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8월 13일
- 17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0년 8월 14일
동재시목
< 4주 뒤 뵙겠습니다. >
(우리 이혼하는 중입니다)
윌리 (트위터 @hibikeiwatobi)
일기예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자동차 보닛 위로, 아스팔트 땅 위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계단 위로 쏟아지는 폭우는 뿌연 물안개를 만들고 있었다. 덕분에 가시거리도 짧았다. 비 때문에 하얗게 흐려지는 눈앞의 광경을 보던 동재는 자신의 옆에 나타나 우산을 펼치는 사람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제 속이 시원하냐?" 검은색 우산을 들고 계단 하나를 내려가 자신을 뚫어지라 보는 사람은 아직은 자신의 배우자인 황시목이었다. "아직 끝난 게 끝난 것이 아니니까요." 시목은 그 말을 끝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동재는 자신의 우산을 펼쳤다. 부부라고 모두 한 우산 아래에서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각자 자신의 우산을 펼쳐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이 퍽 상징적이었다. 계단도 참 많다. 아까 이 계단을 같이 오를 때만 해도 비가 아직 내리지 않았을 때라 동재가 조금 빠른 걸음으로 올라가는 시목을 뒤쫓았다. 다시 한번 생각해봐. 너 여기 들어가면 그다음에 돌이킬 수 없다. 동재가 뭐라고 하든 시목의 결심은 흔들릴 것 같지 않았다. 하긴 가정법원까지 온 이상 이미 결단을 내렸다는 거겠지. 시목은 한 번 돌아보는 것 같더니 자신의 공판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하니까 빨리 오라는 말만 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 나라고 너랑 살면서 좋았던 줄 아냐. 그런 가시 돋친 말이 입에서 맴돌았지만 뱉지는 못했다. 유책을 따지면 자신일 테니까. 바람을 피워야만 꼭 유책 배우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같이 살 수 없는 이유를 만든 쪽이 되는 것이 유책 배우자다. 동재는 자신이 계단을 미처 다 내려가지 못했는데 시목은 이미 주차된 차까지 도착해 우산을 접고 차를 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멀찍이 지켜보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아니 이혼을 통보받기 전이라면 동재가 서둘러 달려가 그 잠시라도 시목이 비를 맞을까 봐 우산을 씌워줬을 텐데 지금 그런 짓을 해봤자, 이득이 되는 건 아무것도 없이 서로 불편해지기만 하겠지.
서동재와 황시목은 결혼 3년 8개월 만에 이혼에 합의하고 가정법원으로 함께 왔다. 아직 완벽한 이혼은 아니었다. 4주간 이혼 조정 기간을 가진 이후에야 두 사람은 완벽한 남남이 되었다. 하필 서류로 혼인신고를 했기 때문에 기록에는 남을 거다. 서동재의 인생에, 그리고 황시목의 인생에 서로가 있었다는 것을. 그러나 영원히 함께하기로 했다는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는 것까지. 동재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나온 법원을 다시 한번 보다 자신의 차로 느리게 걸어갔다. 4주간의 이혼 조정 기간을 드릴 테니 그사이에 마음이 달라지면 알려달라는 말까지 전부 건조했다. 대한민국에 이혼하는 사람이 동재와 시목 뿐은 아니었을 테니까. 4주간의 이혼 조정 기간을 선고하는 사람도 접수해주는 사람도 모두 하루의 일과 중 일부였을 뿐 대단한 일도 아닐 거다. 별 것 아니다. 동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면서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기분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요란하게 쏟아지는 비 때문에 앞 유리는 강물이 있는 것처럼 빗물이 물결치고 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서동재, 할 수 있어.
대체 뭘 할 수 있다는 건지. 속으로 한 생각이지만 또 한심하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목은 이혼도 참 미지근했다. 차라리 꼴 보기 싫으니까 꺼지라고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소리라도 질렀으면 이런 기분은 아니었을 것 같았다. 현실적으로 당장 집을 구해 나가는 건 어려우니까 숙려 기간 동안 집을 알아보고 지금 사는 신혼집은 원래 동재 집이었던 만큼 잠깐만 신세를 지겠다고 했다. 신세를 진다니. 부부 사이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철저한 남으로 이미 선을 긋고 있었다. 차라리 내가 나갈게. 네가 여기에 살아. 그런 말을 한다고 해도 시목이 들을 리가. 동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시목은 그 침묵을 무언의 긍정으로 이해했다.
서동재와 황시목의 결혼은 모두에게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대체 왜? 황시목이 왜 서동재랑? 가장 많은 질문은 그것이었다. 비밀연애도 적당히 할 만큼 했고 우리도 나이가 있으니까 결혼은 당연한 순서가 아닐까, 서동재는 지극히 평범한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면 시목은 별로 그때도 결혼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았다. 내가 너를 너무 좋아해서 결혼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서동재가 프러포즈했을 때 감정을 별로 드러내지 않던 시목조차 놀란 얼굴이었으니까. 이벤트 회사를 알아보고 화려한 장미 꽃잎을 뿌려 촛불로 길을 만드는 그런 촌스러운 방법은 시목이 싫어할 것 같아서 동재 나름대로 청혼도 고민을 많이 했었다. 그런 면에서 둔한 시목 덕분에 들키지 않고 진행할 수 있었다. 워낙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동재였으니까 딱히 수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단지 '제발 나중에 문제가 될 일은 만들지 마시죠' 그렇게만 말했으니까. 결국, 결혼하고 이혼을 했으니 문제 될 일을 만든 건가. 동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검사라고 항상 한곳에 머무를 수는 없는 거니까 혹시 다른 지방으로 발령받으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어떻게든 본청에 들어가 검사로서 더 큰 힘을 갖기를 바랐던 마음이야 한결같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차라리 지방 발령을 받았으면 싶었다. 황시목이 지방으로 가버리면 영원히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려 나타나지 않을 것 같다는 그런 막연한 불안이 동재의 사고를 정지시켰다. 아직 회사에는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황시목과 서동재가 결국 이혼했다는 이야기는 결혼하게 됐다는 말보다 사람들에게 덜 충격적일 것 같았다.
그래, 걔들 그럴 줄 알았어. 거의 4년 갔지?
그 정도면 오래 간 거지.
아마, 그런 말을 듣게 되겠지. 그런 상상이 더 쉬운 관계였으니 이런 결말이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걸지도 모르겠다. 차에 시동을 걸었다. 오늘로 이혼 조정 기간 첫날이 시작됐다. 아마 시목이 퇴근하고 동재도 집에 돌아가면 한 공간에 같이 있게 되겠지만 더는 어제와 같은 관계가 아니었다. 이혼을 앞둔 부부. 하루하루가 헤어지는 중인 사람들.
4주간의 이혼 조정 기간은 대체 왜 주는 거야. 동재는 짧게 욕을 지껄였다. 그런다고 돌아올 사람의 마음이라면 그 법원까지 가지 않을 텐데. 아닌가, 내 상대가 황시목이라서 그런가. 차를 몰고 지검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동재는 오늘따라 신호가 걸리는 도로도 화가 났다. 와이퍼가 규칙적인 동작으로 빗물을 닦아내고 있었지만, 그때뿐이었다. 비가 내리는 것을 와이퍼가 멈출 수는 없는 거였으니까 앞 유리는 여전히 앞을 보기가 힘들었다. 꼭 지금 내 꼴 같아서 동재는 앞에 차도 없는데 괜히 클랙슨을 신경질적으로 눌렀다. 경고음으로 쓰이는 그 경적이 거리를 울렸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대신이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동재가 아침을 준비하고 씻고 온 시목에게 어서 먹고 출근을 하자고 했다. 아침으로 너무 무겁게 먹으면 일할 때 둔해진다는 시목의 투정 탓에 동재는 브런치처럼 준비하곤 했다. 5개 남은 소시지를 맛있게 익혀 세 개는 시목의 접시에 두 개는 자신의 접시에 덜고서 내밀었을 때만 해도 동재는 시목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시지가 싱거우면 케첩을 찍어 먹으라고 했을 때 시목이 계란 프라이를 포크로 쿡 찍으며 입을 열었다. "서 검사님" 시목은 결혼해서도 동재를 다정한 애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서 검사님 혹은 서동재 씨. 무슨 남편 이름을 그렇게 사무적으로 부르냐며 동재 형이라든가 여보 같은 건 어떠냐고 조른 적도 있었지만, 그거야 신혼 때의 이야기다. 동재는 샐러드의 방울토마토를 먹으면서 눈을 마주쳤다. "응, 왜?" "우리 이혼하죠." 동재는 방울토마토를 씹다 말고 자신이 들은 말을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뭘 해? 되묻기도 전에 시목이 평소처럼, 마치 오늘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덤덤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이혼 서류는 오늘 중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조금 과정이 귀찮긴 하지만 그래도 합의로 하면 금방 끝나니까요. 오늘 제가 바쁘지 않으면 이혼 서류 작성할 테니 서명만 해서 저에게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야, 너 지금 밥 잘 먹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혼? 지금 장난하냐?" "장난 아닌데요." 시목은 아무렇지 않게 소시지 옆에 케첩을 짜서 뿌렸다. "저는 말씀드렸으니 더 할 말 없습니다." "이혼을 무슨 너 혼자 해? 아니 그리고 멀쩡히 잘 살다가 갑자기 무슨, 무슨 이혼이야?" 동재의 목소리가 커졌다. 시목은 포크로 샐러드를 뒤적이다 동재를 가만히 쳐다봤다. 사람을 가만히 보기만 하는 저 동그란 눈동자. 맑고 투명해서 더 피할 수도 없는, 치부가 없다고 말하고 있어도 모든 것을 들춰낼 것 같은 저 시선이 가끔 동재를 버겁게 만들 때가 있었다. "멀쩡히, 잘 살았어요?" "우리가 이혼할 만한 문제가 있었냐? 갑자기 무슨 이혼이야. 이혼은. 안 해. 못 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야 너는 무슨 부부 사이가 이제 그만하자면 그만하게 되는 애들 장난 같은 건 줄 알아?" 동재의 말에 시목이 짧게 대꾸했다. "예. 애들 장난은 아니죠. 하지만 같이 못 살겠으면 하는 것도 이혼 아닙니까?" 이혼이 뭐 대단한 건가요. 시목은 먼저 출근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상 출근도 같이하던 두 사람이었는데 시목은 이미 선을 긋기 시작한 것 같았다.
야. 황시목! 아직 사람이 말이 안 끝났는데 어디 가는 거야?!
지금 출근 안 하면 늦습니다. 서 검사님도 서두르시죠.
아직 식기의 음식은 온기가 남아 있었다. 시목은 혼자 결론을 내린 건지 몰라도 동재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다. 덩그러니 그렇게 혼자 앉아 누가 머리 위로 찬물을 쏟아부은 것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혼? 대체 왜? 또 뭐가 수틀려서 저러는 거야? 동재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또 뭔가가 화가 나서 그런 거겠지. 이따 퇴근하면서 시목이 좋아하는 새우튀김이라도 사서 가야겠다. 그런 계획을 세우며 마음 한쪽 불편한 불안을 무시하려 애를 썼다.
아닐 거다. 아니, 아니어야 했다.
그날 동재는 퇴근하면서 시목이 좋아하는 중화요리 전문점의 칠리 새우부터 꽃까지 모든 것을 준비했다. 집에 일찍 와. 좋아하는 거 사놨으니까. 동재의 그 메시지에도 시목은 짧게 '네'라고 보냈고 동재는 그것을 긍정적인 신호라고 믿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 같았다. 칠리 새우를 시목의 앞접시에 덜어주면서 동재는 아침에 갑자기 그런 이야기는 무섭게 왜 한 거냐며 겁주려 농담을 한 것이라면 재미없다고 무엇이 널 그렇게 화가 나게 만든 거냐고 물었다. 시목은 화가 난 것이 없다고 했다. 새우를 먹다 소스가 묻은 입술을 보던 동재가 닦아주려 손을 뻗었지만, 시목이 고개를 돌렸다. "화 안 났는데요." "그럼 왜 이혼하자는 말을 해." "같이 못 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왜. 황 프로 이유 없이 이럴 사람 아니잖아." 동재는 순간적으로 시목이 진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체 이유가 뭐야, 나 말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어? 동재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이혼에 대한 이유란, 참 저렴하다. 시목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입니까?" "아니니까 이러지, 나도." 시목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혼하고 싶었던 건 사실 서동재니까요. 그래서입니다." 서동재? 정말 남의 이름처럼 나온 단어가 낯설었다. "내가? 내가 언제?!" "모든 게요. 저는 결혼이란 신뢰를 기반으로 다짐한 약속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제 이해가 됩니까?" 약속. 시목이 그 단어에 힘을 주면서 말을 했다. 약속이라, 그러니 알 것도 같다. 시목은 청혼을 받았던 그 날, 동재에게 하나만 약속해 달라고 했다.
결혼하면 가정이 생기는 거죠. 누가 가장이라고 정하는 건 아니지만 가정이 있는 사람은 다 가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러니까 무릎이 쉬운 사람이 되지 않는다고 약속해주신다면, 저도 받아들이겠습니다.
보통 청혼을 하면 그 자체에 감동해서 눈물을 삼키거나 그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려 하겠지만 시목은 달랐다. 그 다짐을 꼭 받아내야겠다는 그 흔들림 없는 모습은 동재가 가장 사랑하는 모습이면서 동시에 시목이 동재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무릎이 쉬울 수 있겠어. 황시목이 이제 앞으로 내 배우자인데. 그 이름값이 있지. 동재의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시목은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프러포즈 링을 만지작거렸다. 결혼이라는 걸 생각하고 살아온 인생이 아니라서 서투르지만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말까지 전부 황시목다운 대답이었다. 동재는 그런 시목을 가득 끌어안았다. 나도, 너만 있으면 다 내려놓고 어디든 갈 수 있는 기분이 들어. 그 기분을 참을 수 없어서 청혼했어. 동재의 그 말에 시목은 어깨에 이마를 붙이고 한참 동안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얼굴을 보여줄 자신이 없어서 그랬다고 했나. 그 순간만 생각하면 가슴이 참 간질거려 동재는 괜히 실실 웃곤 했었다.
하지만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더 잘되면 결혼 생활도 더 나아질 것이고 시목이도 승진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그 익숙한 유혹은 좀처럼 뿌리치기가 어려웠다.
무릎이 쉬운 사람, 청혼을 할 때만 해도 가슴이 벅차게 다가왔던 그 약속이 다시 나를 무엇으로 보는 건지 그저 열심히 사는 것일 뿐인데, 우습게 보고 있었던 것 같아 조금 야속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 시목도 무엇인가 포기를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동재는 자신이 어떤 라인을 탈지 고민이 된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시목에게 털어두기 시작했을 때도, 물론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검사라는 직업이 고독하게 살 수만은 없는 거라는 말을 했을 때도 시목은 항상 한결같았다. '저는 그런 것 없이도 잘살고 있습니다' 아마 자신과 했던 약속을 상기시키려고 했던 거겠지. 하지만 동재는 내가 잘되면 너도 잘되는 거고 부부가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고 능구렁이 같은 말로 넘어가곤 했다.
나중에 혹시 아냐, 내가 국회의원이라도 될지 미래에 한자리할 수도 있는 거고. 나 때문에 재산 공개되는 황시목이라고 하면 좀 웃긴가. 그런 농담을 했을 때도 시목은 웃지 않았다. 그런 사이가 되고 싶지는 않네요. 동재는 가볍게 던진 말들이었지만 시목은 농담처럼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이혼.
황시목은 언제부터 그것을 결론으로 생각하고 있었을까.
서동재는 왼손에 끼고 있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4주간의 이혼 조정 기간 내에 마음을 돌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건 동재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지옥 같았다. 희망이라는 걸 갖게 되는 사람의 심리란 참 얄팍했다.
부부가 함께 쓰던 침실이 가장 문제였다. 시목은 어차피 이 집은 동재의 명의로 되어있는 것이니까 자신이 소파에서 자는 것이 맞다고 했지만, 동재는 시목이 자기 전 소파를 먼저 차지하면서 시목을 침실로 보냈다.
그런 거로 시목의 마음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두 사람이 함께 누워있던 것이 자연스러운 그 넓은 침대에서 혼자 누워서 시목은 무엇을 할까 싶어 새벽 한밤중 몰래 침실을 본 동재는 아무 걱정 없이 잠을 자는 시목을 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시목은 오히려 하루하루 이혼 조정 기간이 끝나가는, 우리가 헤어지는 중인 날들이 끝나갈수록 속이 시원해 보였다. 울지도 않겠지. 슬퍼하지도 않을 거고. 너를 실망하게 한 것은 나였고 배우자로서 실격이었으니까. 하필 이혼 조정 기간에 장마가 겹쳐서 집이 참 습했고 아침에도 어두워서 기분이 나아지지도 않았다. 날 좋은 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바다라도 보러 가지 않겠냐고 배우자로서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이라고 그런 잔꾀를 생각하고 싶어도 도와주지 않는 날씨마저 황시목 편인 것 같았다. 어차피 시청률이 나올 시간대도 아니라서 90년대 유행했던 오래된 영화만 송출해주는 방송 채널만 작은 소리로 틀어두고 서동재는 소파에 구겨진 자세로 누워있었다.
이 소파를 살 때도 시목은 실내장식에 관심 없는 척하더니 같이 눕기엔 좀 커도 될 것 같다고 했었는데. 같이 누워? 동재가 놓치지 않고 물은 말에 침실에서만 잘 건 아니지 않냐고 했던 그때 진짜 귀여웠다. 그런 생각은 안 할 줄 알았는데 은근히 엉큼한 면이 있어. 동재가 시목의 허리와 엉덩이 사이를 문지르면 미간을 좁히던 그 표정까지. 동재는 쿠션에 얼굴을 박았다.
진짜 뭐 하는 지랄이냐. 이게.
나는 아직 황시목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
그것을 핑계로 우선순위에 두지 못했던 것들은 전부 자신이 놓쳤던 것뿐이라 할 말이 없었다.
이혼 조정 기간이 빨리 끝나든가 해야지.
영화 속의 인물이 울어서 그래서 눈물이 나는 건가? 코끝이 아프게 찡했다.
황시목을 차라리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시목은 남자 혼자 살기 좋은 집을 알아봤지만, 집세도 그렇고 위치나 구조가 마음에 드는 매물이 쉽게 나오지 않아 난감했다. 4주는 점점 끝이 나는데 집을 아직 못 구할 줄이야. 동재에게 어쩌면 신세를 조금 더 져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해야 하나. 사실 그게 어렵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지금 어떤 과정을 겪고 있든 서류상으로는 서동재의 배우자는 황시목이었고 그건 시목에게도 마찬가지니까. 자신이 갑자기 수술이라도 하게 되면 동재의 서명이 필요한 관계.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수갑 하나를 같이 차고 있는 거 같았다. 집이 언제 구해질지 모르니까 미리 짐이라도 챙겨야 할 것 같아 시목은 반차를 내고 자신의 옷가지나 물건들을 상자에 담고 있었다. 며칠 남지도 않았으니까 하루아침에 정리될 것도 아니고. 동재는 자신이 반차를 쓴 걸 모를 테니 집에는 시목이 덩그러니 혼자였다. 이혼한다고 해서 연락을 안 하고 지낼 것도 아니고 필요할 때는 하게 되겠지. 커다란 캐리어를 가져와 옷을 꺼내 넣는데 자꾸만 손이 멈췄다. 동재의 화려한 취향이 조금 촌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어 자신이 골라준 채도가 낮은 넥타이라든가 동재가 제일 좋아한다고 늘 말하는 기념일에 황시목이 선물해줬던 넥타이핀 같은 것은 사정을 모르고 얌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차곡차곡 옷을 정리해서 넣었다. 같이 보낸 계절이 많아서 계절별로 쌓인 옷도 참 많았다. 동재가 커플룩으로 입자고 사 온 터틀넥 스웨터도 있었다. 이런 건 가져가도 의미가 없으니까 이곳에 두고 가면 동재가 알아서 버리든 하겠지. 버린다. 버리게 되는 것은 단지 옷뿐만이 아니겠지.
별 것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물건이 많았다. 모든 물건은 한 공간에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의미가 된다. 결혼사진을 담은 액자라든가 동재가 찍은 시목의 사진들이 깔끔하게 정리된 작은 사진첩이라든가. 신혼여행으로 하와이에서 사 왔던 냉장고 위에 붙어있는 능소화를 닮은 열대 지방 꽃 자석까지. 짧다기보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자신은 누군가의 배우자로서 살았고 이제 마침표를 찍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혼자 함께했던 공간에 남아있다 보니까 더 크게 다가왔다. 결혼 생활을 더 이어가지 못할 것 같아서 하는 것이 이혼이니까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라고 자기 암시를 해왔구나. 시목은 불현듯 그 사실을 깨달았다. 짐을 정리하다 잠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보리차를 좋아하는 시목 때문에 동재는 항상 생수 대신 보리차를 끓여 물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뒀다. 지금 우리가 이혼 조정 기간인데, 어떻게 보면 부부로서 사형선고를 받은 건데도 그는 여전히 보리차를 물통에 담아두고 있었다. 시목은 그 보리차를 마시지 않았었다. 서동재는 아마 그 물을 마시는 시목이 마음이 풀릴지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품을만한 사람이었으니까. 지금은 서동재가 없으니까, 그리고 차가운 물도 없으니까 더우니 한 잔 정도는 괜찮겠지. 시목은 컵에 보리차를 따랐다. 고소한 보리차 냄새.
감정을 다른 사람들보다 잘 느끼지 못하는 대신 시목은 더 기억하고 사는 것들이 많았다. 시각, 나를 보며 웃던 서동재와 청각, 동재가 자신을 황 프로라고 부르던 호칭에서 여보라고 장난스레 부르던 것. 후각, 이 고소한 보리차 냄새. 같이 음식점에 갔다가 자신이 지나가는 말로 생수보다 이런 곡물 차가 좋다는 말을 한마디 한 것을 잊지 않고 우리가 결혼해서 살면 내가 물은 항상 보리차로 끓여주겠다고 했던 그 말. 촉각, 서동재가 처음 자신의 입술을 찾으면서 부드럽게 잡았던 손길. 부부니까 자연스레 수없이 나눴던 밤, 피부가 닿으며 느꼈던 애정. 그리고
통각.
시목은 찾아오는 두통에 잠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아프다는 감각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잠깐 어지러웠다. 보리차가 담긴 컵을 들고 있는 채로 시목은 중력이 자신을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다. 쓰러지고 싶지 않지만, 몸이 말이 듣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이제는 낯설지도 않다. 그런데 그걸 결혼 생활에서 느꼈어. 컵이 깨졌다.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면서 누구였더라, 선물해준 커플 컵이었다. 보리차가 바닥에 쏟아져 고였다. 시목은 눈을 감았다. 거기까지가 기억이었다.
한 시간쯤 지나 정신을 차리면 물을 닦고 깨진 컵을 정리하고 마저 물건을 정리할 생각이었는데 눈을 떠서 보이는 건 하얀 천장이었다. 들리는 소음에 인상을 찌푸려 겨우 몸을 들자마자 커튼이 걷히고 간호사와 동시에 익숙한 사람이 들어왔다. 서동재다. 어쨌든, 현재 황시목의 보호자이자 남편. "정신 드세요?" 시목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쓰러지고 정신을 차렸지만 제 뜻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에 잠시 등을 기댔다. 이어 들어온 의사가 짤막하게 상태에 관해서 설명했다. 이런 일로 응급실에 오는 건 한 두 번이 아니고, 동재도 결혼 생활 아니 연애 시절까지 합치면 몇 번 있었던 거니까 놀랄 일도 아니었다. "과로나 스트레스받지 마시고요. 나트륨이 높은 음식이라든가 당도 높은 것도 피하세요." 몇 가지 주의사항은 늘 똑같이 들어온 것들이라 관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재는 의사에게 허리를 몇 번 숙여가며 고맙다고 하더니 시목을 내려다봤다. 저런 의사한테도 허리가 참 쉽다. "괜찮냐." "…. 처음도 아닌데요." 동재는 무슨 말을 하려다 시목을 부축했다. 시목이 동재를 밀어내려다 그냥 손을 잡고 일어났다. 오늘 이러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다. 다음에 쓰러지면 누구한테 연락이 가려나. 서동재는 그럴 권리가 사라질 테니. 어머니려나. 실없는 생각만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장마 기간이라 그런지 집에 혼자 있을 때만 해도 해가 들었었는데 동재의 차를 타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도 어색해 시목이 먼저 튼 라디오에서는 어느 지방에 안개가 심해 교통사고 위험이 크니 조심하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니라 시목이 동재를 흘끔 쳐다봤다. "어디 가십니까." "…. 그냥 좀 드라이브하자." 우리가 그럴 사이입니까. 드라이브나 즐길 사이는 아닌데요. 집에 마저 짐 정리도 해야 하고. 시목은 딱딱하게 그런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니라고 해도 자신은 서동재에게 참 쉽게 휘말렸다. "앞으로 이제 네 보호자는 누가 오는 거냐." 나랑 같은 생각을 한 건가. 시목은 습관적으로 아랫입술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글쎄요. 아마 어머니지 않을까요. 동재는 비웃음인지 아님 한탄인지 모를 짧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 나이에 병원에 엄마 오는 것도 웃기네. 그러다 시목은 만약 동재에게 그런 일이 생기면 누가 찾아오려나 그런 생각을 했다. 동재의 어머니는 지방에 살고 있어서 바로 오지도 못할 거고. "시목아." 와이퍼가 앞 유리를 닦아내는데 여전히 앞에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비는 단순 장맛비 같지가 않았다. 동남아에서 스콜이라고 부르는 그런 것 같다. 지구 온난화 때문일까. "황시목." 동재가 다시 이름을 부르자 시목은 도망치던 생각으로부터 다시 돌아왔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별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지, 아니면 무엇이 두려운 건지 모르겠다. "예, 듣고 있습니다." "…. 짐 정리하려고 한 거냐. 집에 캐리어…. 있더라. 집 구했어?" "아뇨. 아직. 어쩌면 이혼하고 나서도 며칠은…. 신세 져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안하게 됐다고 말하는 시목에 동재는 입을 다물었다. 신호가 걸려 멈춘 차 안에는 에어컨 소리와 와이퍼가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쓰러진 거, 너 지금 이 상황 힘들어서 그런 거잖아." "…. 아닌데요." "아니야?" "그런 거로 변명이나 핑계 만들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미 가정법원도 갔고 조정 기간도 끝나가는데요." 항상 서 검사님은 서 검사님이 좋을 대로만 생각하니까요. 동재의 차가 향한 곳은 한강 공원 근처 어디였다. 비가 만들어낸 안개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어차피 비가 이렇게 오는데 내릴 것도 아니고 단지 이야기할 공간, 그리고 황시목이 도망치지 못할 곳을 찾은 것 같았다.
그래, 적어도 우리가 함께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시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이 정도는 참을 수 있다. 시목은 그런 생각을 하며 아직 남은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혼하자는 거. 네가 못 견뎌서 그래?" "……. 이제 더 설명할 이유도 없을 것 같은데요. 가정법원에서도 다 이야기했고. 충분히 합의된 거라 생각합니다." "너 정말 괜찮은 거냐고." "서동재 씨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지 마시죠." "그래, 쓰러진 거야 너도 이 상황이 스트레스는 될 테니까 그런 거라 하자. 그래서 속 시원하냐? 이혼하니까. 좋아?" 이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이후로 두 사람은 큰 소리를 내며 싸운 적도 없었다. 아니 대부분 큰 소리를 낸다고 해도 서동재였지. 그마저도 연애나 결혼 기간에는 그런 적도 없구나. 황시목은 서동재의 애정이 참 작은 곳마다 스며들어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도 그렇게 좋은 배우자는 아니었지.
시목은 짧게 대답했다.
"서동재 씨를 위해서 이혼하는 겁니다." "내가 언제 이혼해달라고 했어?" "우리는 결혼이 아니라 같은 수갑을 차고 있는 관계같이 느껴져서요." "무슨 소리야." 시목은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시목이나 동재나 결혼반지를 빼지 않았다. 반지를 빼면 분명 이유를 물어올 사람이 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무릎이 쉬운 사람이 되지 말라고 했었는데 기억하시죠." "……. 시목아 나는…." "저라면 달라지게 해주지 않을까, 조금 거만했던 것 같습니다." "뭘 달라지게 해?" "서동재라는 사람을요. 누구나 출세는 하고 싶다는 거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만은 아니잖아요." 시목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그런데도 자꾸 그냥 보게 됐습니다. 예전이라면 차라리 그런 모습이 싫다고 말이라도 했을 텐데. 기대하면서 달라지겠지, 이제 배우자가 황시목이니까 예전 같지는 않을 거라고 했던 그 말을 기억하겠지. 공범이 되는 기분이었어요." "공범? 내가 결혼 생활 하면서 내가 무슨 죄라도 저질렀어?" "꼭 죄를 지어서 법적으로 문제가 생겨야 죄가 됩니까?" 시목은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앞으로 내가 결혼 생활을 이대로 유지하면 서동재라는 사람은 나를 발판으로 더 무릎이 쉬워질 거라는 생각을 하니까 참을 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언젠가 당신이 후회하게 됐을 때 나는 한마디도 해줄 수 없는 그 인생의 공범이 되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끊어버리는 게 나으니까." 시목이 동재를 '당신'이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그 단어가 마지막을 이야기하는 시점에 나왔다는 것도 우리 결혼 생활이 어떤 모양인지 참 알 것 같은데. 동재의 눈가가 금방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해서라도, 서 검사님이, 서동재 씨가 스스로 그런 것들을 끊어내게 되면 전 이혼도 상관없었을 뿐입니다." 공기 중에 수증기가 얼마나 있는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기온이 이슬점 아래로 내려가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그것들이 물방울이 되어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 안개였다. 시목은 그동안 자신의 안에서 얼마나 많은 물방울을 머금고 있었던 것일까. 동재의 앞에 뿌연 안개가 되어 나타나기까지.
이혼도 결국 나를 위한 거라고 하면 너무 잔인하지 않냐
너를 원망도 하지 못하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고맙다고 해야 할까. 거기까지 날 생각해줬다는 거에. 이 이혼을 이해시켜줬다는 것에. 동재가 잠시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눈 위를 가렸다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다시 시작하자는 말을 할 수 있는 건 상대에게 내가 유책이 확실할 때나 가능한 것인데, 상대는 유책이라고 하기보다 너를 위한 선택이라고 말을 하고 있으면 꺼낼 수도 없었다.
"나는 그냥, 너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어." 동재가 탄식에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를 만나 더 잘나가게 됐다고 그냥, 그런 거." 왜 황시목이 하필 서동재랑 결혼해서 발목이 잡힌 거냐는 말 더 듣게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에이스 황시목이 서동재에 발목 잡혀서 결혼하는 게 의심된다고 했던 그런 농담들이 나는 우습게 넘길 수가 없었어. 그런 말을 하는 동재는 처음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부부면서도 참 모르는 것이 많았구나. 나는 그런 게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말을 한다면 동재가 믿어줄까. 그러기엔 그가 살아온 시간 동안 축적되어온 많은 외로운 시간들과 열등감은 쉽게 풀어질 응어리가 아니었다. 시목은 그런 동재를 이해하지 못했다. 혹시 이것도 얄팍한 우월감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던 걸까. 동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지금 기분이 싫었다. 사실 집 같은 거, 원룸 같은 거 구하려면 이미 구하고도 남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트집을 잡았던 건 정말 사소한 것들이었다.
"정말, 한심하네요. 누가 출세시켜 달라고 했습니까.
무슨 국회의원이 된다면 재산 공개……. 그런 헛소리를, 누가 바라기는 한답니까?" "서동재가 황시목이랑 결혼한다고 들었던 말과 황시목이 서동재랑 결혼한다고 했을 때, 이름의 위치만 달라진 거지만 참 달랐으니까." 진짜 싫다. 시목이 짧게 속삭였다. 진짜 짜증 나고, 싫고. 화가 납니다. 서동재 씨는 대체 뭐가 그렇게 꼬였고, 엉망진창입니까?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시목을 보던 동재가 자신의 안전띠를 풀었다. 시목이 앉은 보조석 쪽으로 몸을 가까이했다. 시목은 여전히 벨트를 한 채 동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목이 동재의 정장 재킷을 잡았다. 이 재킷도, 자신이 골라준 것이다. "왜 짜증 나게, 이혼 조정 기간인데 보리차는 왜 끓이고…." 시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재가 입술을 찾았다. 시목은 울지 않았다. 하지만 동재는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에 다시 한 번의 안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을. 누구나 닿는 이슬점이 남들과 온도가 다를 뿐이라는 것을. 시목은 창문을 닫아 들이칠 일이 없는 빗물이 얼굴에 떨어지는 것 같아 입술에 떨어지자마자 살짝 눈을 떴다. 동재의 뺨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진짜 가지가지 한다. 내가 너 때문에." "누가 할 소리인데요." "시목아, 나 이혼하기 싫어." 진짜 떼를 쓰는 아이처럼 결국 내뱉는 말은 그거다. 시목은 자신을 꽉 안는 동재의 어깨에 가만히 기댔다.
우리는 둘 다 섬 같은 사람이었다.
섬은 섬으로 갈 수 없다. 하지만 섬은 자신만이 고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덜 외로울 수 있었다. 시목은 좀 더 동재를 꽉 안았다.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 앞으로 서동재는 그렇겠지.
그런 감정도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면서.
이혼 조정 기간에 결국 재결합하는 부부는 의외로 많았다. 심지어 그 조정 기간에 아이가 생긴 걸 알아서 취소할 때도 있고. 이유야 다양하다. 이혼하는 사정이 각자 다 다른 것처럼. 동재와 시목의 이혼 서류도 그저 종이 쪼가리가 되기까지 우여곡절이란 우여곡절은 다 겪은 것 같지만 다시 서류상으로 생각하면 아무 일도 없는 사이가 된 것이다. 동재는 그날로 숙려 기간에 재결합하게 됐다고 말을 하러 법원으로 향하려 했지만, 시목은 이미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가자고 했다. 너 그동안 마음이 바뀌면? 유치하게 묻는 말에 그동안 나랑 살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냐고 짤막하게 대꾸했다. 동재는 오자마자 캐리어에 잘 넣어둔 시목의 옷을 다시 차곡히 옷장에 넣었다. 깨진 컵을 치운 건 시목이었다. 신혼 때 받은 컵이 깨졌네요. 시목의 말에 깨졌다는 말도 금지라고 하면서 컵은 우리 재결합의 의미로 새로 사러 주말에 쇼핑하러 가자며 동재는 멋대로 데이트 날짜를 만들었다. 정말 너도 독하다. 어떻게 사진 한 장 안 가져가려 했냐. 캐리어를 겨우 비운 동재에게 뭐하러 이혼했는데 웨딩 사진을 가져가냐는 시목의 대답은 사실 틀린 데가 없었다. 오랜만에 같은 침대에 누운 두 사람은 한참 서로의 얼굴을 봤다.
진짜 내가 미쳤다고 황시목에 발목 잡혀서….
제가 할 소리 아닙니까.
동재가 시목의 뺨을 부드럽게 엄지로 문지르다 입술에 입 맞추다, 이마로 코로 옮겨갔다. 몸 위로 올라오는 무게를 느끼며 시목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양팔에 갇힌 채 동재를 올려다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울다 웃다 지금은 욕구에 가득 찬 얼굴까지 참 투명하게 알기 쉽다. 목 뒤로 팔을 감으며 입을 맞췄다. 서동재가 이 밤을 핑계를 대도 할 말이 없었다. 다시 완벽한 이 사건의 공범으로 휘말리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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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퇴근합니다. 예, 지검 앞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시목이 전화를 끊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오자마자 계장이 퇴근하냐고 물었다. "오늘은 먼저 들어가볼게요." "요즘 얼굴이 피셨어. 그동안 안 좋아 보이셔서 걱정이었거든요." "제가요?" 시목이 자신의 뺨을 문질렀다. 이런 말, 사생활 괜히 건드리는 거 같아서 좀 그렇지만 서 검사님이랑 부부싸움 하셨죠? 계장이 슬쩍 묻는 말에 시목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3년 차인데도 신혼부부처럼 보이셔서 좋긴 했는데 안 싸우는 것도 이상하다 했죠." "…. 그렇습니까." "이혼하네, 마네 한창 그럴 때기도 하거든요. 서로가 기대한 모습이 없어서." 시목은 잠깐 뭔가 생각을 하다 계장님도 그러셨냐고 물을까 고민했지만, 고개만 끄덕였다. "신혼부부요?" "서 검사님 표정이 그렇잖아요. 좀, 사람이 가볍다고는 해도 그게 어디 나쁜 건가요. 우리 황 검사님만 보면 좋아 죽는 게 보였는데 요즘은 무슨 비 맞은 개처럼 쳐다보길래 싸우셨구나들…. 했지." 그 순간 노크가 끝나기 무섭게 시목의 사무실 문이 열렸다. 동재였다. 어이구, 양반은 못되시네. 계장이 흘리는 말에 시목이 살짝, 보일 듯 말듯 웃었다. "왜 이렇게 오는 게 느려. 황 프로." "전화 끊으신 지 5분도 안 됐는데요." 시목이 동재의 곁으로 갔다. 먼저 가봅니다. 동재도 가볍게 인사를 하면서 시목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지검에서는 좀, 이러지 말라니까요. 시목의 말에도 동재는 꿋꿋했다. 야, 우리가 부부인 거 여기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냐. 한숨은 시목의 몫이었다.
"그래서요. 오늘 뭐 할건데요." "우리 첫 데이트 하면서 갔던 레스토랑 갈까 하는데." "…. 집에 보리차 떨어졌는데요. 장 봐야 합니다." "…. 밥 먹고 가면 되잖아." 생활감 넘쳐나는 대화를 하다 동재가 손을 잡은 채 계단을 내려가면서 불쑥 물었다. "너 그때 나더러 당신이라고 했었다니까." "기억 없습니다. 이제 그만하시죠." "나라도 부른다 , 그럼 너, 여보라고. 어? 여보." "무슨…. 마음대로 하세요. 뭐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 것도 아니면서." 투덜거리는 시목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춘 동재는 웃기만 했다.
우리 보름 전만 해도 이혼 숙려 기간의 부부였는데요.
참, 동재는 단순하다. 그래서 의심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던 걸지도. 잠깐 그 생각을 하느라 보조석 문을 열고 서 있는 시목에 동재가 눈을 마주쳤다. "어서 가자." 동재가 차 문을 닫으며 운전석에 탈 때였다.
예, 여보.
동재가 다시 문을 벌컥 열었지만, 시목은 이미 보조석에 탄 후였다. 분명 가는 내내 또 시끄럽겠지. 알고 한 말이니까 상관없다.
늘 냉장고에 있는 차가운 보리차,
한 번도 빼지 않은 결혼반지.
우리가 그런 일을 겪었든 아니든 사람들은 부부싸움으로밖에 생각 안 한다는 뻔뻔함 모두.
그런 것에 쉽게 약해지는 자신의 마음 같은 것이 결국 나중에 후회로 돌아온다 해도, 이제는 서동재가 자신의 공범이 되어야만 하니까.
역시 시끄럽게 구는 동재에 시목은 말없이 눈을 감고 가만히 있다 짧게 한마디 했다.
예, 여보라고 했습니다.
제발. 전방주시나 하시죠.
기사에 검사 부부 교통사고 났다는 거 보기 싫습니다.
안녕하세요, 윌리입니다. 뒤늦게 비숲에 치여 동재시목에 진심이 됐습니다. 마감하기까지 고민이 많았지만 그래도 합작에 참여하게 된 만큼 많은 분들이 재밌게 봐주시면 기쁠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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