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 2020년 8월 13일
  • 18분 분량

논커플링

<2020 MFL>


화양리 (트위터 @kyunncoma)


지역별 분류를 마친 뒤엔 조 추첨이 진행됐다. 총32개 구역에서 차출된 인원들이 저마다 팀을 찾아 나서는 행렬 속, 시목 역시 안내에 따라 유리관으로 된 통로를 거닌다.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과 푸르른 수목이 눈길을 사로잡는 풍경. 하지만 이마저도 실상을 벗겨낸다면 치밀하게 프로그래밍 된 가상에 지나지 않을 거였다. 유리에 반사된 얼굴을 무감히 바라보던 그가 이내 눈길을 거둔다. 자동개폐형 문이 열리고, 이제 본격적인 첫발을 내디뎌야만 할 때였다.

[환영합니다. 서부연합 C팀, 황 시 목 님.]

발 옮기기 무섭게 천장에서 기계음이 가미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일명 'SOO'라 불리는 인공지능 로봇은 이 자리에서 수천, 수만 명의 생존과 죽음을 지켜봤을 터였다. 시목은 삭막하기만 한 내부로 들어서서 이미 기다리고 있던 다섯 명과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누구 하나 인사를 건네거나 가벼운 눈 맞춤조차 하지 않고 앞에 등장한 화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목숨값을 담보로, 그것도 타의로 인해 여기까지 떠밀려 왔을 테니 당연한 일이 아닐까.

MFL

Misty forest league

대형 홀로그램으로 띄운 문구와 함께, 조 추첨을 통해 꾸려진 [서부연합 C팀]의 명단이 차례대로 공개되기 시작했다. 서로 통성명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빠짐없이 나타난 타인의 인적사항을 지켜보는 건 무척 낯설고 기묘한 일이다. 가장 먼저 등장한 안경 차림 중년에서부터 제일 마지막 포니테일 헤어의 젊은 여성까지, 시목은 찬찬히 그들의 특성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 장건

원거리 수색꾼. 사방 500m 밖에서 접근하는 생명체를 수색하며 500m 이내 근거리 파악은 불가능.

· 서동재

협상가. 상대 팀의 정보 파악 및 일시적 동맹 관계 설립에 탁월한 재능.

· 이창준

지도. 올해로 개편된 2020 MFL 이전(2015~2019 Ver.)의 지형지물 대부분을 파악.

· 영은수

추적자. 타겟팅한 단일대상의 행적을 맹렬히 추적할 수 있으며, 추적 능력은 24시간 기준으로 리셋됨.

· 한여진

저격수. 저격용 소총으로 공격 가능. (단, 제어 프로토콜로 인해 8세 이하 어린이, 80세 이상 노인은 공격 불가)

· 황시목

나침반. 최종 스테이지 도달까지 올바른 방향을 제시. '지도'와 협력 플레이 가능.

아마 멀지 않은 곳 늘어선 '팀원'들 역시 같은 내용을 파악하기 바빴을 터, 얼마 지나지 않아 푸념 섞인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진과 대비해 보니 아마 저 사람이 '협상가' 특성을 지닌 서동재라는 인물일 것이다.

"뭐야, 쓸 만한 공격수는 저 여자 하나가 다야? 이래서야 원. 첫 번째 스테이지에서 개죽음당해도 이상하지 않겠어."

그는 부리부리한 두 눈을 뽐내며 어깨에 총을 둘러멘 저격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운 좋게도 연이 닿아 동료와 같은 팀에 속하게 된 건지, 수색꾼인 장건이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서동재와 신경전을 벌일 찰나였다. 음성을 시각화한 패턴과 함께 예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부연합 C팀의 팀장을 선출하겠습니다. 선출 방식은 100% 자동 추첨으로 진행되며, 팀장은 6인 팀의 리더로서 최종 의사결정권 및 팀원의 방출이나 영입권을 부여받습니다.]

차분하기만 한 'SOO'의 안내에 뒤이어 여섯 명의 얼굴이 그려진 주사위가 등장해 굴러가기 시작한다. 시목의 눈동자로 그 짧기만 한 유흥이 빠르게 흘러갔다. 다채로운 얼굴을 내보이던 주사위가 마침내 멈춰선 순간, 열 개의 눈동자가 모두 이쪽을 향한다.

[서부 연합 C팀의 팀장은, 황시목 씨로 결정됐습니다.]

눈썹을 까닥 들어 올린 중년 남성에서부터, 워낙 세게 고개를 돌린 탓에 추적자로 명명된 여성의 포니테일이 격렬하게 흐트러지기도 했다. 시목은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저격수와 얼결에 눈이 마주친다. 본인의 이름까지 선뜻 알려주며 먼저 악수를 청한 그녀와 달리, 제일 멀찍한 데에 서서 투덜거리기 여념 없는 사내의 눈빛은 차라리 적의에 가득 찼다고 보는 게 맞을 터였다.

"팀 조합도 밍숭맹숭인데, 팀장까지...하! 아주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는구만. 어으! 내가 회삿돈 삥땅 친 것만 안 걸렸어도 이딴 데에 끌려와서 죽어나가진 않을 텐데, 아이고 어머니.."

허공 향해 고함 아닌 고함을 친 그의 하소연이 영향을 끼쳤는진 몰라도, 나머지 팀원들의 표정이가히 좋지만은 않았다. 남성 팀원들 중엔 체격조건이 제일 떨어지는 데다가 바로 옆의 저격수처럼 공격형 특성을 지닌 인물도 아니고, 발 하나 잘못 디디면 목숨이 달아나는 이 끔찍한 리그 안에서 전적으로 믿음을 주기엔 영 탐탁지 않은 팀장이라 결론 내렸을 가능성이 크다. 정작 당사자인 시목조차도 본인이 팀장이 될 줄은 몰랐는지, 얼결에 악수를 마친 뒤엔 눈만 깜빡거리며 자리를 지키고 선 게 고작이었다. 그런 팀 사정 따위야 애초 상관없다는 듯 SOO의 음성이 이어진다.

[여러분은 제14회 MFL에 영광스런 참여 기회를 얻게 된 주역들입니다. 앞으로 헤쳐나가게 될 역경 속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승리의 값진 기쁨을 맛볼 수 있길 기원합니다!]

이전보다 한층 상기된 듯한 그녀의 음성과 달리, 팀원들은 경멸과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MFL. 각기 다른 죄목으로 수용된 죄수들을 추첨해 '생존 게임'이란 명목하에 그들의 처절한 사투를 한낱 오락거리로 소비하는 리그. 말이 좋아 그렇게 불렸지, 실상을 들여다보면 결국엔 서로 죽고 죽이는 '살인 게임'이라고 명명하는 게 맞았다. 32개 팀 중 최후까지 살아남은 마지막 한 팀만이 우승팀이 되어 막대한 부와 명예를 얻게 된다. 물론 다들 '모 아니면 도'라는 각오로 리그에 임하겠지만, 생존 확률을 냉정히 살펴본다면……,

[서부연합 C팀은 안개의 숲 남서부 지역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다들 출발선 앞에 서 주십시오.]

그러나 이 자리에 서서 같잖은 감상에 젖기엔,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다. 팀장 선출 뒤엔 바로 실전 투입이다. 행색부터 특성까지 저마다 제각각인 팀원들이 출발선에 섰다.

[9, 8, 7, 6, 5…]

카운트다운과 함께 서서히 눈앞의 장막이 사라지고 숲의 전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발밑까지 엄습하는 회백색 냉기.

[안개의 숲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시목은 연무의 한 가운데 서 있다.

2020 MFL

W. 화양리

[이번 스테이지는 '어둠의 늪'. 타이틀은 '희생'입니다.]

새로운 지대는 하늘이 온종일 먹색이었고, 발아래를 살피려면 한참 동안 미간을 찌푸려야 할 만큼 어둡기만 했다. 최약체로 평가받던 서부연합 C팀은 운 좋게 여태껏 한 명의 사상자도 내지 않은 상태다. 오히려 그 참이 독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총32개 팀이 참가했던 리그가 중반으로 치달으며 현재는 8개 팀만 생존한 상태였다. 저마다 크고 작은 희생을 치른 경쟁팀들이 '전원생존'이라는 성과를 낸 서부연합 C팀 궤멸을 위해 일시적 동맹을 체결했단 소식이 들려오는 시기다.

"어, 은수 씨. 조심해요! 잘못하다가 넘어지겠네."

시목의 팀은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늪지대를 첨벙거리며 나아가는 중이다. 행렬 중간쯤을 책임지던 여진의 목소리가 경종을 울린다지만, 유독 비틀거리는 게 심한 은수는 그저 걷는 것조차 무척 힘에 부쳐 보였다. 바로 직전 스테이지에서 남부 연합 E팀의 옵서버를 추적하던 그녀는 함정에 걸려들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여진의 지원 사격으로 위험에서는 벗어났다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다리의 상처가 악화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았는데 늪지대를 헤매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테지.

"얼마나 더 가야되는 건데? 이 지긋지긋한 늪만 계속 헤매야 된다고?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

끔찍했던 지난 스테이지를 복기하며 나아가던 중, 이번엔 가장 후미에서 따라오던 서동재가 한껏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어온다.

"거 조용히 좀 갑시다 조용히 좀, 누군 하고 싶어서 이 개고생을 하는 줄 아나."

그와 달리 무던한 성격인 수색꾼 장건이 쏘아붙였다. 일순간 두 사내가 서로를 노려보며 신경전을 벌인다 싶었지만, 여기서 싸움이라도 벌이기엔 두 사람 다 에너지가 아깝다고 생각할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어깨를 툭툭 건드려 달랜 여진에 의해 장건이 다시 앞을 보고 걷는다.

다들 말이 없어졌다. 지쳤고, 굶주렸으며, 가슴 속 어렴풋이 두려움이 씨앗을 뿌려 어둑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을 테다. 그건 아마도 이번 스테이지에 부여된 '희생'이라는 타이틀 때문일 공산이 컸다. MFL 속에서 수많은 죽음들이 스쳐 갔다지만, 망자들의 공통점만큼은 확실했다. 모두 각 스테이지의 취지에 맞는 사인을 가지고 한 줌 재와 같이 사라졌다는 것. 그러던 와중 맞닥뜨린 키워드는 '희생'이었고, 서부연합 C팀은 공공의 적으로 급부상했다…………. 선두를 지키던 시목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지나 싶은 때였다.

"저 붉은 줄기 맹그로브가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육지가 나올 거야. 이전 참가자들이 만들어 놓은 간이 천막도 그대로 유지됐을 가능성이 크지."

바로 뒤에서 따르던 사내가 어깨를 건드리며 멀찍한 곳 보이는 맹그로브 나무를 지적했다. 창준의 안경알로는 습기가 들어차 있었는데, 지친 기색과 달리 그의 눈빛이 생기로 반짝이는 게 그나마 희소식이다.

"...확실합니까?"

"물론."

경계를 놓지 않은 시목이 물으며 나침반 스킬을 발동한다. 확실히, 그가 알려준 방향으로 청신호가 깜빡이며 옳은 행로라는 걸 증명했다. 더군다나 자신 있는 어조로 답한 그가 손가락으로 어느 한구석을 가리키자, 어지러이 엉킨 나뭇가지 속 펄럭이는 분홍색 리본이 보이기 시작한다.

"작년 리그 생존자가 묶어놨던 표식이야. 여전히 남아 있군."

창준은 작년 리그까지의 역사와 이 거대한 숲의 설계도면에 대해 적잖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목적지가 생겼으니 그나마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이다. 두 사람이 거의 나란히 발길을 맞춰 걸어 나가려던 순간, 사이를 비집고 들다시피 한 누군가가 거친 숨을 헐떡이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저기로 가면 되는 건가요? 팀장님."

"……."

"갑자기 힘이 나네요. 먹을 만한 게 있나 찾아봐야겠어요."

"영은수 씨, 무리하면...."

뜻밖에도, 가장 지친 기색이 역력하던 그녀가 경쟁적으로 옆 사람 몸을 밀치며 앞서 나아간다. 도무지 부상자의 행색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활기 넘치는 동작이었다. 그래서 시목의 미간으로 깊은 주름이 팬다. 영은수는 똑똑하고 유능한 팀원이긴 했지만, 어딘가 맹목적인 느낌을 풍기는 참가자이기도 했다. 특히 조금 전 어깨를 밀치고 지나갔던 사내. 이창준이라는 남자에 대해서는 극도로 적대시하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기도 했다.

"영은수 씨. 이리 오세요."

언짢은 표정 유지해, 시목이 늪을 헤치고 나아간다. 먼저 뭍을 밟으려던 그녀를 제지한 채 자신의 뒤로 물리고 창준을 앞세우기도 했다.

"단독 행동은 절대 불가합니다. 여러 번 말했을 텐데."

"하지만,"

"영은수 씨를 위해서가 아니라, 팀 전체를 위해서입니다. 명심하세요."

익히 길을 알고 있는 '지도'가 선두를 맡아 뭍으로 올라서는 동안 서릿발 같은 조언이 이어졌다. 옆에서 듣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가차 없는 어조였기에 얼른 따라붙은 여진이 은수의 어깨를 감싸낸다.

"그래요 은수 씨~ 몸도 성치 않은데 에너지 아껴둬야죠. 응?"

물론 그 얄팍한 위로가 불같은 의욕으로 타오르는 동료에게 진정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느냐 한다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여진의 어깨동무를 떨쳐낸 은수는 입술을 꾸욱 눌러 물고 스스로 뭍에 올라 리더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팀원 전체가 여전히 캄캄하기만 한 땅을 밟는 이 때에, 아득한 창공 어딘가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공으로 다른 팀의 사망자가 발표된다. 하지만 이젠 누구도 거기에 동요하지 않았다. 열 손가락을 훨씬 넘긴 이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때로는 직접 목숨을 거두기도 하며 타인의 죽음에 무감해진 탓이다.

"30분간은 일단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습니다. 다들 너무 지쳤습니다."

"이 근방에 다른 위험요소는 없을 거야.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마른 장작거리가 있을 수도 있으니 찾아보도록 하지."

적당한 데에 자리 잡은 시목이 팀원들에게 쉬어도 좋다는 사인을 보내는 사이, 창준은 장건과 함께 주변을 탐색하러 떠났다. 목숨처럼 아끼는 총구를 이리저리 살피며 점검하는 여진마저 나무 그늘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훨씬 짙은 그림자가 시목의 어깨에 드리운다. 무심코 돌아보자 이전보다 배는 더 창백해진 뺨이 코앞에 있었다.

"제가 마음에 안 드신다는 거 알아요. 그래도 일부러 떨궈낼 생각은 마세요.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니까요."

영은수는 어느 때보다 빠른 어조로 쏘아붙이며 눈을 맞춰온다. 멀지 않은 데서 이 당찬 선전포고를 구경하던 서동재가 휘파람을 불며 짓궂게 호응했지만, 시목은 그런 장단 놀음에 맞춰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 그게 왜 중요합니까. 그럴 생각 없습니다. 이유도 없고."

"...팀장이잖아요! 결정권자니까,"

"……."

"나중에 불리하면 팀원을 방출할 수도 있고, 또..다른 팀원이랑 트레이드하는 경우도 있다고..."

"안 합니다."

"안...해요?"

망설임 없는 대답에 불같던 추적자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도 같았다. 이열~눈물겨운 전우애네. 어느덧 높다란 나뭇가지 올라 이죽이는 서동재를 노려본 뒤, 시목은 다시 눈앞의 상대와 말을 이어간다.

"팀을 깬다는 자체가 여러모로 불리합니다. 트레이드한 팀원이 배신하지 말란 법도 없고."

"단지...정말, 그래서.."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아니요. 아닙니다.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영은수 씨 내가 왜 감ㅅ..."

"그냥 뭐든지요. 저는 꼭 우승해서, 이뤄야 할 일이 있거든요. 우승자 전원에게 소원을 이뤄주는 특전이 주어지잖아요."

내가 왜 당신한테 감사 인사를 받아야 하는지. 시목은 천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단 표정이었지만, 아픈 다리를 삐딱하게 짚은 채로 조잘조잘 떠드는 그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억울하게 수용소로 들어간 우리 아버지, 내가 꼭 구해야 하거든요. 그거 하나 때문에. 정말 그거만 생각하고 그 악마 같은 사람도 견디면서 있는 거니까."

"여기가 영은수 씨 분풀이하는 곳입니까?"

"뭐라고 하셔도 좋아요. 우승할 때까지 이 팀에 남아 있을 수만 있으면."

"……."

"그거면 돼요. 난....그거면 다 참을 수 있어."

일순간 추적자의 매서운 눈빛이 어깨 너머를 노린다. 장건과 간단한 정찰을 마치고 온 중년 사내에게 영은수의 시선이 꽂혀 있는 걸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자세한 내막이야 알 수 없지만, 이 여성은 지도 이창준과 지독한 악연으로 얽혔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글쎄, 그 몸으로 당장 달리기나 할 수 있을까아. 팀에서 제일 뒤처지는 건 여섯 살 어린애도 알겠다."

물론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서동재의 어깃장 따위가 추적자의 결연한 의지를 꺾을 수 없을 거였다. 못마땅하게 그를 흘겨보던 영은수가 절뚝거리며 쉴 자리를 찾아 멀어진다.

애석한 점은, 세상일은 결코 의지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단 사실이었다. 부상을 금방이라도 털고 일어날 기세였던 영은수는 끝내 회복하지 못했고 오히려 한쪽 다리에 괴사가 일어나는 듯했다. 팀 내에 치유 특성을 가진 팀원이 있었더라면 사정이 좀 더 나아졌을지도 모르지만, 황시목 팀장이 이끄는 서부연합 C팀에 그와 같은 특성을 지닌 멤버는 없다. 여진의 '괜찮아질 거다'라는 공허한 위로만이 이따금 은수를 찾았을 뿐….

어둠의 늪. SOO가 소개했던 이 늪지대에 도사린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팀원들은 사흘 밤낮을 탐험하며 체력을 소진했고 이렇다 할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번 스테이지에서는 다른 팀을 한 차례도 마주치지 않은 게 의외였는데,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해졌다. 사상자가 나오지 않은 건 호재라지만 이 상태로 늪지대를 헤매다가 시간을 모두 소비한다면 다들 아사하고 말 것이다.

"……."

비축 식량이 바닥을 보이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시목은, 전날 밤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새벽을 맞았다. 새벽이라고 해보았자 손목에 찬 시계로 시간을 가늠한 것일 뿐 천지사방이 어두컴컴해서 밤이나 매한가지인 풍경이 여전하다. 주변에서 웅그린 채 잠든 팀원들을 찬찬히 살피다가, 종반에는 가장 후미에서 뒤척거리는 몸에 시선이 멎었다. 통증이 심한 만큼 역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테지. 영은수의 긴 머리칼이 어깨에 흐트러진 걸 지켜보며 배낭을 뒤지던 차다. 이전 스테이지에서 획득해 남겨둔 소량의 꿀이나마 그녀에게 전달할까 싶어서였지만,

투둑, 툭- 툭─

갑자기 손등을 적셔오는 습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순간 몸을 뒤집어 누우려던 영은수와 눈이 마주쳤는데, 등판에 빗물을 적셨을 은수 역시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시목은 손등 맺힌 분홍빛 액체를 똑똑히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나세요."

가장 가까운 곳 잠들어 있던 장건의 팔뚝을 신발로 건드리며 낮게 읊조린다. MFL에서 수백 가지 자연 현상을 경험해 왔다지만, 그것들은 모두 고도의 프로그래밍을 거쳐 조작된 현실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살인 게임 속 등장하는, 상식을 벗어난 이벤트는 대체로 끔찍한 위험이 닥쳐올 것임을 암시한다. 분홍색 빗방울에 코끝을 대어본 시목이 밭은기침 토해내며 얼른 얼굴을 뗐다.

"일어나요. 모두!"

전에 없이 소리친 그가 장건을 잡아 일으켰을 때, 여진은 이미 은수를 부축한 채 걸음을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나무에서 자고 있던 서동재와 그 옆의 창준 역시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끼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전과 달리 구름의 움직임이 빨라진 하늘은 불그스름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지금 이거..."

"신경독의 일종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 농도가 매우 옅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요."

"신경독? 그럼 몸에 닿으면 안 되는 거 아냐? 염병! 당장 우비부터,"

"아니. 지금...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아."

한창 부산을 떨려던 서동재를 젖히고, 뒤편을 가리킨 장건이 차마 못 볼 것을 맞닥뜨린 듯한 표정이었다. 그를 좇아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본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 잔잔해 보이기만 하던 늪지 표면이 부글부글 끓으며 선홍빛 거품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건 누가 보더라도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이 진화한 듯한 색채다. 창준의 입술 사이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탄식처럼 내뱉은 것과,

"범람이야. 늪지대가...늪 전체가 우리를 공격할 거야."

늪을 넘쳐 솟구친 액체가 이쪽으로 흘러들기 시작한 게 거의 동시였다.

"뛰어요..!!!!!!"

가장 먼저 소리친 장건이 망설이지 않고 전방을 향해 달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앞만 보면서 질주를 이어갔다. 죽기 살기로 뛰고 있음에도 꿀럭대는 소리와 함께 뒤통수까지 따라붙은 독극물의 물결이 금방이라도 팀 전체를 집어삼킬 것만 같다. 와중에 원래 속도를 낼 수 없는 영은수를 끝까지 부축하던 여진이 제일 뒤처졌다. 흘끗 뒤를 돌아본 서동재가 무서운 기세로 고함을 친다.

"그냥 냅둬! 너 혼자 뛰어오라고!!"

서동재의 외침이 고요한 늪지대 곳곳을 채웠다. 아마 그는 팀원 중에서 유일한 공격 특성을 가진 한여진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기에 그처럼 외쳤을 거다. 하지만 이를 악문 여진은 끝까지 은수를 놓지 않은 채였다. 이젠 정말 피할 수 없이, 턱밑까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찰나다. 선두에서 뛰던 장건이 목청 터져라 외치며 손짓하지 않았더라면 다들 비참한 결말을 생각했을 거였다.

"이쪽이다! 여기 석상이 있어...!!! 다들 이리 와요, 어서!"

정신없이 뛰다 보니 늪지대의 수풀을 제치고 우뚝 선 거대 석상이 등장한다. 지도 특성을 가진 창준은 자신의 예상 범위에 없던 구조물을 발견하고 잠시 당황한 눈치였지만, 지금은 목숨을 부지하는 게 급선무였으므로 장건의 도움을 받아 석상을 오르기 시작했다. 냉정한 협상가와 팀장 역시 자신의 몸을 사다리처럼 내어준 장건을 통과해 석상의 허리 즈음에 매달린다. 마지막으로, 은수를 먼저 올려보낸 여진 역시 가까스로 피신에 성공했다. 아마 몇 초만 동작이 굼떴으면 그녀의 모습을 영영 보지 못하게 되었을 노릇이다. 저마다 석상의 거친 표면에 바짝 달라붙어 숨을 돌리려는 사이, 발밑으로 검붉은 파도가 여전했다.

쿠르륵, 쿠우!우우─!!!

석상의 발목 즈음까지 차올라 덮친 물살이 무척 매서운 기세다. 다들 그 광경을 보고 싶지 않다는 듯 외면을 택했지만, 애석하게도 눈앞에 닥친 현실은 그 정도의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한동안 멀쩡히 버티나 싶던 석상 밑동이 조금씩 가라앉으며 진동을 전했기 때문이다.

"녹아내리고 있어! 이 망할 독성 때문에, 점점..!!!"

"이대로 있다간 정말 죽게 생겼어요. 무슨 수를 내지 않으면,!"

석상이 유일한 동아줄이 아니었나.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팀이 전멸하게 되는 건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하는 석상을 체감한 시목이 입술을 깨문 때였다. 뇌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하늘 한쪽으로 서광이 돌더니, 곧 익숙한 화면이 나타난다.

[MFL에서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또한, 생존의 법칙으로 통합니다.]

이 살풍경과는 조금도 연관 없다는 듯 평온한 SOO의 음성이 여섯 사람을 찾았다. 멍하니 그걸 바라보던 여진이 욕을 내뱉는다. 이제 석상은 금방이라도 선홍빛 물결 향해서 고꾸라질 듯 기운 형국이었다.

[이번 어둠의 늪 스테이지의 타이틀은 ‘희생’입니다.]

"닥쳐...!! 그딴 말을 왜....!!!"

여진의 음성이 울부짖다시피 갈라져 허공을 메웠지만, 그것만으로 저 끔찍한 존재에게 작은 흠집조차 내지 못할 거다. 장황한 서두를 내뱉은 SOO의 음성을 듣던 시목이 깊게 눈을 감았다. 그는 모든 걸 짐작한 표정이다. 왜 이번 스테이지의 타이틀이 '희생'이었는지. 어째서 한 번도 다른 팀을 마주치지 않은 것인지.

[당신은 팀원들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었나요?]

상대 팀을 죽일 필요가 없었던 거야. 우리끼리, 팀원 사이에서 사상자를 내야 하는 게 이번 스테이지의 목표였으니까…….

[석상은 오로지 성인 5명의 무게까지만 버틸 수 있습니다.

시간 내에 한 명이 떨어지지 않으면, 모두 물살에 휩쓸리게 됩니다.]

"그딴 개소리, 집어ㅊ...치우라고!!!"

[시간이 많지 않군요.]

여진의 일갈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팀원들의 시선이 빠르게 맞닿았다. 서로가 서로를, 또한 팀장을. 여태껏 본 중 가장 비정하고도 간절하게 응시한다. 더 이상의 설득은 없다는 듯 침묵한 SOO는 이제 화면으로 숫자만을 띄웠다.

[59, 58, 57, 56……]

채 1분도 남지 않은 상황이다. 다급해진 서동재가 악을 쓰기 시작했고, 긴 다리와 체력을 이용해 영은수의 가장 가까운 곳까지 접근했으며, 이를 눈치챈 한여진이 총구를 휘둘러 그를 방해했다. 발밑에서 지옥과 같은 아우성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시목은 핏기 없이 질린 입술을 한 채 그들을 내려보았다. 특히 영은수와 눈이 마주쳤을 땐, 차라리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하고 한심한 바람을 키우게 된다.

"다 죽을 거냐고!!! 결정을 내려 황시목!!!"

한여진의 방해에 한쪽 팔을 속박당한 서동재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외친 때였다. 시목은 온몸이 밑으로 미끄러질 정도로, 아주 강하게 발목을 붙들어 오는 악력을 느낀다.

"……."

영은수는, 아직 선연한 눈동자 틈 없이 빛나는 우리의 추적자가 옅게 미소 짓고 있었다. 시목은 붙들린 발목이 불길에 타오르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약속해요. 우승하면, 특전자 명단에 나 포함시켜 준다고."

"영은ㅅ.."

"시간 없어요. 빨리."

반사적으로 입을 벌린 시목이었지만, 단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맑게 물기 차오르는 그녀의 눈을 마주해 어떠한 답을 내놓아야 할지 정말로 막막해진 탓이다. 뭔가를 눈치챈 여진이 알 수 없을 소리를 내뱉으며 필사적으로 여기까지 기어오르려 했지만, 추락을 염려한 장건이 그녀를 말리면서 발밑은 혼전 상황이 이어진다.

"나 어차피 가망 없잖아. 이젠 제대로 걷지도 못할 텐데, 오히려 팀에 짐만 되겠죠. 그러니까...약속해줘."

"……."

"우승팀 특전 명단에, 나 포함 시킨다고. 약속해줘요."

흰 손이, 이미 힘이 빠져버린 은수의 한쪽 팔이 석상 표면에서 미끄러져 허공에 나부낀다. 19, 18, 17. 카운팅 한창이던 숫자의 색이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시목은 영은수의 눈을 바라보며 세상 가장 무력한 목소리로 답한다.

"약속,하ㄱ......."

발등 스친 손가락이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여진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은수의 몸이 삽시간에 석상을 떠나 아래로 추락했다. 그녀의 긴 머리칼이 붉은 물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석상은 거짓말처럼 우뚝 서더니 굳건한 피난처를 자처했다.

"………."

"이거....이게 다..뭐에요...?지금.....이..게.."

숨 막힐 정도로 고요한 석상에 들러붙어, 누구도 여진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팀원의 죽음을 처음으로 목도한 자들은 슬퍼할 기회마저 잊은 채 멍하니 숨만 쉴 뿐이었다. 약 10초를 남겨뒀던 카운트 화면이 사라지고 선명한 불빛과 함께 공지가 떠오른다.

[서부연합 C팀, 어둠의 늪 스테이지 미션 클리어. 다음 스테이지로 이동합니다.]

  

- MFL 참가 약관 -

<우승자 특전에 관한 사항>

…………(중략)…………

⑧ 우승팀 내 사망자가 발생한 경우에도 특전 혜택은 동일하게 주어지며, 참가자가 사전 제출한 법정 대리인이 그 권리를 양도받을 수 있다. 단, 생존한 팀원들의 협의를 거쳐 과반수가 이에 동의하여야 특전 혜택 효력이 발생한다.

※ 팀장이 생존했을 시, 팀장은 과반수 표결에서 3개의 표를 행사할 수 있다

  

8개 팀 중, 이제 4팀만이 생존했다.

[이번 스테이지는 '혼돈의 밀림'에서 진행됩니다. 타이틀은 '의심'.]

숨구멍을 막는 습도와 사방 빽빽하게 들어찬 나뭇가지 사이에서, 이제 팀원들은 대화를 잊다시피 한 상태다. 남은 기력마저 앗아가는 이곳의 기후가 단단히 한몫을 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앞에서 추락해 사라져 버린 영은수의 모습을 그 누구도 쉽게 떨치지 못한 까닭이 더욱 클 거다.

분기 어린 눈물을 삼켰던 장본인. 저격수 한여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씩씩하게 걸음 옮기고 있었지만, 리그 초반부 느껴지던 싱그러운 활기 따위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녀는 팀의 유일한 공격수라는 책무를 잊지 않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을 게 뻔하다. 또한 더 이상의 희생자를 막기 위해 더욱 필사적으로 싸울 거였다. 당장의 원수처럼 대립했던 서동재를 기꺼이 참아주며 동행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여기서부턴 길을 알 수 없어. 이번 2020 MFL부터 새롭게 추가된 구간이 분명해."

앞장서던 창준이 안경을 추어올리며 더운 숨을 내뿜었다. 지금까지는 그의 '지도' 특성을 활용해 비교적 쉽게 길을 찾아왔다지만, 이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탐험지대가 펼쳐진 셈이다. 물론 나침반인 시목의 특성을 앞세운다면 최소한 아예 틀린 방향으로 나아가는 건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특정된 목적지가 아닌, 동서남북 어디로든 헤매며 길을 찾아 나가야 하는 수고는 불가항력이다. 더군다나 이번 스테이지의 타이틀을 상기한다면……,

"뭐야. 이제부턴 앞날이 막막한 건가?"

역시나 나쁜 소식은 가장 먼저 캐치해내는 서동재가 앞으로 치고 나오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커다란 눈동자에는 먹잇감을 찾는 듯한 절박함과 동시에 경계가 느껴진다. 아마도 그건 '의심'이라는 타이틀을 머릿속 깊숙이 박아둔 직후부터였을 거다. 그 뒤로 잔뜩 지친 장건과 못지않은 상태인 여진을 살펴보고, 시목이 모처럼 목을 울린다.

"여기서 개인 물품 정비하고, 앞으로 나갈 방향에 대해서-"

"방향은 개뿔이, 지금부터 지쳐 나가 떨어지는 놈은 가차없이 버리고 가야겠어. 어때? 팀장 생각도 그렇지?"

때마침 주변 나뭇잎마다 맺힌 이슬을 발견해서 한 소리였건만. 누구보다 빠르게 이슬로 목을 축이는 서동재가 제대로 초를 쳤다.

"...서동재 씨."

"이번 타이틀을 잊은 건 아니겠지? 의심이라잖아 의심, 팀원 중에 조금이라도 의심스럽게 굴거나 밍기적대면서 팀에 짐이 된다면,"

"말을 참 웃기게 하네. 그쪽은 퍽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나 보지? 특성이 협상가인 주제에."

서동재보다 좀 더 커다란 잎을 탈탈 털어 목을 축이던 장건이 일침을 날렸기에 상황이 아주 묘하게 되어버렸다. 평소라면 웃으며 장건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달랬을 여진조차 이마 짚고서 한숨을 쉬는 듯하다. 드디어 시작된 건가. 철저히, 관찰자의 입장으로 두 사내의 대립을 지켜보며 되뇌어 보기로 했다. MFL의 후반부로 치달을수록 가장 두려운 요소. 그건 상대 팀의 강력한 무기나 계책 따위가 아니라, 극한으로 내몰린 팀원들 간의 내분이나 불신이었다. 다들 한껏 지친 것은 물론이고 팀원까지 잃으면서 돌이킬 수 없는 패배감에 젖은 때다. 이런 시기에 내분까지 일어난다면 돌이킬 수 없을 노릇이었다. 옆에서 목을 축인 창준이 남은 이슬을 건네었지만, 시목은 그마저도 물린 채 중재에 나선다.

"두 분은 잠시 떨어져 있는 게 좋겠습니다. 이런 언쟁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언젠 바람직해서 한 일이었나? 그랬다면 이전 스테이지에서 영은수를─!!!!"

두 번째 잎을 움킨 채 지껄이던 서동재였지만, 일순간 팀원 전체가 돌처럼 굳어버린 채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서동재는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 잎사귀 덕분에 굵직한 줄기만 덩그러니 쥔 우스운 모양새다.

"ㅁ,뭐야....드디어 미쳤어? 나한테 총을...?!"

총성의 진원지를 찾아낸 서동재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매서운 눈빛으로 따져 물었다. 하지만 여진의 실력을 감안해 볼 때, 마음만 먹었다면 진작에 시끄러운 협상가의 머리통을 날리고도 남았을 거다. 침착한 표정 유지한 여진은 이슬에 코를 대어보더니 더욱 확신에 찬 표정으로 입을 뗐다.

"그거 마시지 마요. 다들 내려놓으세요."

"무슨...이..이거?"

"보통 물이 아니야. 환각 증세를 일으킬 수도 있고, 아니면 마비라든가."

"염병. 뭐 믿을 거 하나 없어, 물도 마음대로 못 먹나."

여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영롱한 이슬방울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바삐 목을 축이던 장건도, 당황한 표정의 창준도 잎사귀에서 손을 뗀다. 그리고 그 순간 창준의 안경알로 녹색 빛이 반사되었다.

의 심

생동하는 식물처럼 기묘하게 뒤틀리던 글자가, 서서히 분열해 더욱 많은 음절을 만들어 낸다.

끝 까 지 의 심 하 고 또 의 심 하 라

다들 멍하니 그 끔찍한 메시지를 응시하기만 했다. 시목은 불현듯, 맞은편에 서 있던 저격수를 바라본다. 어딘가 흐리멍덩한 눈의 세 명과 달리 두 사람은 운 좋게도 물방울에는 혀끝 하나 대지 않은 상태였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다. 눈짓을 주고받은 여진이 저격용 장총 대신 옆구리에 찼던 권총을 빼 들고 숙련된 동작으로 장전을 마쳤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대응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여러분은 여태껏 함께해 온 팀원을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마침내 다시 나타난 SOO의 질문과 함께 선연한 감각이 시목의 등골을 훑고 지났다. 장건이 서동재를, 서동재가 이창준을, 이창준이 다시 장건을…. 서로가 서로를 의심 어린 눈초리로 노리고 있었다.

[이번 스테이지의 특별 이벤트. 바로 '스파이 게임'에 대한 공지를 시작합니다.]

머리 위 오색찬란한 시각 효과와 함께 공지가 등장했지만, 그 누구도 미소 짓거나 호응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녀. SOO의 감정 없는 목소리만이 이 드넓은 밀림을 물들인 채였다.

[현재 생존한 4개 팀 중, 2개 팀에 첩자를 심어두었습니다. MFL이 사전에 고도의 훈련을 거쳐 투입시킨 전문 스파이라고 할 수 있죠. 여러분은 지금부터, 그 스파이를 찾아내야 합니다.]

"스파이를 찾으면...."

[지목 기회는 단 한 번. 진짜 스파이를 골라낸 팀은 다이렉트로 다음 스테이지 진출이 확정됩니다. 하지만 무고한 팀원을 스파이로 지목하게 되면, 팀 전체가 몰살하는 간단한 게임이죠. 팀원들 간의 원만한 의사소통을 통해 스파이를 찾아내세요.]

"말,도 안돼. 그걸...그걸 우리끼리...."

[스파이 최종 지목권은 각 팀의 팀장에게 주어집니다.]

총구를 아래로 떨군 여진이 경악한 어투로 중얼거렸지만, SOO는 애초 들리지 않는 듯 공지를 이어간다. 무엇보다 가장 충격적인 건 마지막 화면을 채운 붉은 글자였다.

[단, 토론 도중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팀원 한 명이 사망할 시엔, 이 또한 성공으로 간주합니다.]

"사망이라는 건, 팀원 간의 살상인 경우도 포함한다는 겁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서부연합 C팀 황 시 목 님.]

한발 앞으로 나선 시목이 제법 또렷한 어조로 물었을 때, 답변은 그 어느 때보다 신속하게 전해진다.

[그렇습니다. 스파이 색출 과정에서 벌어지는 죽음이야말로, MFL이 지향하는 생존방식에 부합합니다.]

결국은 서로를 죽고 죽이는 끔찍한 진창. 그 한가운데를 스스로 구르며 생존을 구걸하라고 등을 떠밀고 있는 격이었다. 시목은 굳게 입술 다문 채 실체 없는 화면을 노려본다. 4개 팀원 중에 오로지 2명만이 스파이의 신분이었다. 그 확률을 좇아 진짜 스파이를 색출해내느니, 팀원을 한 명 제거함으로써……온몸에 찬 소름이 돋는다. 이건 정말 인간이 벌일 수 있는 가장 잔혹한 생존기였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은 24시간입니다. 그럼, 건투를 빕ㄴ……]

"처음부터 의심스러웠지! 그래, 설계자나 하면서 호의호식하던 인간이 이런 데 끌려오는 것부터 말이 안 되잖아? 그렇지 않아?"

SOO의 음성이 끝맺기도 전에 서동재의 추궁이 시작됐다. 바들바들 떨리는 그의 손끝은 정확히 한 사내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지목당한 창준은 어딘가 비어버린 눈으로 가만히 그걸 듣는 채다.

"그 뭐야, 그..어둠의 늪? 그래! 거기서도 갑자기 독극물이 들끓는 데로 가서 이 꼴이 난 거 아니야? 응? 당신이 애초에 거기로 우리를 끌고 가지만 않았어도!"

"서동재 씨. 그건 비약입니다. 당시에 그 방향 말고는 늪을 벗어날 곳이.."

"설계자였다고..!!! 살인자나 마찬가지야. 끌려간 영은수 아빠도 당신이 그렇게 만든 거나 마찬가지라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다들 뭘 그렇게 위선 떠는 거야? 까놓고 얘기해 보자고. 우리 중에 제일 의심스런 인간이 누군지!"

"이런 식으로 의심하기 시작하면,"

"...맞아."

서동재를 말리려 나섰던 참이지만, 그 흐름을 끊은 건 뜻밖에도 여태 침묵을 지키던 사내였다. 장건은 다소 붉어진 눈을 한 채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하더니 느릿느릿 앞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신경이 쓰이긴 했지. 지도 특성을 가진 인간은 유일하니까."

"미쳤어요..? 정신 차려요! 갑자기 왜...."

"애초에 옳은 길로 우리를 안내하긴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

한여진은 가까운 동료였던 장건마저 돌변한 모습에 무척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이미 타깃을 정한 두 명의 사내가 초점 흐린 눈동자를 한 채 계속 가까워진다. 이미 늦었어. 그 물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는데. 미간 좁힌 시목이 여진을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논리적인 반박으로 저들을 설득하는 건 이제 불가능한 셈이다. 등 뒤로 느껴진 기척에 돌아보자, 장승처럼 우뚝 선 사내가 알 수 없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다를 바 없지. 이 손으로 많은 사람을 죽인 거나 마찬가지니까."

"이창준 씨. 동요하지 마세요. 지금 환각 성분이 든 물을 마셔서 판단력이,"

"아니. 어떤 핑계를 대도,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아. 나는 한때 MFL의 설계자였고...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어."

"이리 오세요. 어서."

서동재가, 그리고 장건이 살기 등등한 눈빛으로 거리를 좁힌다. 그런데도 창준의 얼굴엔 두려움이나 적의보다는 체념의 감정이 느껴졌다. 채집용 손도끼를 빼 든 장건이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거리를 좁혔지만, 여진의 엄호 사격으로 바닥에 탄환이 튕기자 주춤거리는 행색이다.

"애초에 면죄는 바라지 않았어. 팀원들이라도 생존시킬 수 있다면...그게 내 마지막 소임이라 여겼지."

"이창준 씨,"

"여기까지가 내 역할인 것 같아."

시목은 언제 야수로 돌변해 달려들지 모르는 두 명의 사내를 완벽히 등지고, 오로지 창준을 향해 돌아섰다. 열 마디 말보다 묵직한 눈빛으로 그를 청한다. 하지만, 오히려 벼랑 끝 향해 뒷걸음질 치던 사내는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게 분명했다.

"뒤를 부탁한다. 황시목 팀장."

눈이 마주친다. 안경 너머로 찰나 느껴졌던 것은 회한이었을까.

"안 돼요, 이창준 ㅆ....!!!!!!!!"

총구를 거둔 여진이 다급히 뛰어오며 소리쳤지만, 길라잡이를 자처하던 사내의 그림자는 아귀처럼 입 벌린 초록빛 낭떠러지로 빠르게 낙하했다. 돌처럼 굳어버린 시목의 이마로 뜨거운 바람결이 스쳐 간다. 납작 엎드려 벼랑 밑을 바라보던 여진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못,....나 정말, 더는....못하겠...."

여진의 지친 등판으로, 시목의 정수리로 번쩍이는 섬광이 물든다.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듯 번개가 치기 시작한 하늘을 배경 삼아 요란한 축하 공지가 등장했다.

[서부연합 C팀, 미션 클리어 -

가장 먼저 성공한 팀에게 어드벤티지로 '부상 치유' 옵션이 주어집니다]

쿠구구우우우-우우─

심상치 않은 울림이었다. 불현듯 머리 위를 우러른 시목은 눈이 멀 것처럼 작렬하는 스파크에 저절로 손등을 들어 올린다.

[최종 스테이지로 이동하기 전……]

공지를 이어가던 SOO의 음성마저 끊겨, 눈앞에 암전이 찾아든다. 점멸처럼 껌뻑대는 시야 속에서 섬찟한 벼락이 여진을 덮쳤다. 바닥으로 쓰러지던 시목이 깨달은 건, 여진이 마지막까지 서 있던 지점이 거짓말처럼 텅 비어버렸단 사실이다.

  

[축하합니다. 여러분은 최종 스테이지까지 생존한 선택받은 참가자들입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질리도록 시야를 괴롭히던 숲이 사라진 상태였다. 환각에서 깨어난 서동재와 장건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고, 시목은 곧장 일어나 주변을 살핀다. 꿈인 줄만 알았던 순간이 돌이킬 수 없을 현실이구나 깨닫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여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생존팀인 동부연합 A팀. 그리고 서부연합 C팀이 최종 경합을 벌이게 됩니다.]

"우리 공격수는 어디로 간 거지? 갑자기 이렇게 사라지는 법이 있어?"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요, 그건 아닐 겁니다."

살아남은 세 명이 남성이 서로를 향해 모여든다. 시목은 발밑 감도는 서늘한 바람결 느끼며 사망자 명단을 주시했다. 여진에게 변고가 생겼다면 그녀의 이름도 명단에 등장했어야만 한다. 간결하지만 의심할 여지 없는 시목의 설명에 다들 그나마 한시름 놓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이제부턴 뭘 하면 되는 거지?"

한결 자신감을 되찾은 듯한 서동재가 물었지만, 이번엔 대답대신 예고 없는 돌풍이 불어 세 사람의 혼을 쏙 빼놓았다. 발아래 점령한 바람의 힘은 무척 거대했고 감히 거스를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다. 겨우 눈 감은 채 서로를 붙들고 의지하던 세 사람이 정신을 차렸을 땐, 완전히 다른 세상에 첫발을 디딘 격이었다. 입에 씹힌 모래 알갱이를 뱉어내던 서동재가 얼빠진 표정으로 눈앞의 광경을 응시한다.

"여....긴..."

"숲입니다. 또 다른, 숲."

싸늘한 낯의, 수백 수천 개 유리창이 쏘아대는 반사광을 마주하며 시목이 말했다. 말 그대로 이곳은 '빌딩 숲'이다. 눈 아플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선 직선투성이 빌딩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고 높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높기만 했다.

[이제 새로운 파트너를 소개할 때가 되었군요. 최종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마지막 이벤트.]

엄청난 모래폭풍과 함께 세 사람 앞으로 움푹 땅이 패기 시작한다. 무슨 천재지변인가 싶었지만, 폭풍이 걷히자 서서히 드러나는 낯선 인영에 다들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거대한 몸집과 굳게 다문 입매. 어지간해선 흔들림 따위 없을 매서운 눈매가 살아 숨 쉬는 것이다. 상대의 얼굴을 알아본 장건이 호신용으로 늘 몸에 지니던 단검을 빼 들어 겨누었다. 역시 그를 모를 리 없을 시목이 눈살을 찌푸리며 눈 맞춤을 한다.

우태하. 이제 유일한 경쟁 상대로 남은 '동부연합 A팀'의 근거리 공격수이자 명실상부한 에이스였다. A팀의 팀장은 최빛이라는 여성이다. 그녀가 뛰어난 지략과 승부 근성으로 팀을 이끌었다면, 못지않은 존재감을 뽐내며 적들을 해치운 게 바로 우태하라는 참가자였다. 그러니 나머지 세 남자가 극도의 긴장감을 내보이며 거리를 누려는 것도 당연한 이치일 테다.

"왜. 날 죽이기라도 하려고? 후회할 텐데, 황시목 팀장."

뜻밖에의 여유로운 어투로 던진 그가 싱긋 웃기까지 했다. 이 황당한 상황에 다들 할 말을 잃은 듯했지만, 뭔가를 직감한 시목이 SOO의 목소리가 들려온 허공을 바라본다.

[2020 MFL의 최종 스테이지, 대망의 결승 타이틀은 '대척점'입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머나먼 곳. 빌딩 숲 사이, 반대편에서 역시나 모래폭풍이 일고 있었다.

[팀장의 역할이 가장 중요시되는 순간이기도 하죠.]

A팀의 에이스가 우리 팀원이 되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가장 신뢰했던 팀원을 적으로 만나,]

대척점의 한복판. A팀 최빛의 뒤에 서 있는 사람.

[죽이십시오.]

여진과 눈이 마주친다.





댓글


bottom of page