 모른다. 황시현이 자신에게도 올 것이라고 시목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검사고, 집에 동거인도 있으니 그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시목은 시현의 팔을 밀어내려고 했으나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서서히 퍼지기 시작한 약기운 때문에 시목은 간신히 신발장에 기대 서있을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시현은 여유롭게 주머니에서 흰 로프를 꺼내, 시목의 목에 천천히 로프를 감기 시작했다.

“드디어 만났네, 황시목? 내가 아빠에게 학대 받으면서 사는 동안, 넌 엄마랑 잘 살았나보더라. TV에 스타검사라고 나오던데?”

시목과 목소리가 비슷한 그가 시목의 목에 감긴 줄을 양쪽으로 천천히 잡아당기며 말했다. 두려움 보다 먼저 느껴지는 기시감. 시목은 여전히 악몽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시현의 팔을 밀어내려고 다시 그의 팔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나 아까 찔린 주사바늘에 환각제도 섞여있던 건지 볼록렌즈를 통해 보는 것처럼 시야 안의 모든 것이 늘어지고 구부러지기 시작했다. 용의자가 범행 시 사용했던 LSD 환각제, 그리고 얇은 로프. 황시현이 클럽 알바생과 친부의 살인범이 확실했다. 지금 시목에게 하듯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수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프가 더욱 세게 목을 조여와 시목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점점 시목의 의식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시목아, 그거 알아? 쌍둥이는 지문이 달라도 DNA가 같아서 네 손가락 지문만 없애면 니가 황시목인지, 내가 황시목인지 아무도 모를 거야. 네가 사라지면, 내가 엄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어. 그치?”

형 황시현은 처음부터 아버지를 살해한 후, 어머니가 아닌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학대했던 증오스러운 아버지를 살해하고, 자신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았다고 생각한 시목을 죽이려고 계획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한국에 들어와서 범행을 저지르려고 계획했을 것이다.

“너랑 나는 쌍둥이가 아니라 한쪽이 죽어야 다른 한쪽이 사는 도플갱어였던 거야.”

시목은 시현의 말을 들으면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시현은 시목이 쓰러지자 코밑에 손가락을 대고, 호흡을 확인했다. 그런 후 부엌으로 가 자기 집처럼 부엌을 뒤지기 시작했다.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커피포트에 부은 그는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손가락 지문을 없애기 위해 쓰러져있는 시목의 손과 얼굴에 뜨거운 물을 부을 생각이었다. 화상을 입은 피부는 뭉그러지니까 얼굴도 지문도 못 알아보게 만들 계획이었다.

곧 물 끓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띡띡띡 거리는 현관 도어록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현은 잠시 당황했지만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쓰러진 시목의 끌고 와 식탁 아래에 눕혀 놨다. 사전조사 한 바에 의하면 시목에게는 동거하는 애인이 있다고 했었다. 분명 지금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는 건 시목의 애인일 것이다. 시현은 주저 없이 자신의 옷과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기 시작했다.

지검에서 만나자고 했었던 시목에게 연락이 없자, 동재는 시목이네 사무실에 들렀다. 그러나 계장의 말에 의하면 오전에 나간 후,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아직 지검에 오는 중인가 싶어, 동재는 자기 사무실로 돌아왔다. 밀려드는 서류에 치였었다가 잠깐 숨 돌릴 짬이 나, 동재는 시목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세 번이나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집에 잠깐 들른다고 하지 않았었나? 혹시 이명 때문에 집에서 쓰러지기라도 한 건가 싶어 동재는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시목이네 사무실에 들러, 그의 부재를 확인한 후 서둘러 퇴근을 했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계속 시목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급한 손길로 현관 비밀번호를 열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거실에 전등이 켜져 있는 걸 보니, 안에 시목이 있는 것 같았다.

“시목아, 아직 집에 있니?”

동재는 반가운 마음에 애인을 부르며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왔다. 식탁 옆에 시목의 뒷모습이 보여 한달음에 달려가 그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시목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동재는 그를 안았던 팔을 놓고, 주춤 뒤로 물러섰다. 황시목과 닮은 얼굴이었지만 그는 황시목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분위기의 모르는 남자. 당신, 누구야...? 당황한 동재가 더듬더듬 묻자, 시현은 여전히 웃으며 곤란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기야, 갑자기 날 공격하는 사람이랑 몸싸움을 하다 실수로 죽인 것 같아. 정당방위겠지? 나랑 공범이 돼줄 거지?”

- end -



로맨스를 쓰고 싶었는데, 쓰고 보니 로맨스는 1도 없는 글이 되었네요. 드라마를 보면, 황시목이 사건 재연하는 모습을 뒤에서 관찰하는 장면들이 꽤 나옵니다. 그걸 보면서 만약 황시목이 쌍둥이였다면 어땠을까? 라고 생각해서 이 글을 쓰게 됐네요. 재미있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댓글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